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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해가는 영지의 도서관장이 되었습니다3화

망해가는 영지의 도서관장이 되었습니다

망해가는 영지의 도서관장이 되었습니다

3화: 흙은 아직 죽지 않았다

한스의 손끝에서 번진 녹색 빛은 얼음장 같은 흙 위를 아주 느리게 기어갔다.

그는 놀라 손을 떼려 했다. 에블린은 책장을 덮지 않도록 그의 손목 가까이에 손을 뻗었다. 닿지는 않았다. 대출자의 손을 대신 움직일 수 없다는 규정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책은 그대로 두세요. 지금 멈추면 어디가 막혔는지도 모른 채 끝납니다."

한스는 입술을 달싹였다.

"제 손에서 빛이 나는데요. 제가 이런 걸 해도 됩니까?"

"한스 씨가 밭을 살리려고 여기까지 왔잖아요. 책도 그걸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차가운 바람이 보리밭을 훑었다. 발목 높이로 쌓인 눈가루가 검은 흙 위에서 흩어졌다.

한스의 무릎이 땅에 닿아 있었다. 갈라진 손등과 손톱 밑의 흙이 어쩐지 책보다 더 오래된 글자처럼 보였다.

책장 위의 문장이 천천히 빛났다.

얼어붙은 흙은 죽은 흙이 아니다. 숨구멍을 잃은 흙이다.

그 아래에 새로운 문장이 나타났다.

낮은 곳의 물을 찾으라. 얼음 밑에서도 물은 길을 기억한다.

한스는 글자를 더듬어 읽은 뒤 밭을 둘러보았다. 처음에는 겁먹은 사람처럼 서 있던 그가 한 걸음씩 밭 안쪽으로 들어갔다.

"무슨 뜻입니까?"

에블린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한스 씨가 아는 말로 바꿔 보세요. 이 밭에서 물이 가장 먼저 고였던 곳은 어디죠?"

한스의 시선이 눈 덮인 밭을 가로질렀다. 그는 돌담 아래쪽을 가리켰다.

"저기입니다. 가을이면 늘 저기부터 질척거렸습니다. 배수구가 있던 자리인데 작년 홍수 뒤로 막혔지요. 흙이 얼고 나서는 손도 못 댔습니다."

루카스가 돌담 쪽을 보았다.

"배수구가 막힌 걸 왜 보고하지 않았나?"

한스는 고개를 숙였다.

"보고할 삽도 사람도 없었습니다. 영주님께서 모르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들 급한 일이 많았으니까요."

그 말에 루카스의 얼굴이 굳었다. 변명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밭 하나의 물길이 막힌 일은 겨울을 버티기도 어려운 영지에서 늘 뒤로 밀렸다.

에블린은 책을 한스가 보기 좋게 세워 주었다.

"지금 필요한 건 잘못을 찾는 일이 아니에요. 길을 찾는 일입니다."

한스가 다시 문장을 읽었다.

"손바닥을 대고 물의 냄새를 기억하라."

그는 돌담 근처의 눈을 걷어 냈다. 얼음 아래에 손바닥을 붙이자 미세한 빛이 손가락 사이로 스몄다. 한스의 눈이 조금씩 커졌다.

"여기입니다. 흙이 차갑기만 한 게 아닙니다. 밑에서 물이 밀리고 있어요."

마르타가 에블린의 옆에서 속삭였다.

"아가씨, 정말 들리십니까?"

"저는 모르겠어요. 한스 씨가 아는 거죠."

에블린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단호했다.

"그러니까 한스 씨가 이 책의 대출자여야 했고요."

한스는 잠시 책과 자기 손을 번갈아 보았다. 굶주림과 추위에 지쳐 있던 눈에 처음으로 망설임 아닌 집중이 깃들었다.

그는 돌담 아래를 짚었다.

"여길 파야 합니다. 배수구 입구가 돌 두 장 아래에 있을 겁니다."

"삽을 가져와."

루카스가 뒤에 서 있던 하인에게 말했다. 하지만 한스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제가 파겠습니다. 책이 제 손으로 길을 찾으라고 합니다."

에블린은 그 말에 책장을 살폈다. 글자 사이로 희미한 은빛 선이 떠 있었다.

대출자의 판단을 존중할 것. 타인의 강제적 개입은 해석을 흐린다.

"한스 씨가 먼저 삽날을 넣으세요."

에블린이 말했다.

"다른 분들은 파낸 흙을 옮기고 돌을 들어 주세요. 물길을 고르는 건 한스 씨가 합니다."

루카스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고는 외투의 단추를 풀었다.

"듣지 못했나? 한스가 지시한다. 움직여."

