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기 대신 마나 쓰는 세가 서자

3화: 굶주림을 되돌려주다
남궁세가 외당의 한적한 집무실.
세가의 집사 중 한 명이자 남궁위의 심복인 마태식은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초조하게 보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젯밤 보낸 세 명의 하급 무사들이 벌써 돌아와 보고를 올렸어야 할 시간이었다.
‘단전이 찢어진 서자 놈 하나 다리몽둥이 부러뜨려 내다 버리는 게 그리 오래 걸릴 일인가?’
그때, 집무실 문이 다급하게 열리며 시비 하나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들어왔다.
"마, 마 집사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호들갑이냐. 어젯밤 보낸 녀석들은 어찌 되었느냐?"
"그, 그게…… 그 녀석들이 방금 돌아왔는데, 꼴이 말이 아닙니다!"
마태식은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의원실로 달려갔을 때 목도한 광경은 실로 해괴하기 짝이 없었다.
세 명의 무사들은 온몸에 철곤 자국과 멍이 가득한 채 구석에 웅크려 이빨을 딱딱 마주치며 벌벌 떨고 있었다. 그들의 눈은 초점을 잃고 공포로 흐려져 있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붉은 눈의 해골이……!"
"네 놈이 나를 왜 때려! 귀신이다, 귀신!"
마태식이 그들의 어깨를 움켜쥐고 강하게 흔들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광기 어린 비명과 헛소리뿐이었다.
"이게 무슨 짓거리냐! 남궁혁은 어찌 되었느냐 말이다!"
아무리 다그쳐도 소용없었다. 세 사람의 머릿속에는 오직 '어둠 속에서 서로를 때려눕힌 기억'과 '붉은 눈의 해골 귀신'에 대한 공포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게다가 더욱 기괴한 것은 그들의 몸에 남은 상처들이었다. 검기나 내공에 의한 흔적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오로지 그들이 가져갔던 철곤으로 서로를 무자비하게 후려친 둔탁한 타박상뿐이었다.
"미친놈들…… 갑자기 실성을 해서 서로 치고받았단 말인가?"
마태식은 짓이겨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었다. 남궁혁은 내공을 전혀 쓸 수 없는 완벽한 절맥증 환자다. 그런 쓰레기가 삼류 무사 세 명을 내공 흔적도 없이 미치게 만들고 서로 싸우게 했다는 건 무림의 상식으로 불가능했다.
‘요사스러운 약물이라도 쓴 것인가? 아니면 정말로 헛간에 귀신이라도 씌인 건가.’
마태식은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어찌 되었든 이 사실이 소공자 남궁위의 귀에 들어가면 제 무능함만 돋보일 터였다.
"쓸모없는 놈들. 광인(狂人)방에 처넣어라."
그는 차갑게 명령한 뒤 의원실을 나섰다. 물리적인 폭력으로 내쫓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다른 방법을 쓰면 그만이었다. 가문 내에서 개보다 못한 대접을 받는 서자 놈들이다.
‘배급을 끊어버리면 알아서 기어 나가겠지.’
마태식의 눈에 음험한 빛이 감돌았다.
남궁세가의 별채는 가문의 가장 서쪽 구석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가을의 초입이라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꽤 쌀쌀해진 시기였다.
혁은 마나 하트의 열기를 온몸으로 순환시키며 한기를 쫓고 있었다. 며칠간의 명상과 신체 강화 덕분에 그의 피부 아래에는 보이지 않는 마력의 막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제 웬만한 바람막이 옷이 없어도 추위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 신체 온도를 조절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있는 별채는 사정이 달랐다. 땔감이 부족해 방바닥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식량 창고는 텅 비어 있었다.
그때 별채의 낡은 사리문이 열리며 소소가 걸어 들어왔다.
그녀의 어깨는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고 두 손에 쥐어진 작은 주머니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혁이 다가가자 소소는 얼른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닦아냈다.
"누님, 무슨 일이야?"
혁이 나지막이 묻자, 소소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주머니를 내밀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혁아. 여기…… 이번 달 우리 배급이야. 밀가루 한 되랑 소금 조금 받아왔어."
주머니를 받아 든 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남궁세가에서 가장 하급 하인들에게도 이것보다는 몇 배는 많은 식량과 은자가 지급된다. 가문의 핏줄인 서자 두 사람에게 한 달 치 배급으로 밀가루 한 되와 소금이라니. 게다가 다가오는 겨울을 나기 위한 숯이나 탄(炭)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소소의 붉어진 눈시울과 뺨에 남은 붉은 손자국이 혁의 시선에 닿았다.
