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을 삼키는 보급관이 기사단을 키우는 법

3화: 술병과 밀봉 장부
문이 열리자 술 냄새가 먼저 엘리나의 얼굴을 때렸다.
집무실 바닥에는 빈 병과 구겨진 독촉장이 뒤섞여 있었다. 한쪽 벽의 지도에는 붉은 실이 몇 가닥 남아 있었지만 대부분은 뜯겨 나가 있었다. 비가 새는 창가 아래에는 젖은 장부들이 탑처럼 쌓여 있었다.
책상 뒤에 앉은 남자가 이마를 짚은 채 말했다.
"채권자면 나가라. 오늘은 줄 돈 없어."
낮고 거친 목소리였다. 술기운에 잠겨 있으면서도 마지막 단어만큼은 칼날처럼 또렷했다.
"채권자가 아닙니다."
엘리나는 문턱을 넘었다. 젖은 신발이 낡은 나무 바닥에 물자국을 남겼다.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검은 머리는 대충 묶여 있었고 눈가에서 턱까지 이어진 흉터가 비스듬히 패여 있었다. 술에 취한 사람의 흐릿한 눈빛이었는데도 낯선 이를 재는 시선만은 지나치게 날카로웠다.
"그럼 누구지?"
"보급관 공고를 보고 왔습니다."
문 옆에 선 경비병 로웬이 작게 헛기침했다. 남자는 엘리나의 수도복과 젖은 자루를 번갈아 보더니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수도원에서 장부도 가르치나?"
"가르치는 곳도 있겠지요."
"여긴 없을걸. 보급관은 넷이 왔다가 넷이 도망갔다. 마지막 놈은 창고 열쇠를 들고 달아났고."
거짓의 통증은 없었다.
엘리나는 빈 의자를 끌어 책상 앞에 앉았다. 앉는 순간 허벅지가 풀릴 듯 떨렸지만 손은 자루 위에서 떼지 않았다. 쓰러지는 것은 면담이 끝난 뒤에도 늦지 않았다.
"그럼 다섯 번째를 구하셔야 합니다."
"안 구해."
"공고가 정문에 붙어 있었습니다."
남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책상 아래의 술병을 발끝으로 밀어 구석에 보냈다.
"돈도 없고 방도 없다. 밥도 장담 못 해. 그걸 알고 들어온 거면 미친 거고 모르고 들어온 거면 더 미친 거다."
"저는 사흘치 식량과 잠글 수 있는 방이면 됩니다. 급여는 장부를 본 뒤에 협의하겠습니다."
그 말에 남자의 눈빛이 처음으로 움직였다.
"이름."
"엘리나입니다."
성녀라는 말은 삼켰다. 그 이름은 이곳에서 금화 한 닢만큼도 쓸모없었다. 오히려 목에 걸린 올가미가 될 것이다.
"칼릭스. 검은 독수리 기사단 단장이다."
칼릭스는 책상 한쪽에 쌓인 장부 중 가장 두꺼운 것을 집어 던졌다. 장부 모서리가 엘리나의 무릎 앞에 떨어지며 먼지를 일으켰다.
"그럼 보급관님. 우리한테 남은 게 얼마나 되는지 말해 봐. 맞히면 의자 하나는 내주지."
엘리나는 장부를 열기 전에 책상 위를 살폈다.
빚 독촉장 세 장. 마구간 지붕 수리비 영수증 한 장. 약초상에게 쓴 차용증. 그리고 반쯤 찢긴 여물 배분표.
차용증의 밀랍은 사흘 전 날짜였다. 약초상은 적은 액수에도 높은 이자를 붙이는 부류다. 기사단이 그에게 손을 벌렸다는 것은 급히 치료해야 할 사람이 있다는 뜻이었다.
장부의 숫자는 더 엉망이었다.
귀리 여섯 포대 입고. 소금 두 포대 지급. 부상자 치료비 미지급. 같은 날짜의 아래 줄에는 귀리 두 포대 반출. 다른 필체로 덧쓴 숫자 하나가 잉크 번짐 속에 반쯤 묻혀 있었다.
"기록한 사람이 셋입니다."
"그래서?"
"날짜를 적은 사람과 수량을 적은 사람과 값을 적은 사람이 다릅니다. 장부를 한 사람에게 맡긴 적이 없으셨군요."
"맡길 사람이 없었지."
