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을 삼키는 보급관이 기사단을 키우는 법

4화: 비어 있는 자루의 값
바르트는 해가 뜨기 전에 도착했다. 그의 뒤에는 빈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검은 독수리 기사단 단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바르트는 문턱에서 고개만 숙였다.
“좋은 소식은 아닙니다만 외상은 해가 뜬다고 줄어들지 않으니까요.”
칼릭스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눈빛은 밤보다 맑았다.
“할 말 있으면 장부만 놓고 가.”
“바로 그 장부 때문에 왔지요.”
바르트가 품에서 기름 먹인 장부를 꺼냈다. 비를 맞은 기사단 장부와 달리 종이 모서리까지 반듯했다. 그는 펼친 면을 칼릭스 앞에 밀었다.
소금 두 포대. 마른콩 한 포대. 부식 운송비. 외상 이자.
맨 아래 합계는 은화 열여섯 닢이었다.
마틴이 숫자를 보고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우린 그만한 소금을 받은 적이 없어.”
“수령 표식이 있지 않습니까.”
바르트의 손가락이 장부 한쪽을 두드렸다. 검은 독수리 문양 옆에 번진 서명이 있었다.
“못 받았다면 그때 말했어야죠. 세상 어느 상인이 한 달 지난 물건값을 그냥 깎아 줍니까?”
“돈 없어.”
칼릭스의 대답은 짧았다.
바르트는 기다렸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러실 줄 알고 대안도 준비했습니다. 기사단 마차 한 대와 마구간의 말 한 필. 창고 열쇠까지 넘기시면 이자 일부는 봐드리지요.”
로웬이 문가에서 숨을 들이켰다. 마틴의 손이 허리춤 열쇠 꾸러미로 갔다.
말 한 필이 사라지면 남은 두 필은 짐을 나누어 끌어야 한다. 마차까지 뺏기면 다음 의뢰를 받아도 물자를 옮길 수 없었다. 바르트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보겠습니다.”
바르트가 그녀를 처음 제대로 바라봤다. 엘리나의 손끝은 창백했다.
“새 보급관인가요? 이런 사정에 어린 아가씨를 앉혀 놓으면 빚이 사라집니까?”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대신 무엇을 빚졌는지는 알 수 있겠지요.”
바르트의 표정에서 웃음이 아주 조금 지워졌다.
수령 표식 옆의 이름은 떠난 보급관 에드릭이었다. 끝 획이 깊게 눌린 필체였다. 엘리나는 집무실에서 본 이전 장부를 기억했다. 에드릭은 이름의 마지막 획을 짧게 끊어 쓰는 사람이었다.
“앞마당으로 나가죠.”
“뭘 하자는 겁니까?”
“납품 목패와 창고를 같이 확인하겠습니다. 물건값을 청구하셨으니 물건이 들어온 흔적도 보여 주셔야 합니다.”
“한 달 전 일을 이제 와서?”
“한 달 전에 확인하지 못했으니 오늘 합니다.”
칼릭스가 엘리나를 힐끗 보았다. 그녀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마틴 부단장님. 열쇠를 가져오십시오. 로웬 씨는 바르트 상단의 마차가 어제 어디에 섰는지 본 사람이 있는지 찾아 주세요.”
마틴은 잠시 망설였다.
“지금 저 상인을 붙잡을 근거가 있나?”
“없습니다. 그래서 확인합니다.”
엘리나는 바르트에게 고개를 돌렸다.
“도망가실 생각이 아니라면 함께 오시죠.”
“내가 왜 도망을 갑니까.”
그 말이 끝나자 심장이 세게 비틀렸다.
숨이 목에서 걸렸다. 엘리나는 손가락으로 책상 모서리를 짚었다. 단순한 과장과는 달랐다. 바르트는 이미 빠져나갈 길을 생각하고 있었다.
엘리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창고 안은 새벽의 습기를 그대로 품고 있었다. 엘리나는 벽 아래와 선반 밑을 살폈다. 소금 자루를 옮기면 흰 가루나 녹은 소금물이 남는다.
창고 바닥에는 그런 자국이 없었다.
“여기입니다.”
엘리나는 벽 쪽의 마른 흙을 가리켰다.
“로웬 씨. 칼끝으로 조금 긁어 보세요.”
로웬이 단검 끝을 바닥에 댔다. 흙 아래에도 검은 흙과 오래된 나무 부스러기뿐이었다. 하얀 결정은 나오지 않았다.
바르트가 코웃음을 쳤다.
“비가 그렇게 내렸는데 가루가 남겠소?”
“비는 지붕 위로 내렸습니다. 이곳의 바닥은 어제도 마른 편이었고요.”
