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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악녀는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2화

시한부 악녀는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시한부 악녀는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2화: 남은 인생, 한 달만

로라는 옷장 앞에서 한참 손을 비볐다.

"아가씨. 오늘은 몸이 좋지 않으시니 알현을 미루시면 안 될까요?"

거울 앞에 앉은 엘리아나는 목을 조이던 진주 목걸이를 도로 상자에 넣었다. 평소의 엘리아나라면 황궁에 갈 때 가장 눈부신 보석부터 골랐을 것이다.

오늘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답답함만으로도 장식은 충분했다.

"황태자 전하가 부르셨는데요. 제가 누워 있으면 전하께서 제 침실까지 오실 수도 있겠지요. 그건 더 피곤해요."

로라가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씀을 아무렇지 않게 하시면 제가 더 무서워요."

"미안해요. 그럼 오늘은 덜 피곤한 쪽을 고르겠다고 할게요."

엘리아나는 짙은 자주색 드레스 대신 회색빛 푸른 드레스를 골랐다. 허리 장식도 떼고 소매 끝에만 은실이 남은 옷이었다. 화려하지 않아도 로젠버그 공작가의 영애라는 사실은 숨길 수 없었다.

다만 적어도 누군가를 붙잡으러 온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로라는 조심스럽게 머리카락을 빗겨 내렸다. 손길은 몹시 가벼웠지만 거울 속 시녀의 눈가는 벌써 젖어 있었다.

"로라. 오늘은 울지 말아요."

"안 울어요."

대답과 달리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떨어졌다. 엘리아나는 손수건을 내밀었다.

"제가 울릴 만큼 못된 말을 했나요?"

"아가씨가 너무 멀리 가실 것 같아서요."

엘리아나는 잠시 손을 멈췄다. 멀리 간다는 말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라피스 해안은 마차로 보름이 넘게 걸리는 곳이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먼 곳으로 가는 일도 결국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바다를 한 번도 못 봤다.

"한 달만 바쁘게 움직이면 돼요. 그다음에는 멀리 가도 편하게 갈 수 있어요."

그녀는 작은 봉투 두 개를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하나에는 파혼 신청서가 들어 있었다. 다른 하나에는 개인 보석 목록과 남부행 일정표가 들어 있었다.

일정표 첫 줄에는 굵게 적혀 있었다.

한 달 안에 수도를 떠날 것.

보석을 처분하고 별장을 계약하고 믿을 만한 사람 하나를 구한다. 나머지 물건은 필요한 것만 챙긴다. 원작의 엘리아나라면 드레스 한 벌을 고르는 데도 반나절을 썼겠지만 엘리아나에게는 남은 날들이 옷장보다 귀했다.

그녀는 의사가 준 검푸른 약을 물과 함께 삼켰다. 쓴맛이 입안에 오래 남았다.

"가죠. 황궁에서 일이 끝나면 보석상도 부를 거예요."

"오늘 하루에 다 하시려고요?"

"내일 심장이 더 얌전하다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로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엘리아나는 덧붙이려던 위로를 삼켰다. 괜찮다는 말은 너무 가벼웠고 괜찮지 않다는 말은 너무 무거웠다.

대신 그녀는 로라의 손등을 한 번 토닥였다.

"마차 안에서 조금 잘게요. 깨워 주지 말고요."

황궁으로 향하는 길에는 초여름 햇빛이 얇게 내려앉아 있었다. 상점 앞에는 과일이 쌓여 있었고 길모퉁이에서는 갓 구운 빵 냄새가 났다.

엘리아나는 창문에 기대어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장을 보고 누군가는 아이 손을 잡고 걸었다. 모두 대단한 일을 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 평범함이 이상할 만큼 부러웠다.

가슴이 조여 올 때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숨을 세었다. 하나, 둘, 셋.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파도처럼 지나가기는 했다.

황궁의 검은 철문이 보일 즈음 로라가 낮게 물었다.

"정말 후회하지 않으세요?"

"무엇을요?"

"파혼이요."