영지민들이 어색하게 서로를 보았다. 영주가 삽을 받아 드는 모습은 낯설었다. 루카스는 망설임 없이 얼어붙은 흙에 삽날을 내리쳤다.

쾅.

삽날이 얼음에 부딪혀 튕겼다. 손잡이를 쥔 루카스의 손이 저릿하게 흔들렸다.

"여긴 너무 단단합니다."

마르타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한스는 책을 읽으며 돌담 아래를 천천히 더듬었다. 빛은 그의 손이 닿는 자리에만 옅게 남았다.

"땅을 깨지 말고 틈을 찾으라네요. 물은 돌보다 약하지만 길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무릎을 꿇고 돌담 맨 아래의 작은 틈을 가리켰다.

"여기부터요. 큰 돌을 들면 안 됩니다. 이쪽 흙을 먼저 걷어 내야 해요."

루카스가 삽을 내려놓고 손으로 흙을 파기 시작했다. 하인이 말리려 하자 그가 짧게 말했다.

"내 손도 아직 쓸 만하다."

에블린은 마르타에게 책을 건넸다.

"바람을 막아 주세요. 젖으면 안 됩니다."

"아가씨는요?"

"저는 읽는 속도를 확인할게요. 한스 씨가 너무 급해지지 않게요."

한스는 책을 한 줄 읽고 삽을 한 번 움직였다. 전에는 밭일을 멀찍이서 지켜보던 몇몇 영지민도 흙을 퍼 나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한스의 숨이 거칠어졌다. 손끝의 녹색 빛도 처음보다 옅어졌다.

"쉬세요."

에블린이 말했다.

"아직 아닙니다. 물 냄새가 가까워졌습니다."

"대출은 경주가 아니에요. 책이 시키지 않은 일을 몸으로 밀어붙이면 다칩니다."

한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책장을 붙든 손이 떨렸다. 그가 가족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다는 건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루카스가 한스 옆에 쪼그려 앉았다.

"네가 쓰러지면 이 밭은 다시 네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물 한 모금 마시고 계속해."

한스가 고개를 들었다.

"영주님이 제 말을 믿으십니까?"

루카스는 손바닥의 흙을 털었다.

"네가 이 밭을 나보다 오래 알지. 오늘은 네가 이 밭의 주인이다."

한스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는 물통을 받아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책 앞에 섰다.

다음 문장은 전보다 짧았다.

막힌 물은 썩은 냄새로 자신을 알린다. 냄새를 두려워하지 말고 나갈 길을 열어라.

한스가 삽끝으로 얼음 아래의 검은 흙을 조심스럽게 걷어 냈다. 돌 하나가 드러났다. 그는 힘으로 들지 않고 옆의 흙을 더 파냈다.

마침내 돌이 조금 기울었다.

꾸르륵.

낮고 탁한 소리가 땅속에서 났다.

"모두 물러서세요."

에블린의 말이 끝나자 돌 아래에서 검은 물이 터져 나왔다. 진흙과 얼음 조각이 한꺼번에 쏟아지며 사람들의 신발을 적셨다.

매캐한 썩은 냄새가 밭에 퍼졌다.

"밭을 망쳤어."

누군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한스도 굳어 버렸다. 녹색 빛이 손끝에서 한순간 흔들렸다.

에블린은 책을 펼친 마르타에게 다가갔다.

"다음 줄을 보여 주세요."

새 문장이 나타나 있었다.

썩은 물을 내보내야 새 물이 들어온다. 뿌리를 뽑지 말고 손바닥으로 숨을 확인하라.

에블린은 한스에게 책을 보였다.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책이 시키는 대로 해 보세요."

한스는 천천히 진흙 속으로 손을 넣었다. 얼어붙었던 보리밭의 흙은 검고 차가웠다. 그가 뿌리 하나를 감싸자 손끝의 녹색 빛이 다시 살아났다.

빛은 뿌리를 태우지 않았다. 마른 뿌리의 표면을 따라 물기처럼 스며들었다.

한스가 숨을 들이켰다.

"살아 있습니다."

그는 손바닥을 더 깊이 눌렀다.

"뿌리가 안 끊어졌습니다. 얼어서 멈춘 것뿐입니다."

녹색 빛이 열려 버린 물길을 따라 가늘게 퍼졌다. 밭의 얼음 아래에서 작은 기포가 연달아 올라왔다. 검은 흙이 아주 느리게 숨을 쉬기 시작했다.

돌담 아래에 고여 있던 물은 맑아지지는 않았다. 다만 더 이상 밭을 짓누르지 않고 낮은 수로를 따라 흘렀다.

그리고 눈과 흙의 경계에서 보리뿌리 몇 가닥이 옅은 금빛을 띠며 몸을 일으켰다.

마르타가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세상에."

영지민들 사이에서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곧 어린아이를 안고 있던 여자가 눈가를 훔쳤다.

