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의 다정한 살인마

9화: 숲속의 사냥꾼
비가 갠 뒤의 숲길은 기이할 정도로 청량했다.
나뭇잎 끝에 맺힌 빗방울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였고 숲 깊은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에서는 젖은 흙내음과 함께 솔잎의 알싸한 향기가 은은하게 번졌다.
하지만 이 상쾌한 아침의 풍경도 은수에게는 오직 숨 막히는 지옥의 입구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은수는 산책을 출발하기 전, 주방 식탁 앞에 뻣뻣하게 앉아 있었다.
진우는 그녀를 위해 아침 일찍 마당 텃밭에서 따온 신선한 토마토를 깨끗이 씻어 믹서기에 갈아 붉은 토마토 주스를 만들어 대접했다.
믹서기가 위잉 소리를 내며 토마토의 육질을 잘게 으깨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고요한 주방을 거칠게 때렸다.
은수는 유리잔에 가득 찬 핏빛처럼 붉은 주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은수씨, 얼른 마셔요. 밤새 작업을 많이 하셨으니 라이코펜이 풍부한 토마토가 피로 회복에 도움이 될 겁니다. 설탕은 넣지 않고 꿀만 아주 조금 가미했습니다.”
진우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하지만 은수의 머릿속에서는 '여기에 혹시 쥐약이나 마취제가 든 건 아닐까? 나를 잠재우고 몽타주 기사를 본 대가를 치르게 하려는 건 아닐까?' 하는 음산한 상상이 머물렀다.
은수는 마른침을 삼키며 주스를 억지로 들이켰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걸쭉한 토마토 즙이 마치 비릿한 선혈처럼 느껴져 위장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진우는 은수가 컵을 비우자 만족스럽게 웃으며 서랍에서 탄력 밴드로 된 손목 아대를 꺼내 들었다.
“밤새 작업하시느라 손목을 많이 쓰셨으니 산책 나가기 전에 이걸 좀 차는 게 좋겠습니다. 손목을 단단히 지지해 줘야 덧나지 않거든요. 제가 직접 채워드리겠습니다.”
진우는 은수의 가녀린 왼손목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의 손길은 피아니스트처럼 섬세하고 유연했으나 벨크로 끈을 잡아당기는 압력은 마치 쇠 올가미처럼 강력했다.
아대를 손목에 대고 벨크로 끈을 단단히 당겨 고정할 때마다 찌지직 소리가 고요한 방 안을 채웠다.
진우가 끈을 힘껏 당기는 순간, 은수의 손목에 으스러질 듯한 압박감이 전해졌다.
그의 다정한 손길 뒤에 감춰진 무시무시한 물리적 힘의 지배력.
은수는 숨이 멎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소리를 지르지 못하고 입술만 깨물었다.
“자, 이제 출발할까요? 보조를 맞춰 드릴 테니 천천히 걸어요.”
오솔길을 따라 숲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내내, 진우는 아주 정중하게 은수의 옆을 지켰다.
숲길의 크고 작은 돌부리나 젖은 진흙밭이 나타날 때마다 그는 먼저 앞장서서 나뭇가지를 주워 치웠다.
은수는 침묵을 견디다 못해, 과거의 이야기를 불쑥 꺼내어 그와의 심리적 거리를 확보해 보려 했다.
“저는 어릴 때 부모님이 일찍 사고로 돌아가셔서, 친척 집을 전전하며 눈칫밥을 먹고 자랐어요.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는다는 기분 속에서, 오직 종이 위에 그리는 그림만이 제 유일한 피난처였죠.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이 외딴 집을 계약해 스스로를 가둔 거예요. 타인의 눈길과 관계는 제게 오직 가시덤불 같았으니까요.”
은수의 덤덤한 고백에 진우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큰 손이 은수의 어깨 위에 가볍게 얹혔다.
“외로웠겠네요, 은수씨. 하지만 이제는 혼자가 아닙니다. 제가 옆에서 은수씨의 가시덤불을 다 잘라내고 끝까지 지켜드릴 테니까요. 제 머릿속은 안개뿐이지만 은수씨가 겪은 그 아픔을 지우는 바람이 되어 드리고 싶습니다.”