“그리고 소금이 녹았다면 빈 자루라도 남아야 합니다. 그 자루는 어디 있습니까?”
“쥐가 뜯어 먹은 콩 자루처럼 버렸겠지.”
“누가 버렸습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심장이 한 번 더 조여 왔다. 엘리나는 통증이 가라앉을 때까지 자루 하나를 들었다.
엘리나는 숨겨진 콩 자루의 매듭을 살폈다. 세 겹으로 꼰 황갈색 끈에 푸른 실 한 가닥이 묶여 있었다.
“마틴 부단장님. 기사단 창고에서 자루를 열면 어떤 끈으로 다시 묶습니까?”
“붉은 마끈. 창고에 남는 건 그거뿐이니까.”
“맞습니다.”
엘리나는 황갈색 끈을 들어 보였다.
“이건 바르트 상단 자루의 봉인입니다. 물건이 창고에 들어왔다면 적어도 한 번은 풀렸다가 붉은 끈으로 묶였어야 합니다.”
마틴의 시선이 바르트의 마차로 향했다.
“저 자루는 우리가 숨긴 거다. 하지만 납품 때도 같은 끈이었어.”
“그럼 창고에 넣었다가 다시 꺼낸 사람이 있다는 뜻입니다.”
엘리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은 여기서 자루를 묶지 않았습니다. 바르트 씨의 마차에서 묶었겠지요.”
바르트의 뺨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갑자기 창고 밖으로 몸을 돌렸다.
“헛소리에 더 시간을 버릴 수는 없소. 돈이 없으면 계약대로 마차를 가져가겠소.”
칼릭스가 길을 막았다. 움직임은 조용했지만 바르트의 어깨가 움찔할 만큼 위압적이었다.
“내 마차는 못 가져간다.”
“장부가 증거요.”
“아직 확인 중입니다.”
엘리나가 말했다.
“그리고 바르트 씨의 마차도요.”
앞마당으로 나온 그녀는 수레바퀴 앞에 쪼그려 앉았다. 무릎이 바닥에 닿자 차가운 기운이 올라왔다. 속이 울렁거렸지만 손을 뻗어 바퀴 안쪽의 굳은 찌꺼기를 긁었다.
회백색 알갱이가 손톱 아래로 부서졌다.
엘리나는 그것을 혀끝에 아주 조금 댔다. 짜고 쓴맛이 났다.
소금이었다.
“이 마차는 어제 비가 그친 뒤에는 주둔지에 들어온 적이 없습니다.”
로웬이 돌아와 말했다. 그의 뒤에는 마구간지기인 젊은 기사 하나가 서 있었다.
“제가 봤습니다. 해 질 무렵 북쪽 길로 갔어요. 빈 마차인 줄 알았는데 축이 너무 낮았죠.”
바르트가 그를 노려봤다.
“어두워서 잘못 봤겠지.”
“나는 마차 바퀴가 빠질까 봐 돌을 괴어 줬습니다.”
젊은 기사가 침을 삼켰다.
“바퀴 안쪽에 소금물이 흘러 있던 것도 봤어요.”
바르트가 입을 다물었다.
엘리나는 손바닥의 소금 가루를 털었다. 어제의 비가 진흙을 씻었어도 바퀴 안쪽까지 씻어 주지는 않았다. 납품 자루가 창고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소금 두 포대와 콩 한 포대는 여기까지 왔습니다. 수령 표식은 남기고 자루는 다시 실어 다른 곳에 파셨겠지요.”
“증명할 수 있나?”
바르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수령 표식은 위조했습니다. 에드릭 씨는 이름 끝을 끊어 쓰는 사람입니다. 이 장부의 획은 한 번에 긋다 멈췄습니다. 더구나 그가 떠난 날은 이 납품 사흘 전입니다. 그가 수령할 수 없었지요.”
엘리나는 바르트 장부의 다음 면을 펼쳤다. 같은 날짜에 북쪽 장터로 향한 마차 한 대가 기록되어 있었다. 운송 표식은 바르트의 마차 옆판에 찍힌 것과 같았다.
“시장 조합에 이 장부와 바퀴를 보여 드리면 당신은 납품권을 잃을 겁니다.”
칼릭스의 손이 천천히 칼자루에서 떨어졌다. 그는 엘리나를 바라보며 낮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그 질문은 바르트가 아니라 엘리나에게 향해 있었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골랐다. 교단에서는 아픈 그녀를 제단 앞에 세우고 판결을 내렸다. 여기서는 무엇을 되찾을지 자신이 정할 수 있었다.
“지금 돈을 받아도 부상자들은 먹을 수 없습니다.”
엘리나는 바르트에게 다가갔다.
