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기 대신 마나 쓰는 세가 서자

37화: 역병(疫病)의 마을과 구원(救援)의 빛
하율촌(下律村)에 들어선 혁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마을은 기이할 정도로 조용했다. 개 짖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고 공기 중에는 미세한 썩은 냄새와 음산한 한기가 감돌고 있었다.
"공자님, 마을 분위기가 이상합니다. 인기척은 느껴지는데 모두 불을 끄고 누워 있는 것 같습니다."
남궁백이 검자루를 잡으며 경계했다.
혁은 가장 가까운 초가집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곳에는 노인과 어린아이를 포함한 일가족 네 명이 자리에 누워 신음하고 있었다. 그들의 살갗은 메말라 있었고 피부 아래로 지나가는 혈관들은 검게 변해 흉측하게 도드라져 있었다.
"으으윽…… 살려주시오…… 뜨거워……."
아이의 목에서 쇳소리가 새어 나왔다.
혁은 다가가 아이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순간 그가 품은 마나가 역류하는 불쾌한 사기를 감지했다.
‘단순한 질병이 아니군. 영혼과 생명력을 강제로 갉아먹으며 육신을 괴시로 정련하기 쉽게 바꾸는 사령 역병(Necrotic Plague)이다.’
누군가 인위적으로 우물이나 공기 중에 역병의 마법적 씨앗을 뿌려놓은 것이 틀림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서서히 말라 죽어가고 영혼은 구속당했다. 육신은 산 채로 부패하여 결국 시술자의 명령에만 복종하는 괴시가 될 운명이었다.
"누, 누구십니까……?"
마을의 의원인 듯한 늙은 사내가 구석에서 겨우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그의 목덜미 역시 검은 혈관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미 늦었소…… 이 마을은 저주를 받았소. 관청의 의원들도 왔다가 겁을 먹고 도망쳤소……."
혁은 아무 말 없이 초가집 밖으로 나왔다.
그는 마을 중앙의 광장으로 걸어갔다. 밤하늘에는 달빛조차 구름에 가려 어두웠으나, 혁의 전신에서 뿜어 나오는 푸른 마력의 파동이 주위를 은은하게 밝히기 시작했다.
혁은 현검을 대지 위에 꽂아 넣고 두 손을 넓게 벌렸다.
"와이드 퓨리피케이션(Wide Purification)."
웅-!
혁의 몸을 중심으로 따뜻하고 정순한 백색 빛의 물결이 파도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빛은 마을의 담장을 넘어 지붕을 뚫고 모든 초가집 안으로 스며들어 병든 이들의 몸을 감싸 안았다.
치이이이익!
빛이 닿는 곳마다 주민들의 피부에 돋아나 있던 흑색 혈관들이 기화하듯 사그라졌다. 환자들은 가슴을 쥐어짜며 일제히 검은색 피를 토해냈고 이내 맑고 정상적인 호흡을 되찾기 시작했다.
"어…… 몸의 열이 내렸다!"
"아프지 않아! 뼈마디가 아프지 않아!"
초가집 곳곳에서 문이 열리며 주민들이 기적처럼 멀쩡해진 다리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광장 중앙에서 은백색 빛의 후광을 두르고 서 있는 혁을 보았다.
"생불(生佛)이시다……! 신선께서 우리를 구하러 오셨다!"
늙은 의원을 시작으로 수백 명의 마을 주민들이 광장에 엎드려 혁을 향해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에는 기적에 대한 눈물과 무한한 경배가 가득했다.
하지만 혁은 그들의 절을 무심히 흘려보낸 채 마을 외곽 숲의 어둠을 노려보았다.
예민한 3서클 감각에 마을이 정화되는 광경을 보고 사색이 되어 달아나려는 정체불명의 기척 둘이 포착된 탓이었다. 흑월교의 감시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