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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악녀는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3화

시한부 악녀는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시한부 악녀는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3화: 검토라는 이름의 방문

로라는 열린 여행 가방 앞에서 같은 옷을 두 번 접었다.

작은 가방 안에는 연한 회색 드레스 두 벌과 걷기 편한 구두 한 켤레, 검푸른 약병이 차례로 들어갔다. 옷장 한쪽을 가득 채운 보석 상자들은 손도 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아가씨. 황태자 전하께서 오시면 정말 떠나지 못하게 하실까요?"

엘리아나는 침대 곁에 쌓아 둔 책 세 권 가운데 가장 얇은 책을 골라 가방에 넣었다. 바다에 관한 시집이었다. 아직 펼쳐 보지도 않았지만 표지의 푸른 물결만으로도 조금 숨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그분이 제 발목을 묶을 끈까지 들고 오시진 않았겠지요."

"황태자 전하시잖아요. 끈이 아니라 법령을 들고 오실 수도 있어요."

엘리아나는 잠시 생각하다 웃었다.

"그건 조금 무섭네요. 그럼 구두를 하나 더 챙겨야겠어요. 도망갈 때 신을 구두가 필요할 테니까요."

로라는 웃지 못했다. 대신 새 구두를 꺼내 들던 손을 꼭 움켜쥐었다.

엘리아나는 그 손등을 가볍게 덮었다.

"로라. 아직 아무것도 정해진 건 아니에요. 다만 별장 계약은 취소하지 않을 거예요. 창문에서 바다가 보인다고 했잖아요. 그런 집은 기다려 주지 않아요."

"저도 꼭 같이 갈 거예요."

"그 말은 이미 들었는데요."

"그래도 또 할래요."

그 대답이 엘리아나의 가슴 한쪽을 따뜻하게 했다. 아프지 않은 따뜻함은 오랜만이었다.

그때 창밖에서 바퀴가 멈추는 소리가 났다.

검은 말 네 필이 끄는 황실 마차였다. 공작저의 정문이 열리고 은빛 문장이 달린 마차가 안뜰을 가로질렀다. 시종들이 급히 줄지어 섰다.

로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정말 법령을 가져오신 건 아니겠지요?"

"그럼 제가 먼저 읽어 볼게요. 무서운 부분은 접어서 숨기고요."

엘리아나는 가방의 뚜껑을 닫았다. 손끝이 조금 떨렸지만 이번에는 감추지 않았다.

응접실의 창문은 저녁 햇빛을 길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카시안 데 아스테리아는 수행 기사 한 명만 데리고 들어왔다. 검은 제복의 어깨에는 먼지 하나 없었고 푸른 눈은 평소보다 더 고요했다.

엘리아나는 그가 책상 위의 짐표를 발견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라피스 해안행 준비 물품.

약, 얇은 담요, 편한 드레스, 책, 로라의 여비.

카시안은 짐표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출발 준비를 멈추지 않았군요."

"별장 주인이 마음을 바꿀까 봐요."

"그대는 황궁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받았어요. 논의가 필요하다는 내용이었지요. 짐을 싸면 논의할 수 없다는 뜻은 없었습니다."

카시안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에게 돌아왔다.

"앉으십시오."

"전하도 앉으세요. 오늘은 손님이시니까요."

잠깐의 정적 뒤에 그가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엘리아나도 자리에 앉았지만 등받이에는 기대지 않았다. 오래 버티기 위해서는 몸을 편하게 두는 편이 좋았다.

카시안이 가져온 서류철을 탁자 위에 올렸다.

"파혼 요청은 아직 수리하지 않았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혼인 계약이 유지되는 동안 고가의 개인 자산을 대량 처분하고 수도를 장기간 떠나는 일은 황실에도 확인할 책임이 있습니다."

엘리아나는 서류철의 붉은 봉인을 바라보았다.

"제 보석을 팔았다고 황실 재산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대가 나중에 강요받았다고 주장하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그럴 일은 없어요."