"그럼 누구나 빈칸을 자기 편한 대로 채울 수 있습니다."
칼릭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엘리나는 수리비 영수증을 장부 위에 올렸다.
"이 돈은 마구간 지붕에 썼습니다. 비를 맞은 말이 있다는 뜻입니다. 약초상에게도 빚이 있고요. 그런데 귀리는 장부에 있습니다. 마구간 여물통에는 없었습니다. 어디에 쓰셨습니까?"
칼릭스는 책상 위를 더듬어 술병을 찾았다. 빈손을 내려다본 뒤 퉁명스럽게 말했다.
"술값."
심장이 얇게 찔렸다.
엘리나는 통증이 사라질 때까지 숨을 고른 뒤 그의 손을 보았다. 손등에는 굳은살과 오래된 상처가 겹쳐 있었다. 술을 사러 다니는 사람의 손이 아니라 칼을 놓지 못한 사람의 손이었다.
"술값으로 썼다면 빈 병은 이보다 많아야 합니다."
로웬이 숨을 삼켰다.
"술집은 외상도 해 줍니다."
"그렇다면 독촉장이 있어야지요. 여기에는 없습니다. 대신 약초상 차용증이 있습니다. 귀리 두 포대 값과 약값을 합치면 대략 맞습니다."
칼릭스의 표정이 굳었다.
엘리나는 더 묻지 않았다. 거짓을 들었다고 해서 모든 비밀을 강제로 꺼낼 권리는 없었다. 다만 장부의 빈칸은 결국 누군가의 굶주림이 된다.
"숨긴 물자를 확인하겠습니다. 창고 열쇠를 주십시오."
"마음대로 구는군."
"보급관을 구하신 게 아니라 점쟁이를 구하신 거라면 저도 방법이 없습니다."
칼릭스는 한동안 엘리나를 노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 냄새가 짙었지만 발걸음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따라와."
마구간으로 향하는 길에 회색 수염의 남자가 앞을 막았다. 낡은 갑옷 위에 부단장 표식을 단 마틴이었다.
"단장님. 정말 이 애를 창고에 들일 겁니까? 이름도 출신도 모릅니다."
"장부는 읽더군."
"글 읽는 자가 부족한 건 아닙니다. 믿을 자가 부족한 거지."
엘리나는 마틴의 눈을 마주했다.
"그 말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니 장부와 실물을 함께 확인해야 합니다. 믿음부터 요구하면 장부는 다시 망가집니다."
마틴의 턱이 굳었다. 칼릭스는 피곤하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열쇠."
마틴이 허리춤의 열쇠 꾸러미를 꺼내는 사이 앞마당에서 고성이 들렸다.
"말한테 줄 귀리는 없고 우린 빵도 반 조각인데 왜 말부터 챙겨?"
"말이 쓰러지면 다음 의뢰는 누가 나가는데?"
두 기사 사이에는 갈비뼈가 드러난 갈색 말 한 마리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말은 빈 여물통을 핥다가 사람들의 소리에 귀만 움직였다.
창고 문이 열리자 축축한 곰팡내가 흘러나왔다. 벽에 기대어 선 자루는 몇 개뿐이었고 선반에는 쥐똥만 남아 있었다.
"보시다시피 없습니다."
마틴의 말에는 통증이 없었다. 그도 정말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엘리나는 안으로 들어가 바닥을 살폈다. 마른 먼지 위에 새로운 자루 자국이 두 줄 남아 있었다. 벽 쪽 널빤지 아래에는 비에 젖지 않은 흙이 얇게 쓸려 있었다.
"저 뒤의 널빤지를 치우십시오."
"거긴 망가진 방패뿐이야."
"방패는 자루처럼 끌리지 않습니다."
로웬이 널빤지를 밀었다. 뒤편에서 귀리 두 포대와 마른콩 한 포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말없이 서 있던 기사들의 눈이 한꺼번에 흔들렸다.
마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숨긴 게 아니라 아껴 둔 거다."
"누구를 위해서요?"
"부상자 열둘과 말 셋. 오늘까지 버티려면 필요해."
칼릭스가 답했다. 이번에는 통증이 없었다.
엘리나는 자루의 매듭을 풀어 곡물을 손바닥에 올렸다. 귀리는 아직 습기를 먹지 않았다. 그러나 콩 가장자리에는 희미한 흰 가루가 붙어 있었다. 이대로 며칠을 더 두면 쓸 수 없게 된다.