"저 밭에서 다시 곡식이 날 수 있겠네요."

에블린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땅이 숨을 되찾은 것뿐이에요. 곡식이 자라려면 계속 돌봐야 합니다. 물길도, 씨앗도, 한스 씨의 손도 필요해요."

잠깐의 침묵 뒤 한스가 책을 꼭 쥐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매일 읽고 매일 밭을 보겠습니다."

"좋아요. 하지만 혼자 하지 마세요."

에블린은 주변의 영지민을 둘러보았다.

"누군가는 수로를 살피고 누군가는 눈을 치워야 해요. 한스 씨가 판단하면 같이 움직여 주세요. 그리고 책은 한스 씨가 읽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둘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까지 기적을 멀찍이서 바라보던 얼굴들에 일이 생겼다.

루카스는 밭 가장자리에서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의 장화에는 검은 진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는 에블린에게 다가와 낮게 물었다.

"이 책이 밭을 살린 건가?"

에블린은 한스가 수로를 바라보는 모습을 보았다.

"책이 길을 알려 줬고 한스 씨가 찾았어요. 둘 중 하나만으로는 안 됐을 겁니다."

루카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도 알겠군."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는 해가 지고 있었다.

집무실 책상 위에는 헬레나 자작부인의 서신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붉은 인장은 어둠 속에서도 피처럼 선명했다.

루카스는 서신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사흘이다. 밭 하나가 숨을 쉬기 시작했다고 빚이 사라지지는 않아."

"알아요."

에블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도서관을 제대로 운영해야 해요. 누구에게 어떤 책이 필요한지 찾고 대출과 반납을 기록해야 해요. 책을 망가뜨리지 않게 해야 하고요."

루카스의 시선이 동생에게 머물렀다.

"그걸 네가 할 수 있겠어? 아직 열병에서 완전히 낫지도 않았는데."

"제가 혼자 밭을 살린 건 아니잖아요."

에블린은 웃지 않고 답했다.

"저는 사람과 책을 연결할 수 있어요. 나머지는 영지의 사람들이 해낼 겁니다."

루카스는 한동안 창밖을 보았다. 멀리 남쪽 보리밭 위로 희미한 녹색 빛이 남아 있었다. 기적이라 부르기에는 작았다. 하지만 희망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선명한 빛이었다.

그가 서랍을 열었다. 낡은 열쇠 꾸러미와 얇은 장부 한 권을 꺼냈다.

"구도서관 매각 이야기는 없던 일로 한다."

에블린이 눈을 크게 떴다.

"오라버니."

"내일부터 청소할 사람 둘을 보내겠다. 마르타가 출입 명단을 적는다. 너는 대출 장부를 만들어. 필요한 물건은 내게 말해."

루카스는 열쇠 꾸러미를 에블린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곳의 열쇠는 네가 맡아라. 하르트의 마지막 창고라면 영주가 아니라 관장이 지켜야겠지."

차가운 쇠가 손안에서 묵직했다.

전생의 유진은 수없이 많은 열쇠를 다뤘다. 자료실 열쇠, 보존 서고 열쇠, 반납함 열쇠. 하지만 누군가의 내일을 맡기는 열쇠는 처음이었다.

에블린은 열쇠를 꼭 쥐었다.

"대신 규칙은 지킬 거예요. 오라버니라도 대출 기한을 넘기면 봐드리지 않아요."

루카스가 피곤한 얼굴로 웃었다.

"그 규칙이라면 기꺼이 지키마."

그날 밤 에블린은 다시 구도서관으로 향했다.

목록대 위에는 한스의 대출증이 놓여 있었다. 은빛 글자 아래에 작은 줄이 하나 더 생겨 있었다.

[이용 기록: 첫 임시 대출 완료]

[반납 예정: 이틀 후]

에블린은 카드가 구겨지지 않았는지 확인한 뒤 조심스럽게 장부 첫 장을 폈다.

한스. 기근 영지 생존을 위한 토양 정화 입문. 남쪽 보리밭 토양 정화 실습.

그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비고. 물길 회복. 보리뿌리 생존 확인. 지속 관찰 필요.

펜 끝을 떼려는 순간, 먼 서가 한쪽에서 책등 하나가 희미하게 빛났다.

이번에는 제목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목록대의 빈 칸에 짧은 문장이 떠올랐다.

[다음 적합한 손을 찾으십시오.]

에블린은 새 장서로 곧장 가지 않았다.

"우선 반납부터입니다."

그녀는 한스의 대출증을 장부 옆에 놓고 도서관의 문을 잠갔다.

밖에서는 아직 겨울바람이 불고 있었다.

하지만 남쪽 밭의 흙은 더 이상 죽은 흙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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