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기 대신 마나 쓰는 세가 서자

6화: 야행(夜行)과 영초(靈草)
사흘이 지났음에도 천팔은 소가주 처소로 복귀하지 않았다.
남궁위는 창공각 집무실에서 보고를 올리는 마태식을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집무실 내부의 공기는 얼어붙을 듯 무거웠다.
"천팔이 사라졌다고?"
"예, 소공자님. 심산 전역을 이 잡듯 뒤졌으나 천팔의 흔적은커녕 싸운 기미조차 찾지 못했습니다. 마치 대기 중으로 증발해버린 것 같습니다."
마태식은 고개를 조아리며 등줄기에 땀을 흘렸다.
남궁위의 안색이 음산하게 일그러졌다. 천팔은 일류 수준의 고수로 어정쩡한 강자에게 당할 인물이 아니었다. 만약 그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면 그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뿐이었다.
"누군가 그 쓰레기 놈을 비호하고 있거나 천팔이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당할 만큼 강력한 자가 가문 내에 숨어 있다는 뜻이겠지."
남궁위는 생각에 잠겼다.
세가 내부에서 차기 가주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둘째 남궁도, 혹은 자신을 견제하려는 세가의 원로 중 한 명이 남궁혁을 미끼로 삼아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려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더 이상 무리하게 움직이지 마라. 섣불리 움직였다가 다른 가주 후보들에게 빌미를 잡힐 수 있어. 다만 별채 주변의 감시를 두 배로 늘리고 저놈이 누구와 접촉하는지 철저히 밀고하라."
"예, 소공자님. 명심하겠습니다."
남궁위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천팔을 잃은 것은 아깝지만 섣부른 행동은 독이 된다는 것을 아는 영민한 사내였다.
소공주의 맹견들이 킁킁거리며 숲을 헤매는 동안 혁은 조용히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고 있었다.
천팔의 실종으로 인해 세가의 감시가 삼엄해졌음을 그 역시 인지하고 있었다. 1서클 마나 감지 덕분에 별채 주변에 숨어 있는 감시자들의 위치를 훤히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1서클 마나 하트로는 세가의 대장로들이나 가주 같은 진짜 괴물들을 상대하기엔 무리다. 서둘러 2서클로 도달해야 한다.’
2서클이 되기 위해서는 온몸의 마나 하트에 더 많은 마력을 집적하고, 심장 주변에 두 번째 서클의 궤도를 안착시켜야 했다. 하지만 이 세계의 옅은 대기 마나에만 의존해서는 수개월이 걸릴 일이었다.
속도를 올리기 위해서는 고농도의 에너지를 지닌 매개체가 필요했다.
혁은 이전 남궁혁의 기억을 뒤적였다.
‘외당 약초 창고(藥草倉庫).’
가문 외당에는 삼류 무사들의 단련과 치료를 위해 모아둔 수많은 영초와 약재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비록 내당의 귀한 영약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1서클 마도사인 혁에게는 충분한 에너지원이 될 수 있었다.
그날 밤, 사위가 어둠에 잠기고 보름달이 구름 뒤로 숨었을 때 혁은 행동을 개시했다.
방 안에서 깊이 잠든 소소의 호흡을 확인한 그는 얇은 흑색 무복을 입고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섰다.
별채 담벼락 뒤쪽, 어둠 속에 몸을 숨긴 감시자가 혁의 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혁은 그를 향해 가볍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정신 왜곡 - 인지 저하(Obscure Vision).’
마법이 작용하자 감시자의 눈동자가 멍해지며 주변의 시각적 명암을 왜곡해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혁이 그의 바로 옆을 지나가도, 감시자의 뇌는 그것을 그저 바람에 흔들리는 그림자로 인식할 뿐이었다.
혁은 소리도 없이 장막을 뚫고 외당 동쪽으로 달렸다.
약초 창고는 두꺼운 진흙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문 앞에는 두 명의 경비 무사가 창을 들고 서 있었다. 게다가 문고리에는 침입자를 감지하는 기초적인 기문진법(奇門陣法)이 걸려 있었다.
혁은 창고 뒤편의 그림자 속에 멈춰 섰다.
‘침묵(Silence).’
먼저 자신의 주변 영역의 모든 음파를 지웠다. 이어서 몸을 감싸 안는 마법을 전개했다.
‘투명화(Invisibility).’
빛의 굴절 공식을 적용해 자신의 신형을 대기 속에 완벽하게 동화시켰다. 1서클 수준의 투명 마법이라 움직임이 빠르면 일렁임이 발생하지만 지금처럼 천천히 은밀하게 움직인다면 일류 고수라 할지라도 시각적으로 그를 감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투명해진 혁은 경비들의 눈앞을 유유히 지나 창고 뒤쪽 벽으로 향했다.