"뺨은 왜 그래?"
"어? 아, 이건…… 오는 길에 발을 헛디뎌서 나무에 부딪친 거야. 정말이야."
소소는 급히 손으로 뺨을 가리며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할 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그녀의 버릇은 숨기지 못했다.
혁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형언할 수 없는 차가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것은 전생의 아드리안이 느끼는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었다. 이 육체의 전 주인인 남궁혁의 영혼이, 유일한 혈육이 당한 수치에 격렬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이었다.
혁은 소소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내렸다.
"배급당(配給堂)에서 누가 그랬어?"
"혁아, 참아야 해. 괜히 소란을 피웠다간 마 집사나 남궁위 오라버니가 더 심하게……."
"누가 그랬냐고 물었어, 누님."
혁의 나지막한 목소리에는 거역할 수 없는 기묘한 압도감이 서려 있었다. 며칠 전과는 완전히 다른, 마치 거대한 성벽을 마주한 듯한 중압감에 소소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배급당의 강 시종이 마 집사님의 명령이라면서 이제 별채에는 더 줄 배급이 없다고 했어. 내가 사정하니까 쓰레기 주제에 귀찮게 군다며 뺨을 때리고 바닥에 밀쳤어……."
소소는 결국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며 혁의 가슴에 머리를 묻었다.
혁은 소소의 머리를 조용히 쓸어내리며 배급당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시리도록 차가운 마력의 빛으로 물들었다.
"누님,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빼앗긴 우리 몫을 찾아올 테니까."
"혁아! 안 돼! 거기엔 무사들도 있어!"
소소가 다급하게 만류했지만, 혁의 신형은 이미 헛간 문을 나서고 있었다.
외당 동쪽에 위치한 배급당은 가문 내의 식량과 생필품, 숯 등을 관리하고 분배하는 곳이었다.
평소에도 수많은 시비들과 하인들이 드나드는 곳이라 활기가 넘쳤지만 그만큼 가문 내의 엄격한 신분 질서가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소이기도 했다.
"하하하! 그 가시나 울면서 기어가는 꼴 봤냐? 쓰레기 서자 동생 놈 먹여 살리겠다고 밀가루 주머니를 꼭 쥐고 안 놓치려 하더군."
배급당의 책임 시종인 강태는 이빨을 드러내며 쾌활하게 웃고 있었다. 주변에 서 있던 하인들과 몇 명의 무사들도 맞장구를 치며 킥킥거렸다.
"소공자님의 심복인 마 집사님이 직접 내리신 명령이니, 굶어 죽어도 가문에서는 관여하지 않을 겁니다. 얌전히 기어나갈 것이지, 왜 저리 버티는지 몰라."
그들이 한창 낄낄거리며 잡담을 나누던 그때.
쾅!
배급당의 두꺼운 목조 문이 거칠게 열리며 먼지가 휘날렸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강태와 무사들의 시선이 문 쪽으로 쏠렸다. 그곳에 서 있는 것은 낡아 빠진 무복을 입은 소년, 남궁혁이었다.
"어라? 저 쓰레기가 제 발로 기어왔네?"
강태는 비웃음을 흘리며 탁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앞으로 나섰다.
"남궁혁이 아니더냐. 무슨 일로 여기까지 납시었나? 네 누년이 밀가루 한 되 받아가지 않았더냐? 서자 놈들이 식탐만 많아가지고……."
"누님을 때린 손이 어느 쪽이지?"
혁은 강태의 비아냥을 가로막으며 덤덤하게 물었다. 그의 걸음걸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강태를 향해 직선으로 이어졌다.
"뭐라고? 이 새끼가 미쳤나……."
"묻지 않았다. 양쪽 다 잘라내면 될 일이니."
"이 쓰레기가 진짜 미쳤구나! 얘들아, 저 놈 끌어내서 다리를 부러뜨려라!"
강태의 명령에 배급당을 지키고 있던 경비 무사 두 명이 비웃으며 다가왔다. 그들은 가문의 정식 무사들이 아닌, 외당의 치안을 담당하는 거친 건달 출신의 하급 무사들이었다.
"도련님, 주제를 아셔야지요."
왼쪽 무사가 혁의 어깨를 낚아채려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혁의 마나 하트가 강하게 요동쳤다.
그는 피하지 않고 오히려 한 걸음 앞으로 파고들었다. 마력으로 강화된 그의 신체 속도가 무사의 반응 한계를 뛰어넘었다.
콰아앙!
