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계 정원에서 요양하고 가세요!

3화: 꽃향기를 따라온 손님
은빛 가람 장미 향은 밤새 담장 위를 넘어갔다.
한지환은 이른 햇살 아래 동쪽 화단 앞에 쪼그려 앉았다. 손끝으로 흙을 살짝 누르자 보드라운 표토가 숨을 쉬듯 내려앉았다. 전날 리리가 뿌린 요정 가루가 스며든 자리에는 손톱보다 작은 새순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새순들은 아직 약했다. 그래도 검붉은 가시덤불이 뒤엉킨 정원 한복판에서 맑은 초록빛을 잃지 않았다.
“리리. 바람이 어느 쪽으로 가?”
셔츠 가슴주머니 안에서 작은 머리가 빼꼼 올라왔다. 연분홍 꽃잎 옷은 아직 구겨져 있었고 날개 끝에는 옅은 잿빛 얼룩이 남아 있었다.
“저쪽. 뾰족 지붕 있는 데.”
리리가 손가락만 한 팔로 담장 너머를 가리켰다. 멀리 세이렌 마법 아카데미의 첨탑이 햇빛을 받아 희게 반짝였다.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향이 퍼지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다만 정원 대부분은 아직 오염되어 있었다. 맑은 장미 향이 검은 습기와 뒤섞이면 좋은 약도 탁한 냄새로 변할 수 있었다.
“바람길을 먼저 정리해야겠군.”
지환은 장미 화단 옆에서 허리 높이로 엉킨 덩굴을 살폈다. 살아 있는 줄기는 은빛이 미세하게 돌았고 죽은 줄기는 검붉은 수액을 품은 채 부풀어 있었다. 그는 살릴 줄기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젖힌 뒤 죽은 줄기만 전지가위 사이에 넣었다.
싹둑.
검은 수액이 절단면에서 맺혔다. 지환은 곧장 마력 분무기로 은빛 물안개를 뿌렸다. 수액은 흙에 떨어지기 전에 회색 가루로 식었다.
“리리도 도와?”
“조금만.”
“날개 아프면 바로 멈춰.”
“응. 조금만.”
리리는 주머니 가장자리에 앉아 아주 작은 연분홍 가루를 흩뿌렸다. 가루가 닿은 흙은 눅눅함을 잃고 낮게 가라앉았다. 바람은 그 위를 지나 장미 향을 담장 쪽으로 부드럽게 밀어냈다.
그때였다.
콜록. 콜록.
담장 너머에서 마른 기침 소리가 들렸다.
지환은 가위를 멈췄다. 소리는 멀었지만 거칠었다. 목이 간지러워 나는 기침이 아니었다. 폐 깊은 곳에 오래 묵은 먼지가 긁히는 듯한 소리였다.
리리가 주머니 안으로 쏙 숨었다.
“아픈 사람?”
“그런 것 같아.”
지환은 담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너진 철문 너머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유스티아는 수행 마법사 셀렌의 만류를 네 번째로 흘려들었다.
“학장님. 이곳은 폐쇄된 영지입니다. 정원 주변 오염 수치도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직접 보려는 게야.”
노학자의 목소리는 낮고 갈라져 있었다. 그는 두꺼운 외투 깃을 여미고 낡은 지팡이에 체중을 실었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가슴 안쪽에서 작은 쇳소리가 났다.
셀렌은 초조한 얼굴로 보호 주문진을 펼쳤다.
“향기가 좋다고 안전한 것은 아닙니다. 독성 꽃가루 중독 후유증이 남아 계십니다. 오늘 아침에도 기침이 심하셨습니다.”
“알고 있네. 내 폐가 제일 잘 알려 주지.”
유스티아는 무너진 철문 앞에 멈춰 섰다. 문살 사이로 보이는 대정원은 버려진 폐허에 가까웠다. 검은 넝쿨이 석조 난간을 감고 있었고 젖은 흙에서는 매캐한 냄새가 올라왔다.
그런데 그 냄새 사이로 이상할 만큼 맑은 장미 향이 흘러나왔다.
유스티아는 조심스레 숨을 들이마셨다.
향이 코끝에 닿는 순간 가슴을 긁던 통증이 한 박자 늦어졌다. 기침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매번 날카롭게 올라오던 경련이 아주 짧게 비켜 갔다.
그 짧은 틈만으로도 노학자의 눈빛이 달라졌다.
“셀렌. 이건 일반 향기 마법이 아니네.”
