괴물 대공과의 이혼은 거절합니다

16화: 별실의 베르딘
흰 봉투는 은쟁반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무도회장의 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은 봉투가 아니라 봉인 쪽이었다. 베르딘 백작가의 문양 일부가 아래에 눌려 있었고 그 위를 황도 궁정의 보조 봉인이 덮고 있었다.
가족의 안부.
의전관이 그렇게 말했지만 세리아나에게는 가족보다 절차가 먼저 보였다.
"가족의 안부라 하셨습니까."
의전관이 부드럽게 고개를 숙였다.
"예. 대공비 전하께서 별실로 잠시 와 주시면 됩니다."
카시안의 손등 위 검은 선이 천천히 짙어졌다. 방금 음악 속에서 가라앉았던 기운이 다시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세리아나는 그의 손등에 손끝을 얹었다.
카시안은 멈췄다.
그는 의전관이 아니라 세리아나를 보았다.
"가겠나."
"조건을 붙이겠습니다."
의전관의 미소가 아주 조금 굳었다.
세리아나는 아르덴에게 시선을 보냈다.
"봉투와 은쟁반을 먼저 보존해 주세요. 봉투 겉면과 쟁반 손잡이를 따로 기록합니다. 제가 열기 전까지 누구도 만지지 않습니다."
"예. 대공비 전하."
아르덴이 장갑 낀 손으로 은쟁반을 받았다. 미나는 곧장 밀랍 먹인 종이를 펼쳤다. 의전관은 그 모습을 보고도 웃음을 유지하려 했지만 눈가에는 짧은 금이 갔다.
"가족 간의 사사로운 전갈이라 큰 절차는 필요 없을 듯합니다만."
"그 사사로운 전갈에 황실 보조 봉인이 쓰였습니다."
세리아나는 낮게 말했다.
"황실의 물건이면 절차를 갖춰야지요."
의전관은 더 말하지 못했다.
아르덴이 봉투 가장자리를 살폈다. 봉투 안쪽을 조금 벌렸을 때는 향이 거의 나지 않았다. 그러나 겉면의 금박 틈과 은쟁반 손잡이에서는 단 향이 남아 있었다.
"쟁반 쪽이 더 진합니다."
미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무도회장 중앙에서 맡은 향과 비슷합니다."
카시안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세리아나는 리본 아래 손목을 느꼈다. 장갑과 천 사이에서 맥박이 작게 뛰었다. 통증은 참을 만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별실 문은 닫지 않습니다. 회랑에서 대화하겠습니다. 사적인 가족 안부라면 황실 의전관이 같은 자리에 있을 이유도 없겠지요."
의전관의 대답이 늦었다.
그 침묵만으로도 충분했다.
세리아나는 고개를 들었다.
"안내하십시오."
별실로 이어지는 회랑은 무도회장보다 어두웠다.
벽에는 겨울 사냥을 그린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고 낮은 촛불이 붉은 짐승의 눈처럼 흔들렸다. 무도회장의 사람들은 문가와 기둥 뒤에 멈춰 있었다. 가까이 오지는 않았지만 누구도 완전히 외면하지 못했다.
카시안은 세리아나의 반 걸음 뒤에 섰다.
앞서지도 않았다.
숨기지도 않았다.
별실 문 앞에 선 여자는 세리아나가 너무 잘 아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루시엘 베르딘.
백작가의 적녀이자 세리아나를 이름보다 낮은 자리로 부르던 사람.
루시엘은 연분홍 드레스 위에 진주 장식을 달고 있었다. 환한 색을 입었지만 웃는 입술은 차가웠다.
"세리아나."
카시안의 기척이 조금 무거워졌다.
세리아나는 먼저 말했다.
"호칭을 정정해 주세요."
루시엘의 웃음이 굳었다.
"오랜만에 만난 자매끼리 너무 딱딱한 것 아니니."
"자매의 안부라면 베르딘 백작가의 정식 서신으로 충분합니다."
세리아나는 별실 문을 보았다.
"그리고 저는 발레리우스 대공비입니다."
회랑 끝에서 작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루시엘은 그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더 밝게 웃었다.
"대공비라니. 너도 참 멀리 왔구나. 아버지께서 네가 이렇게 쓸모 있는 혼인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셨을 거야."
쓸모.
그 단어는 익숙했다.
세리아나는 친가의 차가운 식탁과 닫힌 문을 떠올렸다. 그러나 기억은 발목을 잡지 못했다. 그녀의 손에는 대공가의 검은 인장이 있었고 등 뒤에는 먼저 선택권을 묻는 사람이 있었다.
"베르딘 백작께서 보내신 말씀입니까."
"뭐?"
"아니면 황실에서 준비해 준 문장입니까."
루시엘의 눈썹이 움직였다.
세리아나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봉투에는 베르딘 문양과 황실 보조 봉인이 함께 있었습니다. 발신자를 확인해야 합니다."
"가족끼리 그런 식으로 굴면 사람들이 뭐라 하겠니."
"사람들이 듣도록 부른 것은 제가 아닙니다."
루시엘의 뺨이 붉어졌다.
카시안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기운은 점점 차가워졌다. 루시엘도 그것을 느꼈는지 아주 짧게 시선을 피했다.
그 순간 루시엘의 손끝에서 얇은 금빛 리본 하나가 흘러내렸다.
리본은 우연처럼 바닥에 떨어졌다. 세리아나의 발끝 바로 앞이었다. 동시에 루시엘은 다정한 척 팔을 뻗었다.
"오랜만이니 안아 보자."
세리아나는 팔을 내주지 않았다.
