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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해가는 영지의 도서관장이 되었습니다2화

망해가는 영지의 도서관장이 되었습니다

망해가는 영지의 도서관장이 되었습니다

2화: 규정집은 배고픔을 해결한다

목록대 위에 내려앉은 책은 조용했다.

조용해 보였다는 말이 더 맞았다. 표지의 금빛 문양은 아주 천천히 숨을 쉬었고 책등에서는 먼 종소리 같은 울림이 났다. 보통 책이라면 즉시 격리 상자에 넣고 상태 기록부터 남겼을 물건이었다.

마르타는 랜턴을 두 손으로 끌어안았다.

"아가씨, 이건 평범한 책이 아닙니다."

"맞아요."

에블린은 표지 위의 제목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규정을 먼저 봐야 해요."

"규정이요?"

"위험한 자료일수록 이용 지침이 먼저입니다."

그녀가 책을 펼치자 오래된 종이 냄새 대신 차가운 잉크 냄새가 올라왔다. 첫 장의 문자는 처음에는 낯선 기호였으나 눈을 깜박인 사이 또렷한 제국어로 바뀌었다.

《초급 관장 업무 규정 및 대출 권한 해설》

제1조. 하르트 고대 도서관의 관장은 장서를 분류하고 열람 자격을 부여하며 지식의 훼손을 방지한다.

제2조. 관장은 장서를 매매하거나 사적으로 처분할 수 없다.

에블린은 그 문장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좋네요."

"팔 수 없다는 말인데도요?"

"책을 팔아도 빚은 잠깐 줄 뿐이에요. 굶주림은 그대로 남겠죠. 팔 수 없다면 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마르타는 뭐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도서관 깊은 곳에서 서가가 낮게 울렸다. 에블린의 답에 동의하는 소리 같았다.

그녀는 다음 줄을 읽었다.

제3조. 관장이 정식으로 분류하고 대출한 장서는 대출자의 언어와 수준에 맞게 해석된다. 해석된 지식은 대출자의 경험과 적성에 따라 행동적 이해로 전환된다.

제4조. 관장은 지식을 제공하는 관리자로서 장서의 내용을 직접 대리 수행하지 않는다.

에블린의 입가에 맺혔던 웃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직접 해치우는 힘은 아니군요."

"무엇을요?"

"아직은 이름 붙이지 말죠. 일단 특수 장서 활용 규정이라고 해 둡시다."

말은 차분했지만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직접 해결할 수 없다. 그러나 필요한 사람에게 읽힐 수 있다. 그건 에블린이 아는 도서관과 닮아 있었다. 사서는 모든 책의 내용을 대신 살아 주지 않는다.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책을 연결한다.

그 원칙이 이 이상한 세계에서도 통했다.

책장이 저절로 넘어갔다.

얇은 은빛 카드 한 장이 책 사이에서 미끄러져 나왔다. 표면에는 빈 이름란과 반납 기한란이 새겨져 있었다.

"마르타, 랜턴을 조금만 가까이요."

"그건 또 무엇입니까?"

"대출증 같습니다."

카드 위로 글자가 떠올랐다.

[임시 대출증]

[관장 승인 필요]

[첫 대출 권장 기한: 사흘]

[훼손 및 연체 시 장서 효과 일시 정지]

에블린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길게 내쉬었다.

"연체 벌칙까지 있네요."

마르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가씨는 왜 그걸 보고 안심하십니까?"

"벌칙이 있다는 건 체계가 있다는 뜻이니까요."

규칙은 울타리다.

전생의 유진에게 규칙은 소란스러운 세상을 견디게 해 주는 손잡이였다. 이곳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황당한 환생, 빚더미 가문, 얼어붙은 밭. 그 모든 혼란 속에서 조항과 기한이 적힌 카드 한 장은 뜻밖의 안정감을 주었다.

책장이 한 번 더 넘어갔다.

부록. 기근 영지 생존을 위한 토양 정화 입문.

아래에는 짧은 안내가 붙어 있었다.

[권장 대출자: 흙을 오래 만져 온 자. 자신의 밭을 포기하지 않은 자. 관장의 독서 지도 필요.]

에블린은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흙을 오래 만져 온 사람."

마르타가 바로 알아들었다.

"한스가 있습니다."

"누구죠?"

"남쪽 보리밭을 맡은 농부입니다. 밭이 얼어 죽어도 아침마다 나가 흙을 파 봅니다. 올해는 아이들 먹일 것도 없다고..."

마르타의 말끝이 흐려졌다.

에블린은 대출증을 책 사이에 끼웠다. 책은 보기보다 가벼웠다. 어쩌면 그녀에게만 가볍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몰랐다.

"오라버니에게 가야겠어요."

"지금 이 밤에요?"

"압류인이 오기 전에 굶주림이 먼저 올 겁니다."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루카스의 집무실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목소리는 낮고 갈라져 있었다.

"사흘 뒤 재산 목록을 확인하겠다고?"

"헬레나 자작부인의 인장이 찍혔습니다. 거절하면 채무 불이행으로 바로 고소하겠답니다."

에블린은 문을 두드렸다.

루카스가 돌아보았다. 지친 얼굴에 놀람과 꾸중이 동시에 떠올랐다.

"에블린, 왜 아직 깨어 있어?"

"팔면 안 되는 재산을 확인했습니다."

그녀는 책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금빛 문양이 램프 빛 속에서 희미하게 반짝였다. 집무실의 공기가 한순간 차가워졌다.

루카스는 말없이 책을 보았다.

"이게 도서관에 있었어?"

"네. 그리고 도서관은 단순한 폐건물이 아니에요. 하르트 가문이 가진 마지막 장부이자 마지막 창고입니다."