돌담 벽에는 경보를 울리는 기문진법의 주력(朱力)이 흐르고 있었다. 무림인들이라면 이 진법을 깨뜨리기 위해 진기를 쏟아붓거나 해법을 찾아야 했겠지만, 혁의 눈에는 이것 또한 조잡한 마력의 배열에 불과했다.
그는 진법의 중심 혈도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마력 간섭(Mana Disruption).’
지이이잉-
그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미세한 마력 파동이 진법의 주력 흐름을 일시적으로 상쇄하고 교란했다. 경보는 울리지 않았고, 진법의 방어벽에는 혁 한 명이 지나갈 만한 작은 틈새가 생겼다.
혁은 창고 창문의 빗장을 뇌력으로 부드럽게 밀어 올린 뒤 미끄러지듯 내부로 들어섰다.
창고 안은 은은한 약초 향과 흙냄새로 가득했다.
혁은 투명화를 유지한 채 목조 약재 서랍들을 차례로 스캔했다. 1서클 마도사의 감각으로 대기 중의 기운이 가장 강하게 응축된 서랍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창고 가장 깊숙한 곳에 붉은색 비단으로 감싸인 상자 하나가 그의 시선에 들어왔다.
상자를 열자, 불꽃처럼 붉은 잎사귀를 지닌 약초 하나가 붉은 안개를 내뿜으며 누워 있었다.
‘적양초(赤陽草).’
비록 하급 영초에 불과하지만 뜨겁고 순수한 양기(陽氣)를 머금고 있는 불 속성의 영물이었다. 무인들에게는 내공의 양기를 더해주는 귀한 약초였고 혁에게는 마나 하트에 강렬한 에너지 자극을 줄 수 있는 최고의 원소 촉매였다.
그가 적양초를 품에 넣는 순간, 창고 밖에서 순찰을 돌던 경비들의 나지막한 대화 소리가 벽을 타고 흘러 들어왔다.
"어이, 강태 녀석 소식 들었나? 오른손 뼈가 완전히 가루가 되어서 평생 검을 못 잡는다는군."
"쯧쯧, 불쌍한 녀석. 소공자님 지시라 대놓고 배급을 뺐더니 그 서자 놈에게 역공을 당할 줄이야. 그런데 그 서자 놈, 다음 달에 열리는 ‘연무관 비무(演武館 比武)’에는 어찌 참가하려나?"
"참가하지 않으면 가법에 따라 가문에서 영구 추방당하거나 노비로 전락할 텐데 몸도 성치 않은 녀석이 비무대에 오르면 남궁위 소공자 수하들에게 뼈도 못 추릴 거다. 이번 연무관 대련은 소공자님이 직접 참관하신다더군."
연무관 비무.
남궁세가에서 매년 가을에 개최하는 행사로, 가문의 젊은 제자들과 서자, 방계 제자들의 무공을 점검하고 서열을 정하는 대규모 비무대회였다.
그 비무대회에서 남궁위는 합법적으로 남궁혁을 처단하거나 가문 밖으로 영구히 내쫓으려 할 터였다.
‘연무관 비무라…….’
혁의 입가에 차가운 비웃음이 걸렸다.
‘내가 연무관에 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나 보군. 오히려 잘 되었다. 가문의 눈이 쏠린 그곳에서 남궁위의 수하들을 처참하게 짓밟아주마.’
그것이야말로 남궁위에게 가장 뼈아픈 수치와 좌절을 안겨줄 기회였다.
혁은 적양초를 챙겨 들어왔던 창문을 통해 소리 소문 없이 창고를 빠져나갔다. 진법은 다시 원상태로 복구해 두었기에 다음 날 아침 창고지기가 서랍을 열어보기 전까지는 침입 사실조차 알지 못할 터였다.
별채로 무사히 돌아온 혁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품에서 적양초를 꺼냈다.
붉은 잎사귀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열기가 가슴속 마나 하트와 공명하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혁은 적양초를 씹어 삼켰다.
화끈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자 위장 속에서 폭발적인 화염 에너지가 피어올랐다. 일반적인 무인이라면 이 거친 양기를 경맥을 통해 단전으로 다스리느라 땀을 한 바가지 흘렸을 터였다.
하지만 혁은 그 에너지를 세포 단위로 분해했다.
‘마법의 변환 공식: 열 에너지를 마력으로 환원하라.’
심장 옆의 마나 하트가 폭발적으로 진동하며 적양초의 붉은 에너지를 푸른색의 마력으로 급속 정제했다. 정제된 마력은 마나 하트 주변을 도는 새로운 궤도를 형성하기 위해 거칠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스우우우-
혁의 주변으로 푸른 아지랑이가 명멸하며 두 번째 마나 서클의 형상이 희미하게 구축되기 시작했다.
2서클(Two Circle)의 견고한 장벽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혁은 눈을 감고 더욱 명상에 깊이 빠져들었다. 비무대회 전까지, 그의 마법 무공은 한 차원 높은 경지로 도약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