"지금의 그대를 보면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그 말은 조용했지만 날이 서 있었다. 엘리아나는 손가락을 무릎 위에서 깍지 꼈다.

"제가 멀쩡해 보이지 않는다는 말씀인가요?"

"그대는 며칠 사이 약을 구했고 보석을 팔았고 한 달 안에 수도를 떠나겠다고 했습니다. 그 전에 파혼까지 청했지요."

"정확히 기억하고 계시네요."

"기억해야 할 일입니다."

엘리아나는 속으로 짧게 한숨을 쉬었다. 원래의 엘리아나라면 그 말에 의미를 붙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의미가 아니라 출발 날짜였다.

"전하께서 확인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제가 누군가에게 협박받는지요?"

"그것도 포함됩니다."

"아무도 저를 협박하지 않았어요."

"그럼 왜 그렇게 급합니까?"

창밖의 하늘이 조금씩 붉어졌다. 라피스 해안의 저녁도 이런 색일까. 바다는 붉은 하늘을 품고 있을까.

엘리아나는 눈앞의 서류 대신 그 바다를 생각했다.

"여기서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너무 많은 사람에게 설명해야 하거든요."

"설명 없이 사라지는 것은 원하는 일입니까?"

"사라지는 게 아니에요. 주소도 남길 거고 편지도 받을 거예요. 그저 조용한 곳에 가서 살겠다는 거예요."

"한 달 안에."

그가 다시 그 숫자를 되뇌었다.

엘리아나는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가슴 안쪽이 갑자기 조여 왔다. 숨이 짧게 끊겼다.

찻잔의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뜨거운 차가 접시 위로 몇 방울 흘렀다.

로라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아가씨. 약을 드셔야 해요."

"괜찮아요. 조금만 지나면……"

말끝이 흐려졌다. 탁자 위 작은 유리병에 꽂혀 있던 들꽃이 시들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엘리아나의 손끝에서 희미한 빛이 번지자 축 늘어진 꽃잎이 아주 천천히 펼쳐졌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카시안의 시선이 꽃과 그녀의 창백한 손 사이를 오갔다.

엘리아나는 얼른 손을 거두었다. 괜히 꽃까지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 꽃 상태가 좋지 않았나 봐요."

"엘리아나."

카시안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번에는 질문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가 문 쪽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들어오십시오."

엘리아나는 그 말에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문이 열리고 베르너가 들어왔다. 주치의는 검은 가방을 든 채 난처한 얼굴이었다. 로라가 그를 향해 원망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전하께서 부르셨어요?"

"환자분의 상태만 확인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엘리아나는 베르너를 똑바로 보았다.

"제가 말하지 않은 것은 말하지 마세요."

베르너의 입술이 굳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숙였다.

"의사로서 지켜야 할 것이 있습니다."

카시안은 베르너에게 의자 하나를 권했다.

"병명을 묻지 않겠습니다. 다만 장거리 이동이 가능한지는 답해 주십시오."

베르너는 맥박을 확인했다. 차가운 손가락이 손목 위에 닿자 엘리아나는 고개를 돌렸다. 병을 숨기는 일은 누군가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 자신이 약해 보이는 순간을 견디는 일이었다.

한참 뒤 베르너가 손을 놓았다.

"지금 상태에서 장거리 이동은 신중해야 합니다. 갑작스러운 통증과 호흡 곤란이 올 수 있습니다."

"불가능합니까?"

"준비 없이 떠나는 것은 위험합니다."

카시안의 표정이 굳었다.

"들었습니까?"

엘리아나는 약병 뚜껑을 열었다. 쓴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들었어요."

"그런데도 떠나겠습니까?"

그 질문에는 명령보다 답답함이 더 많이 섞여 있었다. 엘리아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약을 삼켰다.

"네."

카시안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위험하다는 말을 듣고도?"

"여기 있으면 안전한가요?"

그가 대답하지 못했다.

엘리아나는 손에 남은 물기를 냅킨으로 닦았다.

