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해가는 영지의 도서관장이 되었습니다

시놉시스
국립 도서관 사서 한유진은 책과 규칙을 지키다 악성 민원인이 휘두른 양장본에 맞아 어이없이 사망한다. 눈을 뜬 곳은 제국 동부 변방의 파산 직전 남작가. 새 이름은 에블린 폰 하르트. 빚과 기근에 몰린 그녀는 마지막 재산처럼 방치된 낡은 도서관에서 이상한 부름을 듣는다.
1화: 책에 맞아 죽은 사서
"절판본은 관외 대출이 불가능합니다."
한유진은 오늘만 열일곱 번째로 같은 문장을 말했다.
국립 도서관 민원 데스크 위에는 반납함에서 막 나온 책 세 권, 대출 신청서 다섯 장, 이미 식어 버린 커피 한 잔이 놓여 있었다. 퇴근 시간은 삼십 분 전에 지나갔다.
그런데도 그녀는 웃었다. 사서는 웃어야 했다. 이용자가 화를 낼수록 규정은 더 또렷하게 안내해야 했다.
"내가 세금 내잖아. 그러면 이 책 내 거 아니야?"
"공공 자료는 개인 소유물이 아닙니다. 열람실 안에서 보실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싫다니까?"
남자는 두툼한 양장본을 움켜쥐었다. 오래된 가죽 표지가 손가락에 눌려 우그러졌다.
유진의 시선이 책등으로 먼저 갔다. 1968년 초판본. 복본도 없고 보존 상태도 아슬아슬한 자료였다.
"책을 내려놓아 주세요."
"네가 뭔데 명령이야?"
남자의 팔이 휘둘러졌다.
유진은 뒤로 피하는 대신 책을 붙잡았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은 아주 늦게 왔다. 딱딱한 모서리가 관자놀이를 때리고 세상이 하얗게 접혔다.
마지막으로 떠오른 것은 억울함도 분노도 아니었다.
아, 연체자 명단 정리 아직 못 했는데.
눈을 떴을 때 천장은 지나치게 높았다.
유진은 낡은 캐노피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약초를 오래 끓인 냄새와 젖은 장작 냄새가 방 안에 배어 있었다. 창문 틈으로 들어온 바람은 한겨울의 서고처럼 차가웠다.
"아가씨!"
흰 앞치마를 두른 중년 여자가 물그릇을 떨어뜨릴 뻔하며 달려왔다.
"에블린 아가씨, 정신이 드십니까?"
에블린.
그 이름이 귀에 닿자 머릿속에서 잠겨 있던 서랍들이 한꺼번에 열렸다.
하르트 남작가의 막내딸. 열아홉 살.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방 안에 머문 시간이 더 길었던 아가씨. 아버지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오빠 루카스가 어린 영주가 되었다. 동부 변방의 하르트 영지는 몇 해째 흉작에 시달렸다.
그리고 빚.
기억 속 장부마다 붉은 잉크가 번져 있었다.
유진은 몸을 일으키려다 이마를 짚었다. 자신의 손이 아니었다. 가늘고 창백한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거울을 주세요."
"지금은 누워 계셔야 합니다. 사흘이나 열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확인할 게 있어요."
중년 여자는 울상이 되었지만 작은 손거울을 건넸다.
거울 속에는 전혀 다른 여자가 있었다. 희미한 플래티넘 블론드 머리카락, 깊은 푸른 눈, 핏기가 거의 없는 얼굴.
한유진은 죽었다.
그리고 에블린 폰 하르트가 되었다.
공포는 늦게 밀려왔다. 도서관 바닥에 쓰러졌던 감각이 관자놀이에 남아 있었다. 유진은 저도 모르게 이불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복도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그녀를 현재로 끌어당겼다.
"영주님, 헬레나 자작부인의 대리인이 다시 왔습니다."
"사흘만 더 달라고 전해라. 수확세가 들어오면 일부라도 갚겠다."
"수확세라니요. 남은 밭에서 걷을 곡식이 없습니다."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럼 창고의 보리를 먼저 풀어라. 아이들이 굶는 건 안 된다."
"창고의 보리는 닷새 치뿐입니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방 안의 중년 여자, 기억 속 이름으로는 마르타가 입술을 깨물었다.
에블린은 눈을 감았다.
죽었는데 다시 살았다. 그런데 새 삶도 곧 굶어 죽을 판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오래된 습관이 움직였다. 사서는 패닉에 빠지기 전에 분류표를 세운다. 문제를 이름 붙이고 자료를 찾고 순서를 정한다.
현재 문제.
식량 부족. 현금 부족. 채권자 압박. 영주 경험 부족. 본인 건강 최악.
필요한 것.
목록. 재고. 활용 가능한 자산. 믿을 만한 사람.
그때 문이 열리고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
"에블린."
갈색 머리의 청년은 지친 얼굴로 웃으려 애썼다. 기억이 이름을 알려 주었다. 루카스 폰 하르트. 이 몸의 오빠이자 하르트의 영주.
"정신이 들어 다행이다. 무리하지 마."
에블린은 그의 손을 보았다. 귀족의 손이라기에는 손등이 거칠었다. 잉크와 흙이 손톱 밑에 끼어 있었다. 잠도 제대로 못 잔 얼굴이었다.
"오라버니."
"응?"
"우리에게 남은 재산 목록이 있나요?"
루카스의 미소가 멈췄다.
"깨어나자마자 그런 걸 묻는 거냐?"
"중요해서요."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제가 걱정하지 않아도 해결되는 일인가요?"
루카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침묵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는 한참 망설이다 품 안에서 구겨진 장부를 꺼냈다. 에블린은 침대맡에 기대 앉아 숫자를 훑었다.