엘리아나는 봉투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후회는 붙잡고 싶은 것이 있을 때 하는 거예요. 저는 이제 쉬고 싶은 것만 많아요."

황궁 알현실은 계절보다 차가웠다.

높은 창으로 들어온 빛이 대리석 바닥에 길게 놓여 있었다. 그 끝에 카시안 데 아스테리아가 서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과 푸른 눈이 지나치게 또렷했다. 사람이 아니라 잘 벼린 검이 창가에 기대 선 것 같았다.

엘리아나가 들어서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오셨군요."

평소라면 그 한마디에도 마음이 흔들렸을 원래의 엘리아나를 떠올리자 조금 피곤해졌다. 저 차가운 인사에 어떻게 그렇게 오래 매달렸을까.

"부르셨다고 들어서 왔습니다."

카시안의 시선이 그녀의 손에 든 봉투에 잠깐 머물렀다.

"앉으십시오."

엘리아나는 권한 자리에는 앉지 않았다. 오래 머무를 생각이 없었다.

"용건을 먼저 말씀드려도 될까요?"

카시안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아나는 탁자 위에 봉투를 놓았다.

"약혼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창밖에서 새가 우는 소리만 멀게 들렸다.

카시안은 봉투를 열어 첫 장을 읽었다. 종이를 넘기는 손끝은 흔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은 점차 차가워졌다.

"대가가 뭡니까?"

"없습니다."

"로젠버그 공작가에서 무엇을 요구한 겁니까?"

"아무것도요."

"그럼 이유는요."

엘리아나는 잠시 대답을 고르다 솔직한 쪽을 택했다.

"제가 이 관계를 원하지 않아서요."

카시안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그대가 먼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군요."

"저도 제가 할 줄 몰랐습니다. 사람은 오래 아프면 생각이 단순해지나 봐요."

말이 끝나자마자 카시안의 눈빛이 날카롭게 굳었다. 엘리아나는 실수했음을 알았다. 병을 묻는 질문이 따라오면 답하기 귀찮아진다.

그래서 그녀는 얼른 미소를 지었다.

"그냥 잠을 못 자서 그렇습니다. 전하께서도 불편하셨을 테니 이 편이 잘된 일이지요."

"내가 불편해 보였습니까?"

"그렇지 않으셨다면 곤란했을 것 같습니다."

그 말에는 숨기지 못한 진심이 조금 섞였다. 카시안은 원래 엘리아나를 원하지 않았다. 그녀가 파혼을 청하면 기뻐해야 정상이다.

그런데 그는 기뻐하는 대신 그녀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대의 시녀가 새벽부터 약국을 들락거렸습니다. 그리고 로젠버그가의 개인 보석을 감정할 상인이 오늘 공작저에 간다는 보고도 받았지요."

엘리아나는 눈을 깜빡였다. 황태자의 눈과 귀가 빠르다는 것은 알았지만 보석상 한 명 부르는 일까지 보고될 줄은 몰랐다.

"그것까지 보고받으시는군요."

"그대가 내 약혼녀였으니까요."

과거형인지 현재형인지 애매한 말이었다.

"개인 재산을 정리한 뒤 남부로 갈 생각입니다. 라피스 해안에서 조용히 지내고 싶어요."

"언제까지입니까?"

"한 달쯤 뒤면 좋겠네요."

"한 달."

카시안은 그 단어를 낮게 되뇌었다. 그녀에게 남은 시간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모르는 남자가 왜 그 숫자를 그렇게 무겁게 받는지 엘리아나는 알지 못했다.

"왜 그렇게 급합니까?"

"급하지 않으면 못 떠날 것 같아서요."

"누가 그대를 막습니까?"

엘리아나는 잠시 웃었다.

"모두요. 그래서 미리 정리하려는 겁니다."

그 대답 뒤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카시안은 파혼서를 내려놓고 손가락으로 탁자를 한 번 두드렸다.

"파혼 수리는 검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허락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검토해 주신다면 다행이에요."

엘리아나는 예를 갖춰 인사했다. 뒤돌아서려는 순간 그가 불렀다.

"엘리아나."

