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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정원에서 요양하고 가세요!2화

이세계 정원에서 요양하고 가세요!

이세계 정원에서 요양하고 가세요!

2화: 시든 장미꽃 속의 요정

정화된 장미 열 송이는 햇살을 받자 은은한 백색 빛을 머금었다.

한지환은 돌계단에 앉아 손등의 흙을 털었다. 숨을 고를 틈은 짧았다. 맑아진 10평 바깥에서는 아직 검붉은 가시덤불이 살아 있는 짐승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영역이 넓어졌다고 끝난 건 아니군.”

그는 낡은 전지가위를 손바닥 안에서 한 번 돌려 쥐었다. 정원 일은 언제나 그랬다. 한쪽을 깨끗하게 정리하면 그제야 옆의 병든 가지가 더 선명하게 보였다.

사각.

발밑의 흙이 작게 울었다. 지환은 시선을 낮췄다.

방금 정화한 흙 아래로 가느다란 흰 뿌리들이 동쪽을 향해 뻗어 있었다. 뿌리는 기운을 되찾은 기쁨으로 떨고 있었지만 끝으로 갈수록 다시 검게 물들어 있었다.

“물길이 아니라 뿌리길인가.”

지환은 뿌리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었다. 몇 걸음 나아가자 공기가 무거워졌다. 백색 장미의 산뜻한 향은 사라지고 눅눅한 쇠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동쪽 담장 아래에는 장미 화단이 있었다.

화단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만큼 망가져 있었다. 검은 송곳 장미 넝쿨이 서로를 조이며 엉켜 있었고 꽃봉오리들은 피지도 못한 채 잿빛으로 말라 있었다. 가시는 보통 장미 가시가 아니었다. 손가락만 한 길이의 검붉은 가시들이 짐승의 이빨처럼 빽빽하게 돋아 있었다.

[오염된 장미 요정 둥지]

지환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안에 누가 있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대신 가장 안쪽의 작은 꽃봉오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싹둑.

지환은 제일 바깥으로 삐져나온 죽은 가지부터 잘라냈다. 넝쿨 전체를 끊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참았다. 병든 나무를 살릴 때 가장 위험한 순간은 치료자가 조급해지는 때였다.

“숨길부터 열자.”

그는 가시가 서로 맞물린 곳을 찾아 하나씩 풀었다. 잘라야 할 가지와 남겨야 할 가지가 머릿속에서 하얀 선과 검은 선으로 갈라졌다. 하얀 선은 살리고 검은 선은 걷어냈다.

삭. 사각. 싹둑.

가위질이 이어지자 화단 바깥쪽에 손바닥만 한 틈이 생겼다. 그 틈으로 고인 검은 수액이 흘러나왔다. 수액은 흙에 닿자 지글지글 끓으며 독한 냄새를 냈다.

지환은 나무 수레에 걸려 있던 마력 분무기를 집어 들었다. 물통 안에는 처음 보는 은빛 물이 조금 남아 있었다.

“약제 대신 쓰라는 건가.”

분무기 손잡이를 누르자 안개처럼 고운 물방울이 퍼졌다. 검은 수액은 은빛 물방울에 닿는 순간 힘을 잃고 회색 재처럼 가라앉았다.

그때였다.

“……리.”

숨소리보다 작은 소리가 꽃봉오리 속에서 새어 나왔다.

지환은 가위를 멈췄다.

“괜찮아. 꺼내 줄게.”

그가 가장 안쪽 꽃봉오리에 손을 뻗자 장미 넝쿨이 벌떡 일어났다. 검붉은 가시가 그의 손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퍽!

지환은 모종삽 등으로 가시를 쳐냈다. 손목에 얕은 상처가 났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장미가 그를 공격한다기보다는 안쪽에 갇힌 것을 지키려 발버둥치는 모양새였다.

“그래. 지키고 싶은 건 알겠는데 지금은 네가 그 아이를 조이고 있어.”

그는 넝쿨의 중심을 향해 몸을 낮췄다. 꽃받침 아래쪽에 박힌 검은 혹들이 보였다. 그 혹들이 수액을 빨아들이며 봉오리를 닫아걸고 있었다.

싹둑. 싹둑.

혹을 하나씩 도려낼 때마다 봉오리의 잿빛 껍질이 조금씩 벌어졌다. 마지막 혹을 잘라내자 꽃잎 안쪽에서 작은 몸이 툭 떨어졌다.

지환은 두 손을 모아 그것을 받아 냈다.

손바닥 위에는 손가락만 한 소녀가 누워 있었다. 연분홍 꽃잎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고 등에는 잠자리 날개처럼 얇은 날개가 붙어 있었다. 다만 날개의 절반은 먹물을 묻힌 듯 검게 변해 있었다.

[장미 요정 리리]

“리리라…….”

요정은 눈을 뜨지 못한 채 작게 떨었다. 너무 가벼웠다. 마른 잎 하나를 올려둔 것 같았다.

지환은 손바닥을 움직이지 않은 채 주변을 살폈다. 리리만 떼어 내서는 해결되지 않았다. 요정의 마력관은 장미 화단과 연결되어 있었다. 뿌리가 썩은 화분에서 꽃만 따로 살릴 수 없는 것과 같았다.

“조금만 버텨.”

그는 리리를 셔츠 가슴주머니 위에 잠시 눕혔다. 주머니 안쪽에 깨끗한 손수건을 접어 받쳤다. 그 작은 몸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히 세운 뒤 다시 화단 앞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가위질의 속도가 달라졌다.