진우의 대사는 한없이 따뜻하고 감미로웠다.
하지만 은수는 온몸이 오그라드는 기이한 전율을 느꼈다.
나를 죽이려 기획한 연쇄살인마가 나를 끝까지 지켜주겠다고 맹세하다니.
이 모순되고 기괴한 다정함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독약이었다.
“숲은 참 아름답지만 동시에 아주 무자비하고 차가운 곳입니다.”
진우가 흐려지는 안개 낀 소나무 숲을 바라보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약한 나무는 햇빛을 받지 못해 스스로 말라 죽고 강한 포식자만이 자신의 영역을 완벽하게 지배하죠. 인간 사회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약자가 도망치려 해봤자, 결국 포식자의 사냥 영역 안에서 맴돌 뿐이니까요. 자연의 법칙은 참으로 단순하고도 잔인합니다. 은수씨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진우가 넌지시 던진 자연관은 은수의 심장을 쥐어짜는 듯했다.
그것은 은수가 이 붉은 벽돌집이라는 진우의 지배 영역을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암시하는, 은밀하고도 살벌한 경고였다.
“아…… 네, 그런 것 같네요.”
은수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깊숙이 찔러 넣은 채 고개를 숙였다.
산책로는 숲이 깊어질수록 황량하리만치 고요해졌다.
은수는 혹시라도 마주칠 등산객이나 약초꾼을 기대했지만 지나가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고립감은 점점 더 무거운 사슬이 되어 은수의 발목을 감아쥐었다.
끼이이이익—! 깽!
갑자기 숲속 한구석에서 날카롭고 처절한 짐승의 비명이 정적을 찢었다.
은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걸음을 멈추었다.
고통에 겨운 비명 소리는 덤불 속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슨 소리죠?”
은수가 숨을 죽이며 물었다.
“들개나 고양이가 덫에 걸린 것 같습니다. 이 근처 농가에서 멧돼지나 유해조수 잡으려고 불법 올가미를 쳐두는 경우가 있거든요.”
진우가 침착하게 대답하며 덤불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은수 역시 묘한 이끌림에 그의 뒤를 따랐다.
덤불을 헤치고 들어가자, 낡은 철사 올가미에 오른쪽 다리가 깊숙이 감긴 채 피를 흘리고 있는 들개 한 마리가 보였다.
들개는 버둥거릴 때마다 철사가 뼈까지 파고드는지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고 상처 부위에서는 붉은 선혈이 뿜어져 나와 주변의 젖은 잎사귀들을 피로 물들이고 있었다.
들개가 갇혀 있던 장소는 가시덤불이 우거진 습한 골짜기 부근이었다.
은수는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덤불 틈으로 손을 뻗었다.
철사 올가미를 손가락으로 풀어보려 했으나, 팽팽하게 당겨진 철사는 은수의 힘으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날카로운 가시덤불에 긁히고 철사에 짓눌려 은수의 엄지손톱 끝이 젖혀지며 붉은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앗!”
은수가 신음을 흘렸다.
진우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끔찍할 정도로 건조했다.
“비켜서세요, 은수씨. 쓸데없는 피를 흘리는 건 아주 비효율적인 일입니다.”
진우의 목소리는 낮고 평온했다.
“너무 시끄럽네요. 쓸모없는 신음소리는 그치게 만드는 게 맞습니다. 그게 이 비참한 짐승을 정화하는 유일한 방법이니까요.”
진우가 들개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주저 없이 손을 뻗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들개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스윽.
그의 손길은 들개의 날카로운 송곳니를 완벽하게 회피하며 정확한 목뼈의 급소를 짚었다.
들개가 본능적인 공포에 질려 버둥거렸지만 진우의 단단한 전완근에 돋아난 굵은 힘줄은 털끝만큼의 흔들림도 없었다.
진우는 한 손으로 들개의 목을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 동물의 머리를 잡았다.
그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단단하게 힘을 받으며 꺾이려 했다.