그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생각보다 낮고 조용했다.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그녀는 멈췄다. 심장 결정화라는 병명만 말하면 이 대화는 아주 길어질 것이다. 황궁의 의사들이 몰려오고 공작가의 사람들이 문을 지키고 라피스 해안은 끝없이 멀어질 것이다.

엘리아나는 고개만 돌렸다.

"네. 쉬고 싶다는 일이 있습니다."

그녀는 더 설명하지 않고 알현실을 나왔다.

복도에 들어선 뒤에야 다리에 힘이 풀렸다. 로라가 급히 팔을 받쳤다.

"아가씨. 얼굴이 너무 하얘요."

"황궁 벽이 하얘서 그래요. 제가 비교되어 보이나 봐요."

"농담할 때가 아니에요."

엘리아나는 로라에게 기대지 않으려 했지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시야가 흔들렸다. 결국 팔을 맡긴 채 마차까지 걸었다.

"파혼은요?"

"검토한대요. 생각보다 행정 절차가 복잡한 모양이에요."

"그게 전부예요?"

"전부면 좋겠네요."

공작저로 돌아온 뒤 보석상 마르셀이 응접실에 들어섰다. 그는 보석 상자들을 훑으며 지나치게 공손한 미소를 지었다.

"요즘 보석값이 좋지 않습니다. 특히 황실 행사에 쓰던 장신구는 유행이 지나면 값이 크게 떨어지지요."

그가 제시한 액수는 목록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엘리아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장부를 펼쳤다.

"작년 겨울 황실 경매에서 같은 산지의 사파이어가 이 값의 두 배로 거래됐습니다. 이 목걸이에는 왕실 감정원의 증서도 붙어 있고요."

마르셀의 미소가 아주 조금 굳었다.

"아가씨께서 직접 이런 일까지 살피실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 오늘 처음 해 봐서 재미있네요. 다른 상단을 알아볼까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제가 다시 계산해 보겠습니다."

그는 한참 뒤 훨씬 나은 액수를 불렀다. 엘리아나는 다이아몬드 장식과 사파이어 귀걸이만 넘겼다. 매각 증서를 받아 든 손이 조금 떨렸지만 이번 떨림은 통증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다로 가는 돈이었다.

마르셀이 떠나자 로라가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그곳에 집을 구하실 거예요?"

"작은 집이면 돼요. 창문만 열면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요."

"저는요?"

엘리아나는 잠시 멈췄다. 로라는 병을 알고도 도망치지 않았다. 어젯밤부터 계속 곁에 있었고 오늘은 황궁의 차가운 복도에서도 손을 놓지 않았다.

그녀는 남은 사파이어 브로치 하나를 로라의 손바닥에 올려두었다.

"이건 여비예요. 저와 함께 갈 사람의 몫입니다."

로라의 눈이 커졌다.

"저도 가도 돼요?"

"싫으면 안 가도 됩니다. 다만 고양이를 찾으려면 사람이 둘은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로라는 브로치를 꼭 쥐었다.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로도 억지로 웃었다.

"갈게요. 아가씨를 혼자 두고는 못 가요."

엘리아나는 그제야 조금 안심했다.

그날 밤 남부의 중개인에게서 답신이 왔다. 라피스 해안 북쪽 언덕에 작은 별장이 하나 나왔다는 내용이었다. 넓지는 않지만 정원 끝으로 바다가 보이고 마을과도 너무 멀지 않았다.

엘리아나는 매각 대금의 일부를 계약금으로 보냈다.

영수증 위의 숫자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종이 위에만 있던 계획이 처음으로 현실의 무게를 얻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황궁의 인장이 찍힌 편지가 도착했다.

파혼 요청은 보류한다. 그대의 재산 처분과 수도 이탈에 관해서도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

엘리아나는 첫 문장을 읽고 미간을 좁혔다. 내 돈으로 내 집을 구하는데 무슨 논의가 더 필요하단 말인가.

마지막 줄에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오늘 저녁, 내가 공작저로 가겠다.

엘리아나는 편지를 내려다보다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휴양은 왜 이렇게 절차가 많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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