"무슨 뜻인지 설명해라."

"이 책은 사람에게 필요한 지식을 읽히게 합니다. 저는 그 사람을 고르고 책을 빌려줄 권한을 받았고요."

루카스의 눈빛에 의심이 스쳤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열병에서 갓 깨어난 동생이 한밤중에 마법 도서관과 대출 권한을 말하고 있었다.

에블린은 은빛 대출증을 내밀었다.

"읽어 보세요."

루카스가 카드를 받아 들었다.

"임시 대출증. 관장 승인 필요."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가 이 글자를 읽고 있는 건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방금 전까지 이 카드는 빈 카드였나?"

"네."

마르타가 뒤에서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카스는 의자에 앉았다가 다시 일어섰다. 믿기 어렵지만 믿지 않을 여유가 없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네가 원하는 게 뭐냐?"

"남쪽 보리밭의 한스를 데려와 주세요. 지금요."

"농부를?"

"흙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귀족의 서명이 아니라 손톱 밑에 흙이 낀 사람이요."

루카스는 책상 위의 서신을 움켜쥐었다. 헬레나 자작부인의 붉은 인장이 촛불에 번들거렸다.

"실패하면?"

"다른 자료를 찾습니다."

"에블린."

"오라버니, 굶주림은 우리가 회의하는 동안 기다려 주지 않아요."

루카스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잠시 뒤 그는 벽에 걸린 외투를 낚아챘다.

"내가 직접 가겠다."

새벽의 남쪽 보리밭은 검었다.

눈이 밟힐 때마다 얇게 얼어붙은 흙이 바스러졌다. 멀리 농가 굴뚝에는 연기가 거의 없었다. 땔감까지 아끼는 집들이었다.

한스는 루카스에게 끌려오다시피 나왔지만 고개는 숙이지 않았다. 마른 얼굴에 눈만 깊었다. 손등은 갈라졌고 손톱 밑에는 검은 흙이 박혀 있었다.

"영주님, 밭을 보셔도 달라질 건 없습니다. 흙이 죽었습니다."

루카스가 답하기 전에 에블린이 앞으로 나섰다.

"죽었는지 확인하러 온 게 아닙니다."

한스의 시선이 병약한 귀족 아가씨에게 닿았다. 그는 예의를 차리려 했지만 절망이 먼저 새어 나왔다.

"아가씨, 책으로 밭을 갈 순 없습니다."

"맞아요."

에블린은 품에서 책을 꺼냈다.

"하지만 책으로 밭 가는 법을 바꿀 수는 있죠."

한스가 당황해 루카스를 보았다. 루카스도 완전히 믿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에블린은 은빛 카드 위에 천천히 이름을 적었다.

한스.

반납 기한: 사흘.

대출 목적: 남쪽 보리밭 토양 정화 실습.

마지막 글자를 적자 카드 가장자리에 희미한 빛이 돌았다. 빈 문장들이 스스로 정렬되었다.

[임시 대출 승인]

[대출자: 한스]

[장서명: 기근 영지 생존을 위한 토양 정화 입문]

한스가 숨을 삼켰다.

"제 이름이..."

"대출증입니다. 책을 깨끗하게 다루고 사흘 뒤 도서관에 반납해야 합니다. 젖게 하거나 찢으면 효과가 멈춥니다."

"저는 글을 모릅니다."

"그럼 더 확실하겠네요. 이 책이 정말 필요한 사람에게 읽히는지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한스는 미친 소리를 들은 얼굴이었다.

에블린은 책을 펼쳐 그의 손에 얹었다.

"첫 줄만 보세요."

"못 읽는다니까요."

"읽히는지 보세요."

바람이 멎었다.

한스의 손바닥 아래에서 책장이 따뜻하게 빛났다. 기묘한 문자가 꿈틀거리더니 굵고 투박한 글자로 바뀌었다.

한스는 입을 벌렸다.

"얼어붙은 흙은 죽은 흙이 아니다."

그가 더듬더듬 읽었다.

"숨구멍을 잃은 흙이다. 손바닥을 대고 물의 길을 기억하라."

루카스가 한 걸음 다가왔다.

"한스, 정말 읽히나?"

"예. 영주님. 제가... 제가 읽고 있습니다."

한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에블린은 조용히 지시했다.

"책이 말하는 대로 해 보세요. 이해가 안 되면 멈추고 질문하세요. 독서 지도는 관장 업무입니다."

한스는 얼어붙은 밭 한가운데에 무릎을 꿇었다. 갈라진 손을 검은 흙 위에 얹었다.

처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르타가 숨도 못 쉬고 지켜보았다. 루카스의 손은 검자루 가까이에 멈춰 있었다. 실패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기적이 두려운 사람처럼 보였다.

한스가 다시 책을 읽었다.

"흙의 냄새를 떠올려라. 씨앗을 묻던 날의 온도를 기억하라. 마른 뿌리는 물을 미워하지 않는다."

그의 손끝에서 녹색 빛이 스며 나왔다.

한스가 놀라 손을 떼려 하자 에블린이 낮게 말했다.

"책을 놓치지 마세요. 손도 떼지 말고요."

"아가씨, 이게 뭡니까?"

"아직 이름 붙이기 전입니다."

에블린은 밭을 보았다.

얼어붙은 흙 아래에서 아주 작은 소리가 났다. 마른 껍질이 갈라지는 소리였다. 검은 땅 사이로 희미한 김이 올라오고 뿌리 하나가 몸을 뒤척이듯 움직였다.

루카스가 숨을 멈췄다.

한스는 울 것 같은 얼굴로 흙을 움켜쥐었다.

에블린은 대출증의 빛이 꺼지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첫 대출은 정상 처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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