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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악녀는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1화

시한부 악녀는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시한부 악녀는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1화: 남은 시간은 1년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장미 향수였다.

달콤한 향 아래로 오래 끓인 약초 냄새가 깔려 있었다. 침대 천장은 지나치게 높았고 비단 커튼 너머 새벽빛은 푸르게 식어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가슴 한복판이 깨진 유리처럼 아팠다.

"윽."

손끝이 이불을 움켜쥐었다. 희고 긴 손가락이었다. 내가 알던 손이 아니었다.

숨을 고르려 했지만 목 안쪽에서 쇠 맛이 밀려왔다. 침대 옆 탁자를 더듬자 이미 붉게 젖은 손수건이 잡혔다.

피였다.

낯선 방.

낯선 몸.

그리고 피 묻은 손수건.

여기까지 오면 대충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빙의라니."

나는 낮게 중얼거렸다. 목소리까지 낯설 만큼 우아했다.

침대 옆 전신 거울에는 창백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백은발은 흘러내린 달빛처럼 길었고 보라색 눈동자는 피곤할 정도로 선명했다. 고귀하고 차갑고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얼굴.

엘리아나 로젠버그.

어젯밤 읽다 잠든 로맨스 판타지 속 악녀였다.

주인공들을 괴롭히고 황태자에게 집착하다가 마지막에는 처형대에 오르는 여자.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기억되는 여자.

머릿속으로 낯선 기억이 밀려왔다. 로젠버그 공작가의 차가운 식탁. 황태자 카시안 데 아스테리아와의 약혼. 사교계에 퍼진 소문. 엘리아나가 했다는 악행들. 그리고 그중 상당수가 엘리아나의 오만과 주변의 모함이 뒤섞여 부풀려진 결과였다는 사실.

억울함을 따지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누가 더 나빴는지가 아니었다.

내 심장이 다시 아팠다.

쿵.

박동 한 번이 몸 안쪽을 긁고 지나갔다. 나는 손수건을 입가에 댔다. 새 붉은 얼룩이 천천히 번졌다.

문이 급히 열렸다.

"아가씨!"

어린 시녀가 달려오다 손수건을 보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곧장 복도로 뛰쳐나갔다. 잠시 뒤 흰 수염을 단정히 정돈한 노의사가 들어왔다.

의사는 내 손목에 손가락을 얹었다. 눈가의 주름이 깊어졌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지자 내가 먼저 물었다.

"얼마나 남았나요?"

의사의 손끝이 움찔했다.

"아가씨.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통증은 심장 쪽이고 피를 토했어요. 제가 제 몸 상태를 모르는 편이 더 곤란합니다."

나는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사실 아주 차분한 것은 아니었다. 손끝은 식었고 등에는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 그러나 울고불고 매달린다고 심장이 멀쩡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의사는 결국 작은 수정판을 꺼냈다. 그것을 내 손등 위에 얹자 흐린 빛이 손목을 타고 심장 쪽으로 흘렀다. 빛은 따뜻하지 않았다. 맑은 보석처럼 차갑고 단단했다.

그가 눈을 감았다.

"심장 결정화입니다."

시녀가 문가에서 숨을 삼켰다.

"과도한 마력이 심장을 침식하고 있습니다. 이미 상당히 진행되었습니다."

"치료는요?"

"현재 알려진 치료법은 없습니다. 통증을 늦추는 약만 있습니다."

"그럼 남은 시간은요?"

의사는 한참 입술만 달싹였다. 대답을 미룬다고 시간이 늘어나는 것도 아닌데.

"길어야 일 년입니다."

일 년.

처형대까지 가는 원작의 시간표보다 조금 길었다.

이상하게도 그 사실에 먼저 안도했다. 죽음이 반가운 것은 아니었다. 다만 당장 목이 날아가는 결말보다는 내가 쓸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쪽이 나았다.

"약을 두고 가세요."

"아가씨."

"그리고 오늘 일은 조용히 해 주세요."

의사는 고개를 들었다.

"이런 중대한 일을 공작 각하께 알리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알리면 집안이 시끄러워지겠지요."

"하지만 아가씨의 목숨이 걸린 일입니다."

"그래서 더 조용했으면 합니다."

내 말에 시녀가 결국 눈물을 떨어뜨렸다. 의사도 금방 무너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

조금 미안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위로는 많지 않았다.

괜찮다고 말하면 거짓말이었다. 무섭지 않다고 해도 거짓말이었다. 다만 지금은 무서워할 시간보다 정리할 일이 먼저 떠올랐다.

"통증이 심해지면 부르겠습니다. 지금은 혼자 있고 싶어요."

의사는 약병을 내려놓고 물러났다. 시녀도 몇 번이나 뒤돌아보다가 문을 닫았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발바닥이 차가운 대리석에 닿았다. 몸은 종이처럼 가벼웠고 머리는 이상하게 선명했다.

책상 위에는 금박이 찍힌 초대장과 약혼 관련 서류가 쌓여 있었다. 맨 위에 카시안 데 아스테리아의 이름이 보였다.

황태자.

원작 남주.

그리고 엘리아나의 약혼자.