현금 보유량은 바닥이었다. 세금은 미납되었고 곡물 창고는 거의 비었다. 농기구 수리비도 밀려 있었다. 헬레나 자작부인의 대출금은 이자가 원금보다 빠르게 불어나고 있었다.
장부 끝에 작은 항목이 남아 있었다.
하르트 가문 소유 구도서관.
에블린의 손가락이 그 줄에서 멈췄다.
"도서관이 있나요?"
"있기야 하지."
루카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택 뒤편의 낡은 건물이다. 아버지도 거의 쓰지 않으셨다. 팔 수 있다면 팔아야 할 텐데 사겠다는 사람도 없을 거다. 지붕은 새고 책은 쥐가 갉았을 테니까."
"도서관을 판다고요?"
목소리가 예상보다 차갑게 나갔다.
루카스가 놀라 눈을 깜박였다.
"너는 그곳에 가 본 적도 거의 없잖아."
"책은 있나요?"
"쓸모없는 고서가 많다더군."
"쓸모없다는 판단은 누가 했죠?"
"에블린?"
그녀는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몸이 휘청였다. 마르타가 비명을 삼키며 부축했다.
"열쇠를 주세요."
"안 된다. 너는 방금 깨어났어."
"파산 직전이면 더더욱 목록부터 확인해야 해요. 무엇이 있는지 모르면 무엇을 팔지, 무엇을 지킬지, 무엇으로 살아남을지 판단할 수 없습니다."
루카스는 말문이 막힌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에블린은 전생의 민원 데스크에서 수없이 연습한 차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책은 최후에 처분하는 자산입니다."
창밖에서 어린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달래는 목소리도 들렸다. 춥고 배고픈 영지의 저녁이었다.
루카스는 결국 허리춤의 열쇠 꾸러미를 풀었다.
"잠깐만이다. 쓰러질 것 같으면 바로 돌아온다."
"네."
"정말 약속해라."
"도서관 이용 시간은 관장 재량입니다."
"관장?"
에블린은 열쇠를 받아 들었다.
"임시로요."
해가 기울 무렵 에블린은 낡은 망토를 걸치고 저택 뒤편으로 향했다.
하르트 영지는 기억보다 더 가난했다. 마당의 우물가에는 빈 물동이가 늘어서 있었고 헛간 앞에는 부러진 쟁기가 기대어 있었다. 멀리 보이는 밭은 검게 얼어 있었다.
마르타가 랜턴을 들고 따라오며 연신 걱정했다.
"정말 들어가시게요? 예전부터 이상한 소리가 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정리 안 된 서가에서는 원래 이상한 소리가 납니다."
"책이 소리를 냅니까?"
"떨어지고 무너지고 벌레가 먹으면요."
"그런 소리가 아니었다는데요."
에블린은 대답 대신 앞을 보았다.
도서관은 잡초에 묻힌 회색 건물이었다. 문 위의 문장은 녹슬어 있었고 계단에는 눈과 흙이 엉겨 붙어 있었다. 창문은 모두 어두웠다.
누군가에게는 폐허였다.
그러나 에블린에게는 다르게 보였다.
분류되지 않은 자료의 산.
아직 버려지지 않은 가능성.
어쩌면 이 가문이 당장 팔아 치우려는 마지막 숨구멍.
그녀는 열쇠를 꽂았다. 자물쇠가 한 번 버티더니 거칠게 돌아갔다.
문이 열리자 먼지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마르타가 기침하며 뒤로 물러났다.
"아가씨, 이건 정말 사람이 있을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더 빨리 정리해야겠네요."
에블린은 랜턴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높은 서가가 어둠 속에 줄지어 서 있었다. 책들은 쓰러지고 삐뚤어지고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먼지는 두껍고 공기는 차가웠다.
그런데 이상했다.
방치된 건물이라기에는 책 냄새가 너무 선명했다. 썩은 종이 냄새가 아니라 막 펼친 고서의 마른 향이었다.
에블린은 가장 가까운 목록대 앞으로 걸어갔다. 그 위에는 아무 글자도 없는 검은 판이 박혀 있었다.
"목록함도 없고 분류표도 없고 서가 번호도 없다니."
그녀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이건 도서관이 아니라 재난 현장이네요."
손바닥이 목록대에 닿았다.
그 순간 빛이 켜졌다.
먼지가 공중에서 멈췄다. 서가 깊은 곳에서 낮은 종소리가 울렸다. 낡은 책등 위로 알아볼 수 없는 문자가 떠올랐다가 에블린이 읽을 수 있는 글자로 바뀌었다.
마르타가 뒤에서 작은 비명을 질렀다.
에블린은 손을 떼지 못했다.
검은 판 위에 은빛 문장이 새겨졌다.
[임시 관장 인식 완료.]
[하르트 고대 도서관의 정식 권한을 확인합니다.]
"관장?"
에블린의 목소리가 먼지 낀 홀 안에 울렸다.
어둠 속 가장 깊은 서가에서 책 한 권이 스스로 빠져나왔다. 표지는 낡았지만 금빛 문양이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책은 천천히 날아와 목록대 위에 내려앉았다.
표지의 문자가 바뀌었다.
《초급 관장 업무 규정 및 대출 권한 해설》
그리고 그 아래에 더 작은 글씨가 떠올랐다.
부록: 기근 영지 생존을 위한 토양 정화 입문.
에블린은 아주 천천히 웃었다.
"좋아요."
죽음보다 황당한 환생이었다. 빚더미 남작가에 병약한 몸, 닷새 치 보리와 얼어붙은 밭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책이 있었다.
책이 있고 목록이 있다면, 사서가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우선 장서 점검부터 시작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