“그래도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문 앞에서만 확인하지.”
유스티아가 철문을 손끝으로 밀었다. 녹슨 경첩이 낮게 울렸다.
그 진동에 문 안쪽의 검은 먼지이끼가 흔들렸다. 마른 포자들이 회색 연기처럼 일어나 노학자 쪽으로 밀려왔다.
셀렌이 급히 방어막을 펼쳤다.
“뒤로 물러나십시오!”
유스티아의 기침이 다시 터졌다. 이번에는 훨씬 깊었다. 그는 지팡이를 놓칠 듯 몸을 굽혔다.
지환은 철문 쪽으로 달리며 상황을 판단했다.
노인은 이 정원에 들어와서는 안 되는 몸이었다. 그런데 은빛 장미 향에 끌려 문 앞까지 와 있었다. 수행원으로 보이는 젊은 마법사는 막으려 했지만 이미 포자가 움직였다.
“리리. 주머니 안에 있어.”
“리리 무서워.”
“괜찮아. 지금은 숨길만 열 거야.”
지환은 나무 수레에 걸어 둔 마력 분무기를 집어 들었다. 발밑의 흙은 아직 질척였지만 그는 검은 이끼가 없는 단단한 부분만 골라 밟았다. 오염된 표토는 무작정 밟으면 아래에 갇힌 포자를 더 세게 뿜었다.
[검은 먼지이끼]
- 상태: 건조 포자 과밀. 충격 시 독성 꽃가루 분출.
- 처방: 낮은 수분 안개로 포자를 가라앉힌 뒤 통풍로 확보.
“움직이지 마십시오.”
지환의 목소리에 셀렌이 날카롭게 돌아보았다.
“누구냐!”
“정원사입니다. 방어막은 그대로 유지하세요.”
설명할 시간은 없었다. 지환은 분무기 손잡이를 낮게 눌렀다. 은빛 안개가 땅 위를 기듯 퍼지고 회색 포자에 달라붙었다. 가벼운 포자들이 물기를 머금고 흙 위로 내려앉았다.
그다음은 가지치기였다.
지환은 철문 옆을 막고 있던 덩굴을 위에서 자르지 않았다. 위쪽을 건드리면 포자가 다시 솟았다. 대신 무릎 높이의 죽은 마디를 끊고 덩굴을 옆으로 눕혔다.
싹둑. 싹둑.
낮아진 덩굴 사이로 장미 화단에서 온 바람이 스며들었다. 리리가 주머니 안에서 떨리는 손을 내밀어 연분홍 가루를 한 줌도 안 되게 보탰다. 가루는 바람에 실려 포자가 내려앉은 흙 위에 흩어졌다.
흙이 조용해졌다.
유스티아의 기침도 조금 누그러졌다.
“젊은이. 방금 무엇을 한 건가?”
노학자는 숨을 고르며 물었다.
“젖히고 낮췄습니다. 먼지이끼는 위로 흔들면 포자를 뿜습니다.”
“마법식물학부에서는 저 포자를 보통 태워 없애네.”
“태우면 뿌리가 더 깊게 숨습니다. 다음에 더 많이 올라오고요.”
유스티아는 바로 반박하지 못했다. 대신 눈을 가늘게 뜨고 지환의 손에 들린 전지가위를 보았다.
셀렌은 여전히 방어막을 거두지 않았다.
“학장님. 이 사람의 신원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 포자는 가라앉았네.”
“잠깐뿐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더 봐야 하지.”
지환은 두 사람의 대화에서 노인의 신분을 짐작했다. 그래도 먼저 묻지는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권위가 아니라 호흡이었다.
“문 안쪽으로 들어오시려면 저쪽만 밟으십시오. 회색 이끼 위로는 가지 마시고요. 오래 머무르는 것도 안 됩니다.”
“자네가 이 정원을 관리하나?”
“그렇게 됐습니다.”
“이런 곳에서 장미 향을 살렸다고?”
지환은 동쪽 화단을 돌아보았다. 은빛 장미는 아직 열 송이 남짓이었다. 그러나 그 작은 꽃들이 검은 정원의 공기를 조금씩 밀어내고 있었다.
“살릴 줄기가 남아 있었습니다.”
유스티아는 그 말을 오래 곱씹는 듯했다.
정화된 10평 구역에 도착하자 공기가 확연히 달라졌다.