루시엘의 치맛자락이 세리아나의 드레스 밑단을 살짝 밟았다. 아주 작은 동작이었다. 누가 보아도 실수라고 우길 수 있을 만큼.
세리아나는 옆 촛대 받침을 잡았다.
몸은 흔들렸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카시안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세리아나는 손끝을 들어 보였다.
멈춰 달라는 신호.
카시안은 그 자리에서 멈췄다.
회랑의 공기가 짧게 멎었다.
루시엘의 눈에 당황이 스쳤다. 그녀는 세리아나가 카시안의 팔 안으로 쓰러지거나 카시안이 분노해 자신에게 달려들기를 기다린 얼굴이었다.
둘 다 일어나지 않았다.
세리아나는 촛대 받침에서 손을 떼고 바닥의 리본을 보았다.
단 향이 났다.
아주 옅지만 분명했다. 금빛 섬유 사이에는 먼지보다 작은 은색 가루가 붙어 있었다.
"미나."
"예."
"리본을 직접 만지지 말고 보존해 주세요. 바닥에 닿은 면과 접힌 면을 구분합니다."
미나가 긴장한 얼굴로 다가왔다. 손은 조금 떨렸지만 절차는 틀리지 않았다.
루시엘이 웃음을 되찾으려 했다.
"무슨 짓이니. 그건 장식 리본일 뿐이야."
"그렇다면 더 쉽게 기록할 수 있겠군요."
세리아나는 루시엘의 장갑을 보았다. 손가락 끝에 아주 희미한 금빛 먼지가 묻어 있었다.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기억할 수는 있었다.
"루시엘 영애. 이 리본이 영애의 물건입니까."
"내가 왜 그런 것까지 대답해야 하지?"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답하지 않았다고 기록하면 됩니다."
루시엘의 얼굴이 다시 굳었다.
주변의 시선이 달라졌다. 방금까지는 세리아나가 친가 앞에서 흔들릴지 보는 눈이었다. 이제는 루시엘이 무엇을 흘렸는지 살피는 눈이었다.
세리아나는 별실 문 앞을 보았다.
"가족의 안부라 하셨지요."
의전관이 조금 뒤에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럼 베르딘 백작가의 정식 위임장과 황실 보조 봉인 사용 기록을 함께 제출해 주세요. 별실 문은 열어 둡니다. 루시엘 영애가 동석하려면 발신자와 전달 경로부터 밝혀야 합니다."
루시엘이 낮게 웃었다.
"네가 정말 대공비라도 된 것 같니."
"된 것 같다고 말한 적 없습니다."
세리아나는 루시엘을 보았다.
"저는 대공비입니다."
그 말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회랑을 따라 무도회장 가장자리까지 닿았다.
카시안의 붉은 눈이 세리아나에게 고정됐다. 그는 이번에도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세리아나의 말을 가리지 않았다.
루시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버지께서 너를 다시 부르실 거야."
"저는 팔려 온 물건이 아닙니다."
세리아나는 천천히 말했다.
"그리고 베르딘 백작가의 접촉은 이미 대공가 계약에 따라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 계약이 네게 영원히 방패가 될 줄 알아?"
"방패는 아닙니다."
세리아나는 아르덴이 보존한 봉투와 미나가 감싼 리본을 보았다.
"기록입니다."
루시엘은 더 다가오지 못했다.
그때 별실 안쪽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소란이 길어지는군요."
문이 조금 열렸다.
황실 시녀복을 입은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옷깃의 은실 자수는 평시 시녀의 것이 아니었다. 황실 직속 시종장 아래에서 움직이는 이들이 쓰는 표식이었다.
그녀는 루시엘을 보지 않고 세리아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대공비 전하. 안쪽에서 기다리시는 분은 베르딘 영애가 아닙니다."
카시안의 기운이 즉시 가라앉았다.
"누구지."
시녀는 카시안의 눈을 피했다.
"황녀 전하의 대리인입니다."
회랑이 다시 술렁였다.
세리아나는 루시엘을 보았다. 루시엘의 얼굴에도 놀람이 있었다. 완전히 연기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루시엘도 전부 알지는 못한다.
이용당한 것인지 일부만 맡은 것인지 아직 모른다.
그때 무도회장 쪽에서 헬라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예법을 지킬 만큼만 허리를 숙이고 곧장 말했다.
"대공비 전하. 샹들리에 위쪽 초 하나가 방금 꺼졌습니다. 단 향이 더 짙어졌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카시안의 손등에서 검은 선이 다시 살아났다.
세리아나는 별실 안의 어둠과 무도회장 천장 쪽을 번갈아 보았다.
두 갈래의 문이 동시에 열리고 있었다.
하나는 황실 대리인의 별실.
하나는 향이 흘러내리는 샹들리에.
세리아나는 리본 아래 손목을 눌렀다.
아팠다.
하지만 닫힌 방보다 열린 위험이 먼저였다. 모두가 보는 곳에서 퍼지는 향을 방치하면 카시안도 무도회장도 동시에 흔들린다.
"아르덴 님."
"예."
"별실 문은 열어 둔 채 봉인합니다. 안쪽 인물의 신분과 동석자를 기록하세요. 미나는 리본을 헬라에게 넘기고 무도회장 샹들리에 아래 접근을 막아 주세요."
카시안이 낮게 물었다.
"너는."
세리아나는 그를 보았다.
이번에는 그가 막지 않으려 애쓰는 얼굴이었다.
"저는 먼저 모두가 보는 곳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루시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세리아나는 그녀를 지나쳤다.
넘어지지 않은 걸음으로.
숨지 않는 대공비의 걸음으로.
"별실보다 무도회장이 먼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