아까는 길을 여는 작업이었다면 지금은 순환을 되살리는 작업이었다. 지환은 가장 굵은 중심 줄기 셋을 남겼다. 살아 있는 줄기를 확인해 그 주변의 썩은 곁가지만 잘라냈다.

잘못 자르면 화단이 죽는다.

너무 적게 자르면 리리가 죽는다.

가위날이 손가락처럼 섬세하게 움직였다. 검은 수액이 솟을 때마다 마력 분무기로 씻어 내고 흙을 살짝 파서 뿌리의 숨구멍을 열었다. 뿌리 끝에 엉긴 오염 덩어리는 모종삽 끝으로 긁어냈다.

한참 뒤 땅속에서 낮은 울림이 올라왔다.

후우웅.

막혔던 물길이 뚫릴 때처럼 화단 전체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담장 밑 깊은 곳에서는 오래된 수로가 잠에서 깨는 듯한 물소리가 아주 희미하게 스쳤다.

잿빛 꽃봉오리 하나가 살짝 열리며 은빛 꽃잎을 드러냈다.

가슴주머니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리…… 리리…….”

작은 요정이 눈을 떴다. 목소리는 아직 떨렸지만 분명히 살아 있었다.

“움직이지 마. 날개가 많이 상했어.”

“무서운…… 사람?”

“정원사.”

지환은 짧게 대답했다. 리리는 흐린 눈으로 그의 손에 들린 전지가위를 보았다.

“잘라……?”

“썩은 것만.”

그 말이 통했는지 리리의 작은 손이 주머니 가장자리를 꼭 쥐었다. 지환은 분무기를 내려놓고 손가락 끝에 은빛 물방울을 묻혔다.

“따가울 수 있어.”

리리는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환은 날개 끝에 붙은 검은 수액을 아주 조금씩 닦아냈다. 얇은 날개가 찢어지지 않게 숨을 참았다. 지구에서 난초의 썩은 뿌리를 정리할 때보다 더 긴장됐다.

검은 막이 벗겨지자 날개 안쪽에 투명한 결이 드러났다. 완전히 깨끗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빛이 지나갈 길은 열렸다.

리리의 눈가에 물방울이 맺혔다.

“아파?”

“따뜻해…….”

그녀가 작은 손을 들어 화단을 가리켰다.

“장미도…… 숨 쉬어.”

그 말과 함께 리리의 손끝에서 연분홍 가루가 흩어졌다. 가루는 바람에 날려 지환이 파 둔 뿌리 숨구멍 위로 내려앉았다. 그러자 흙이 보드랍게 부풀고 작은 새싹들이 톡톡 고개를 내밀었다.

지환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좋은 보조원이 생겼군.”

“보…… 조원?”

“같이 정원 살리는 사람.”

리리는 그 말을 천천히 되새겼다. 그리고 아주 작게 웃었다.

화단의 변화는 빠르게 번졌다. 검붉은 가시가 힘을 잃고 갈색 껍질처럼 바스러졌다. 남겨 둔 중심 줄기에서는 은빛이 도는 새순이 올라왔다. 꽃봉오리들은 아직 작았지만 더 이상 움츠러들지 않았다.

[은빛 가람 장미 화단 일부 회복]

“동료 등록까지 되는군.”

지환이 중얼거리자 리리가 주머니 안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리리…… 여기 있어도 돼?”

그 질문은 작았지만 가볍지 않았다. 이 작은 요정은 무너진 화단 안에서 오랫동안 버텼다. 떠날 힘이 없어서였는지 장미를 버릴 수 없어서였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당분간은 여기.”

지환은 셔츠 주머니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햇빛도 들고 바람도 통하니까 회복하기 좋을 거야. 대신 가끔 장미 상태를 알려 줘.”

리리의 얼굴이 환해졌다.

“응. 리리 잘 알아. 장미 아픈 데 잘 알아.”

“그럼 든든하지.”

지환은 마지막으로 화단의 가장자리를 정리했다. 장미 줄기가 서로를 누르지 않도록 낮은 부채꼴로 벌려 주고 바람이 드나들 길을 만들었다. 꽃이 필 자리는 남기고 병든 그림자는 걷어냈다.

작업이 끝나자 동쪽 담장 아래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아직 정원 전체에 비하면 손바닥만 한 변화였다. 하지만 그곳에는 분명히 생기가 돌았다.

은빛 장미 한 송이가 조심스레 피어났다.

바람이 불었다.

그 꽃향기는 처음 정화된 구역의 숲 냄새와 섞여 담장 너머로 흘러갔다. 지환은 바람의 방향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멀리 아카데미 첨탑이 보였다.

“향이 꽤 멀리 가겠는데.”

가슴주머니 속 리리가 졸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좋은 향…… 아픈 사람도 좋아해.”

“아픈 사람?”

리리는 대답 대신 꾸벅 졸았다. 투명해지기 시작한 날개가 햇살에 반짝였다.

지환은 잠든 요정이 흔들리지 않게 손으로 주머니를 살짝 감쌌다. 그리고 아직 검게 남은 정원 안쪽을 바라보았다.

할 일은 많았다. 그러나 이제 이 넓은 정원에서 들리는 숨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동쪽 바람은 은빛 장미 향을 실어 아카데미 쪽으로 오래도록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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