셀렌이 먼저 알아차렸다. 방어막 표면에 달라붙던 회색 먼지가 줄었다. 은빛 장미 향은 강하지 않았다. 과하지 않게 맑고 서늘해서 폐 안쪽의 열을 조금씩 식혀 주는 듯했다.
유스티아는 낡은 돌계단 앞에서 멈춰 섰다.
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 숨에서 기침이 나오지 않았다.
노학자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자기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이 아주 작게 떨렸다.
“십 년 만이군.”
그 말은 거의 속삭임이었다.
지환은 서둘러 기대를 키우지 않았다.
“완치가 아닙니다. 여기 공기가 조금 정리된 겁니다. 오래 머무르시면 반대로 피곤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도 기침이 멎었네.”
“잠깐입니다.”
“잠깐이라도 대단한 일이네.”
유스티아는 동쪽 장미 화단을 바라보았다. 리리가 지환의 주머니 안으로 더 깊이 숨었다. 투명해지는 날개 끝이 순간 햇살에 반짝였다.
“방금 작은 빛이 보인 것 같은데.”
“정원에 남은 생기입니다.”
지환은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전부 말하지도 않았다. 리리는 아직 낯선 사람 앞에 나설 만큼 회복되지 않았다.
유스티아도 더 캐묻지 않았다. 노학자의 시선은 곧 정원 안쪽의 흐름으로 옮겨갔다.
“저 안쪽에 로즈마리 계열 마법 식물이 있었던 흔적이 있네. 향이 장미와 엮이면 폐에는 더 순할 수 있지. 다만 지금은 배치가 완전히 무너졌군.”
지환도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다.
검은 덩굴 너머로 낮은 관목들이 줄지어 엎드려 있었다. 잎은 바싹 말랐고 줄기는 회색으로 굳어 있었다. 그래도 밑동 깊은 곳에는 작은 푸른 점이 남아 있었다.
[오염된 마력 로즈마리 군락]
- 상태: 햇빛 차단. 향기 순환 마력 막힘.
- 처방: 사선형 산책로 확보 후 장미 향과 교차 배치.
지환의 머릿속에 길 하나가 그려졌다. 장미 화단에서 시작한 바람을 곧게 보내지 않고 낮은 사선으로 꺾어 로즈마리 군락 사이를 지나게 하는 길이었다. 사람은 그 길을 천천히 걸으며 숨을 고르고 식물은 서로의 향을 받아 막힌 마력을 풀 수 있었다.
“살릴 수 있겠군.”
지환이 중얼거리자 유스티아가 그를 보았다.
“자네도 보이나?”
“가지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통풍만 열면 향이 돌아올 겁니다. 다만 오늘은 안 됩니다.”
“왜지?”
“노인께서 걸을 길이 아직 없습니다. 식물도 사람도 갑자기 몰아붙이면 버티지 못합니다.”
셀렌이 처음으로 지환을 똑바로 보았다. 방어막 너머의 경계심은 남아 있었지만 노학자를 향한 걱정과 같은 결의가 지환에게도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했다.
유스티아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젊은 정원사. 내게 내일 다시 이 길을 걸을 시간을 줄 수 있겠나?”
지환은 대답하기 전에 정원을 보았다.
아직 대부분은 검었다. 무리하면 손님을 해칠 수 있었다. 그러나 살릴 식물도 길을 만들 흙도 남아 있었다.
“하루 주십시오. 걷는 길은 제가 먼저 만들어 보겠습니다.”
유스티아는 지팡이를 짚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나는 유스티아라 하네. 세이렌 아카데미에서 식물을 오래 보아 온 늙은이라네.”
셀렌이 작게 헛숨을 삼켰다. 학장이라는 말은 일부러 빠져 있었지만 지환은 노인의 눈빛만으로도 그가 평범한 방문객이 아님을 알았다.
“한지환입니다. 이 정원의 정원사입니다.”
짧은 인사 사이로 바람이 지나갔다.
은빛 장미 향이 유스티아의 외투 깃을 스치고 안쪽의 죽은 로즈마리 군락으로 흘러갔다. 마른 잎 하나가 아주 작게 떨렸다.
리리가 주머니 안에서 속삭였다.
“저 풀도 깨워?”
“응. 이번엔 사람이 걸을 수 있게 깨워야지.”
지환은 전지가위를 고쳐 잡았다.
첫 손님이 돌아간 뒤에도 할 일은 더 선명하게 남았다. 이번에는 꽃을 살리는 일이 아니라 누군가가 숨 쉴 수 있는 길을 만드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