엘리아나는 그를 사랑했다기보다 붙잡으려 했다. 공작가에서 받지 못한 인정과 사교계에서 잃은 자존심을 황태자비라는 자리로 보상받으려 했다. 카시안은 그런 엘리아나를 경멸했다.

서로 불행해지는 데 참 성실한 관계였다.

"안 하면 되잖아요."

나는 계약서를 펼쳤다.

집착하지 않으면 된다. 원작 여주를 괴롭히지 않으면 된다. 황태자에게 매달리지 않고 공작가의 애정을 구걸하지 않으면 된다.

생각보다 간단했다.

전생에서도 나는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으로 살아 본 기억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이번 생에서 갑자기 가족애와 로맨스를 쟁취하겠다고 피를 말릴 이유도 없었다.

남은 시간이 일 년이라면 더더욱.

서랍을 열자 개인 명의 보석 목록과 소유 증서가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 원작 엘리아나는 허영심이 많다는 평판과 달리 자기 물건을 꽤 꼼꼼하게 관리했다.

나는 목록을 하나씩 훑었다.

루비 목걸이.

사파이어 귀걸이.

황궁 무도회용 다이아몬드 장식.

불필요하게 반짝이는 것들이 많았다.

"이 정도면 남부에 작은 집 하나는 사겠네요."

루멘 제국 남부의 라피스 해안.

맑은 바다와 따뜻한 바람이 있고 잘 익은 과일과 해산물 타르트가 유명한 휴양지. 원작에서는 몇 줄 배경으로만 지나간 장소였지만 내게는 천국처럼 들렸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이 거대한 복수일 필요는 없었다.

악녀 누명을 벗기 위한 장대한 법정극도 사양이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증명하려고 피를 토하며 뛰어다니는 일도 취향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바다를 보고 싶었다.

가능하면 누운 의자에 기대서.

가능하면 달고 차가운 음료를 마시면서.

가능하면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는 곳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제목을 적었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

한참 펜촉을 바라보다가 첫 줄을 썼다.

  1. 바다 보며 멍때리기.

두 번째 줄은 금방 나왔다.

  1. 갓 구운 타르트 배터지게 먹기.

세 번째 줄에서 조금 웃음이 났다.

  1. 고양이 털에 묻혀 자기.

소원이 이렇게 소박해도 되는 걸까.

하지만 소박한 쪽이 실현 가능성이 높았다. 일 년짜리 인생 계획에는 제국 정복보다 낮잠이 어울렸다.

가슴이 저릿하게 조여 왔다. 나는 의사가 두고 간 약병을 열었다. 검푸른 알약 하나가 손바닥에 굴렀다.

삼키자 쓴맛이 혀끝에 남았다. 눈앞이 잠깐 흐려졌다가 돌아왔다.

그때 손끝에서 희미한 빛이 일었다.

마력이었다.

이 몸의 마력은 화난 파도처럼 날뛰지 않았다. 깊은 우물 속 물결처럼 얌전하게 떨렸다. 나는 그 빛을 바라보다가 창가의 마른 화분을 발견했다.

충동적으로 손을 뻗었다.

말라 있던 줄기 끝에 작은 연두빛이 맺혔다. 잎 하나가 조심스럽게 펼쳐졌다. 죽은 줄만 알았던 화분에서 여린 생기가 올라왔다.

"공격적인 악녀의 마력이라더니."

내가 보기에는 꽃 하나 살리는 힘에 가까웠다.

나쁘지 않았다. 사람을 찌르는 힘보다 화분을 살리는 힘이 훨씬 취향에 맞았다.

나는 다시 책상에 앉았다. 약혼 계약서 옆에 새 종이를 펼쳤다. 파혼 신청서의 형식을 기억에서 끌어왔다. 엘리아나의 몸은 이런 서류를 쓰는 일에 익숙했다.

첫 줄.

본인은 카시안 데 아스테리아 전하와의 약혼 관계를 상호 합의 아래 정리하고자 합니다.

상호 합의가 아직 없다는 점은 사소한 문제였다. 합의는 만나서 받으면 된다.

다음에는 재산 환전 목록을 만들었다. 보석은 수도의 상단에 넘기고 드레스 일부는 사교계 부인들에게 팔 수 있다. 필요 없는 마차와 장식품도 처분한다.

공작가를 떠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나를 부담스러워했다. 황태자 역시 내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을 반길 것이다. 모두가 원하는 대로 나는 사라져 주면 된다.

그리고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쉬면 된다.

펜촉이 마지막 줄에서 멈췄다.

파혼 신청인.

엘리아나 로젠버그.

나는 이름 아래에 서명했다. 잉크가 천천히 마르는 동안 창밖의 새벽이 밝아졌다. 수도의 하늘은 여전히 차갑고 회색빛이었다.

괜찮았다.

곧 바다를 보러 갈 테니까.

문밖에서 조심스러운 노크가 울렸다.

"아가씨."

울음을 삼킨 시녀의 목소리였다.

"황궁에서 전령이 왔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오늘 오후 알현을 명하셨다고 합니다."

나는 마른 화분에 돋은 새잎을 한 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파혼 서류를 단정히 접었다.

"잘됐네요."

목소리는 생각보다 가벼웠다.

"마침 저도 드릴 것이 있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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