“오늘 해 지기 전 소금 두 포대와 마른콩 세 포대를 가져오세요. 빼돌린 한 포대와 연체 중 이틀분의 이자를 물자로 계산한 양입니다. 기존 외상은 실제로 수령한 물자만 다시 적습니다.”
“콩 세 포대라고?”
“싫으시면 조합에 가죠. 저는 당신이 남긴 북쪽 장터 운송 기록도 함께 가져가겠습니다.”
바르트의 눈이 좌우로 흔들렸다. 그는 칼릭스와 마틴 그리고 굶주린 얼굴로 모여든 기사들을 차례로 봤다.
이곳에는 돈이 없었다. 그래서 누구도 물건을 확인할 힘이 없었다.
“해 지기 전까지 가져오지.”
“문서로 남깁니다.”
엘리나는 집무실에서 독촉장 뒷면을 가져왔다. 보충 납품 수량과 시한, 실제 수령분을 기준으로 외상을 다시 계산한다는 조항을 적었다. 다음 납품부터는 수령자 두 명의 이름과 자루 봉인을 함께 기록한다는 줄도 덧붙였다.
바르트는 손도장을 찍기 전에 한참 글을 노려봤다.
“내가 또 납품할 거라고 생각하나?”
“당신이 아니라도 됩니다. 다만 오늘 약속을 지키면 조합에 낼 장부는 보류하겠습니다.”
“말은 참 곱게 하는군.”
“장부는 곱게 적어야 나중에 다툴 일이 없습니다.”
바르트는 결국 엄지를 붉은 밀랍에 눌렀다. 손도장이 찍히자마자 마차에 올라탔다. 채찍이 허공을 갈랐고 빈 마차는 북쪽 길로 사라졌다.
마틴이 먼저 엘리나 앞에 열쇠 꾸러미를 내밀었다. 어제는 그가 쉽게 놓지 못했던 것이었다.
“창고 안쪽 선반도 보급관이 정리해. 내가 열쇠를 들고 있을 이유가 없겠군.”
“열쇠는 부단장님이 계속 보관하십시오.”
엘리나는 꾸러미를 돌려주었다.
“다만 열 때는 저나 로웬 씨 중 한 사람이 함께 보겠습니다. 열쇠를 한 사람 손에만 두는 것도 장부를 한 사람에게만 맡기는 것만큼 위험합니다.”
마틴은 뜻밖이라는 얼굴을 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맞겠지.”
엘리나는 창고 벽의 낡은 배급판 앞으로 갔다. 숯 조각으로 새 줄을 세 개 그었다.
수령자 둘. 자루 봉인. 당일 재고.
“물건이 오면 자루를 여기서 엽니다. 받은 사람 둘이 수량을 확인하고 이름을 적으세요. 봉인끈은 버리지 말고 장부에 묶습니다. 저녁에는 남은 양을 이 판에 옮깁니다.”
젊은 기사 하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가 글을 못 쓰면요?”
“표시만 남기셔도 됩니다. 손도장도 좋고 갑옷 문양도 좋습니다. 중요한 건 혼자 봤다고 말하지 않는 겁니다.”
로웬이 창고 벽을 바라보다가 손을 들었다.
“내가 야간에 적겠습니다. 글씨는 삐뚤어도 숫자는 셀 수 있어요.”
“좋습니다.”
엘리나는 그에게 숯 조각을 건넸다.
칼릭스는 새 규칙을 읽어 보더니 자신의 인장 반지를 꺼냈다. 붉은 밀랍이 배급판 아래 문서에 떨어졌다.
“들었지.”
그의 목소리가 앞마당을 가로질렀다.
“앞으로 기사단 물자는 보급관 확인 없이는 한 자루도 들이지 않는다. 그건 내 명령이다.”
엘리나는 그 말을 듣고도 바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단장의 명령이란 말은 교단에서 늘 누군가의 고통을 숨기는 데 쓰였다. 지금은 부상자 열둘의 콩죽과 말 세 마리의 여물을 지키는 문장이 되어 있었다.
바르트가 놓고 간 장부를 정리하던 중 종이 한 장이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기름 얼룩이 번진 차용증이었다.
약초상 헤르만에게 은화 여섯 닢을 빌림.
이자 납부일, 오늘.
엘리나는 종이를 뒤집었다. 뒷면에는 작은 글씨가 덧붙어 있었다.
기일을 넘기면 미지급 약재를 회수할 것.
창고 쪽에서 누군가 부상자의 신음 소리를 들었다. 엘리나는 차용증을 접어 품에 넣었다.
빈 자루의 값은 받아 냈다.
이제 약병의 값을 지켜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