"전하께서는 저를 황궁에서 지켜 주실 수 있겠지요. 공작저에서도 의사를 부르고 약을 구해 주겠지요. 하지만 저는 매일 누군가의 걱정과 질문 속에서 살게 될 거예요."

그녀는 들꽃이 든 유리병을 바라보았다.

"저는 아주 큰 것을 바라는 게 아니에요. 바다를 보고 싶고 따뜻한 타르트를 먹고 싶어요. 고양이를 만나면 털도 실컷 만져 보고 싶고요."

로라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게 그렇게 위험한 일인가요?"

카시안의 손가락이 서류철 가장자리를 눌렀다.

"그대가 아프다는 사실을 숨긴 채 떠나는 일이 위험합니다."

"그 병을 고쳐 주실 수 있나요?"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엘리아나는 그 침묵을 기다렸다. 누구도 대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고쳐 주실 수 없다면 적어도 제 하루를 어디에서 보낼지는 제가 고르게 해 주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저는 전하께 허락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었어요. 관계를 정리하겠다고 말씀드리러 온 것이었고 제 삶을 정리하려고 했던 거예요."

베르너가 숨을 죽였고 로라는 두 손을 꼭 맞잡았다.

카시안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밖의 붉은 빛이 그의 옆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침내 그가 서류철을 닫았다.

"라피스 해안행을 막지는 않겠습니다."

로라가 고개를 들었다. 엘리아나도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역시 세상은 쉽게 바다를 내주지 않았다.

"말씀해 보세요."

"사흘 안에 출발 준비 목록을 다시 제출하십시오. 마차와 호위 인원, 동행 의사까지 내가 확인하겠습니다."

"감시는 받지 않겠어요."

"감시가 아닙니다."

카시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대가 살아서 도착하라는 뜻입니다."

그 문장은 이상하게 무거웠다. 엘리아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누군가가 자신의 도착을 바란다는 말은 기대보다 더 큰 책임처럼 느껴졌다.

"의사는 베르너 선생님이면 됩니다. 다른 사람은 필요 없어요."

베르너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아가씨. 제가 남부까지 동행하는 일은……"

"싫으세요?"

"싫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럼 됐네요."

엘리아나는 다시 카시안을 보았다.

"호위는 최소한으로 해 주세요. 조용히 살려고 가는 건데 황실 행렬이 따라오면 마을 사람들이 바다보다 저를 먼저 구경할 거예요."

카시안의 입가가 아주 잠깐 움직였다. 웃음인지 한숨인지 알 수 없었다.

"검토하겠습니다."

"그 말은 오늘만 벌써 두 번째네요."

"그대는 오늘만 벌써 세 번째로 내 뜻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기록해 두시면 좋겠어요. 나중에 제가 얼마나 건강한 반항을 했는지 알 수 있으니까요."

이번에는 카시안이 확실히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곧 표정을 지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혼 건은 여전히 보류합니다. 공작과도 이야기해야 하니까요."

엘리아나는 미간을 좁혔다.

"아버지께서 돌아오시는 건가요?"

"이미 귀환 통지를 보냈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밖에서 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집사가 봉투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두꺼운 종이 위에는 로젠버그 공작가의 붉은 봉인이 찍혀 있었다.

엘리아나는 봉투를 받아 들었다.

아버지가 직접 쓴 것은 아니었다. 공작의 수석 비서가 보낸 통지였다.

공작 각하께서 수도로 귀환하십니다.

영애의 약혼 해지와 남부 이탈 계획에 관한 모든 처분은 각하의 귀환 전까지 중단하십시오.

마지막 문장을 읽은 뒤 엘리아나는 종이를 접었다.

가슴이 다시 조여 왔지만 이번에는 통증 때문만은 아니었다.

카시안이 조용히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엘리아나는 봉투를 들어 보였다.

"바다가 조금 더 멀어졌어요."

그녀는 웃었지만 손끝은 차가웠다.

사흘 뒤가 아니라 아버지가 돌아오기 전이라면 더 서둘러야 했다.

라피스 해안의 창문이 닫히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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