혁의 손바닥이 무사의 가슴에 내리꽂혔다. 단순한 장법처럼 보였지만, 그 손끝에는 고밀도로 응축된 1서클 마력의 충격파인 ‘포스 볼트(Force Bolt)’가 실려 있었다.
"끄하학!"
무사는 비명과 함께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 그는 삼 장 뒤에 서 있던 두꺼운 나무 탁자를 들이받으며 바닥으로 처박혔다. 탁자가 부서지는 굉음과 함께 무사는 각혈을 하며 기절해 버렸다.
"뭐, 뭐야?!"
남은 무사 한 명과 강태의 얼굴에서 비웃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내공의 파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방금 보여준 파괴력과 속도는 최소한 이류 고수의 그것이었다. 단전이 깨진 절맥의 쓰레기가 어떻게 이런 힘을 쓴단 말인가?
"이, 이 요사스러운 놈! 죽어라!"
남은 무사가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고 횡으로 베어 왔다. 서늘한 쇳소리와 함께 검날이 혁의 목을 향해 쇄도했다.
혁은 고개를 가볍게 뒤로 젖히며 검날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했다. 그리고 검을 휘두른 무사의 품 안으로 그림자처럼 파고들었다.
‘플리커(Flicker).’
팟-
무사의 시야에서 혁의 모습이 아지랑이처럼 사라졌다.
"어 어디……!"
"여기다."
무사의 등 뒤에서 들려온 차가운 목소리.
혁은 무사의 검을 쥔 손목을 꺾어 비틀었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어서 무사의 턱을 팔꿈치로 강타하자, 무사는 눈을 뒤집으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단 두 수.
외당의 무사 둘이 먼지처럼 널브러졌다.
배급당 내부에는 쥐 죽은 듯한 침묵이 흘렀다. 주변에서 구경하던 하인들은 겁에 질려 구석으로 도망쳤고, 강태는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아 벌벌 떨고 있었다.
혁은 천천히 걸어가 주저앉은 강태의 앞에 섰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강태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에 담긴 초월적인 살기에 강태는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어젯밤 조필이 느꼈던 지독한 심연의 공포가 그의 뇌리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도, 도련님…… 살려주십시오…… 제가 눈이 멀어……."
"누님을 때린 손이 어느 쪽이지?"
혁이 나지막이 묻자, 강태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이, 이 손입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뽀드득!
혁은 주저 없이 구두굽으로 강태의 오른손을 내리밟아 뭉갰다. 뼈가 바스러지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강태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배급당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밟은 힘을 더했다.
"으아아악! 내 손! 내 손이!"
"조용히 해라. 시끄럽다."
혁이 차갑게 읊조리자, 강태는 비명을 억지로 삼키며 몸을 부르부르 떨었다.
혁은 허리를 숙여 강태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의 정신력이 강태의 약해진 마음의 틈새를 뚫고 들어가 최면을 걸었다.
"지금 당장 별채로 보낼 최고급 숯 열 상자와 쌀 다섯 가마니, 그리고 고기 세 근을 준비해라. 그리고 앞으로 매달 원래 우리 몫의 세 배를 별채로 배달해라. 만약 단 하루라도 늦거나, 누님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이라도 흐르게 만든다면……."
혁의 손끝에 푸르스름한 마력이 칼날처럼 예리하게 돋아났다.
"그때는 네 손목이 아니라 목줄기가 잘려 나갈 것이다. 알겠나?"
"예, 예! 알겠습니다!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강태는 으스러진 오른손을 움켜쥔 채 왼손으로 미친 듯이 바닥을 기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
"얼른! 얼른 별채로 숯이랑 쌀 가져다드려! 으아악! 빨리 해!"
하인들은 혼비백산하여 창고로 달려가 숯 상자와 쌀가마니를 수레에 싣기 시작했다.
혁은 수레가 준비되는 것을 차갑게 지켜본 뒤 수레의 손잡이를 잡았다. 쌀 다섯 가마니와 수십 킬로그램의 숯이 실린 거대한 수레였지만, 마력으로 강화된 그의 근력 앞에는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그는 수레를 유유히 끌고 배급당을 나섰다.
피비린내와 절규가 남겨진 배급당 뒤로, 혁의 걸음걸이는 여유롭고 당당했다. 가문이 자신들을 굶겨 죽이려 한다면, 힘으로 빼앗아 생존하면 그만이었다. 그것이 대마법사 아드리안이 살아온 약육강식의 법칙이었고, 이제는 이 무림에 적용될 새로운 마도의 법칙이었다.
별채로 돌아가는 길, 혁의 가슴속 마나 하트는 더욱 밝고 힘차게 고동치며 1서클의 안정을 완성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