"두 포대는 나흘을 못 갑니다. 부상자에게 콩을 전부 끓이면 내일 말이 쓰러집니다. 말에게 귀리를 전부 주면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먼저 쓰러집니다."
"그럼 어쩌라고?"
마틴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엘리나는 작은 저울과 빈 통을 가리켰다.
"오늘은 말 세 마리에게 귀리 한 되씩만 줍니다. 부상자 열둘에게는 콩죽을 묽게 끓이고 남은 빵 부스러기를 섞으세요. 움직일 수 있는 단원은 저녁까지 배급을 미룹니다."
"우리더러 굶으라는 소리잖아."
앞마당의 젊은 기사가 말했다. 얼굴에는 분노보다 지친 기색이 짙었다.
"맞습니다."
엘리나는 그를 피하지 않고 바라봤다.
"하지만 아무 기준 없이 먼저 손 뻗는 사람이 가져가게 두면 부상자와 말이 함께 죽습니다. 오늘 버틸 사람과 내일 움직일 수 있어야 할 것을 나누는 겁니다. 저는 그 순서를 적겠습니다."
그녀는 창고 벽에 걸린 낡은 판자를 떼어냈다. 손끝이 너무 차가워 숯 조각을 제대로 쥐기 힘들었지만 열다섯 줄을 하나씩 그었다.
부상자 이름. 말 이름. 오늘 받은 양. 남은 양.
"배급을 가져가는 사람은 이 줄 옆에 표시하십시오. 누구도 두 번 가져가지 않습니다. 남는 부스러기도 모두 기록합니다."
"누가 그걸 지켜?"
"제가 지킵니다."
말이 낮게 코를 울렸다. 엘리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지금 이 사람들은 그녀를 믿지 않는다. 그녀도 이들을 믿지 않는다.
그래도 숫자를 남기면 적어도 누가 무엇을 가져갔는지는 남는다. 그것이면 첫날에는 충분했다.
칼릭스가 한참 동안 판자를 바라봤다. 그러다 열쇠 꾸러미를 엘리나의 손바닥 위에 올렸다.
차가운 쇠가 젖은 피부에 닿았다.
"사흘이다."
엘리나는 열쇠를 내려다봤다.
"무슨 뜻입니까?"
"사흘 동안 창고와 장부를 네가 맡아. 그 안에 말 안 죽이고 사람들 밥을 늘리면 정식으로 고용한다. 못 하면 조용히 떠나."
"숙식과 권한은 문서로 남기겠습니다."
칼릭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성가신 사람이군."
"보급관은 성가셔야 합니다."
집무실로 돌아온 엘리나는 빈 독촉장 뒷면에 조건을 적었다. 창고 열쇠 사용권. 장부 열람권. 식량 배분 지시권. 사흘간 숙식. 단장의 승인 없는 임의 차용 금지.
마지막 줄을 읽은 칼릭스의 눈썹이 올라갔다.
"내가 술도 못 마시게 하겠다는 건가?"
"기사단 돈으로는 안 됩니다."
"독하네."
"장부가 무너지면 말부터 굶습니다. 그다음은 부상자고요. 단장님이 술값이라는 말로 가릴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칼릭스는 독촉장과 엘리나를 번갈아 봤다. 이윽고 인장 반지를 빼 잉크에 눌렀다. 붉은 밀랍 위에 날개가 부러진 독수리가 찍혔다.
"됐나, 보급관?"
엘리나는 문서를 접어 품에 넣었다.
그 호칭에는 거짓이 없었다. 그것이 조금 낯설었다.
그녀가 이곳에 남는 이유는 단장을 믿어서가 아니었다. 방금 적힌 조건과 오늘 배급표에 적힌 이름들이 이유였다. 적어도 자신이 손댄 장부만큼은 거짓과 방치 속에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때 정문 쪽에서 마차 바퀴가 진흙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 곧 낯선 남자의 고함이 주둔지 안을 울렸다.
"검은 독수리 놈들! 외상값 받으러 왔다! 장부도 가져왔으니 숨지 마라!"
칼릭스가 관자놀이를 눌렀다.
"귀찮은 놈이 일찍도 왔군. 바르트다."
엘리나는 방금 받은 열쇠 꾸러미를 쥐었다.
"그 상인의 장부부터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