단 한 번의 비틀림으로 들개의 경추를 부러뜨려 즉사시키려는, 군더더기 없는 완벽하고 정교한 사냥꾼의 동작이었다.
“진우 씨! 안 돼요! 멈춰요!”
은수는 본능적인 공포에 질려 미친 듯이 소리쳤다.
그녀의 비명이 울려 퍼지자, 진우의 몸이 마치 강한 전기충격을 받은 듯 눈에 띄게 굳었다.
그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진우는 머리를 움켜쥐며 들개의 목에서 손을 떼고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아윽……!”
그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으며 이마에 굵은 힘줄을 올렸다.
극심한 편두통이 찾아온 듯, 그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의 뇌리 속에 붉은 비명과 정체불명의 흐릿한 실루엣들이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진우 씨? 괜찮아요?”
은수가 두려움 반, 걱정 반으로 물었다.
진우는 몇 초간 거칠게 숨을 몰아쉬더니, 서서히 머리에서 손을 내렸다.
진우는 은수의 겉옷 주머니에 꽂혀 있던 스마트폰을 조심스럽게 가로챘다.
“제가 통화하겠습니다. 은수씨는 다치셨으니까요.”
진우는 태연하게 은수의 폰 잠금을 풀고 인근 유기동물 구조협회에 전화를 걸었다.
그는 보고서를 읽듯 조리 있고 정확한 억양으로 들개의 상처 상태와 이 야산 오솔길의 GPS 좌표를 읊조렸다.
그의 침착하고 정갈한 목소리는 방금 전 들개의 목을 부러뜨리려던 악마의 그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진우가 통화를 마친 직후, 다시 머리를 감싸 쥐고 흙바닥에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편두통 발작이 다시 찾아온 듯했다.
그 순간, 멀리 산 밑에서 요란한 구조 차량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은수는 지금이 기회라 생각하고 구조 대원들이 있는 방향을 향해 발걸음을 다급히 떼려 했다.
하지만 주저앉아 있던 진우가 용수철처럼 손을 뻗어 은수의 바지 뒷자락을 낚아챘다.
스왁.
“가지 마세요, 은수씨…… 제발 저를 혼자 두지 마세요.”
진우는 아픈 와중에도 끔찍한 괴력으로 은수의 옷자락을 쥐고 흔들었다.
은수는 그 힘에 이끌려 달아나지 못하고 제자리에 멈춰 서야 했다.
이내 구조 대원들의 인기척이 가까워지자, 진우는 즉시 정상적인 눈빛으로 돌아와 태연하게 옷의 먼지를 털어냈다.
이윽고 구조 대원들이 숲길을 헤쳐 올라왔다.
대원 중 한 명이 땀을 닦으며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아유, 부부끼리 산책 나오셨다가 고생하셨네요. 요즘 이 근방에 불법 덫이 많아서 골치 아픕니다. 다친 데는 없으신가요?”
진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싹싹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 저희는 괜찮습니다만 제 아내가 들개를 구하려다 손가락 끝을 좀 다쳤습니다. 어서 내려가서 치료해야겠어요. 들개는 저희 걱정 마시고 잘 보살펴 주십시오.”
“아, 예, 알겠습니다. 이건 명백한 불법 덫이라서 저희가 수습해서 경찰에 신고해 두겠습니다. 조심히 내려가세요.”
“네, 수고해 주십시오.”
구조 대원들이 들개를 수습해 내려갔다.
진우는 대원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배웅했다.
은수는 방금 전까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붙잡던 남자가 눈 깜짝할 사이에 철저하게 가면을 바꿔 쓰는 모습에 척추뼈가 녹아내리는 공포를 느꼈다.
구조 대원들이 몰고 온 차량은 숲길 아래 갈림길에 세워져 있었고 휴대폰 화면은 젖은 손끝 때문에 터치가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진우는 은수의 손목을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계속 그녀 곁에 붙어 있었다. 지금 소리쳐 도움을 청했다가 실패한다면, 이 외진 숲길에서 도망칠 곳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진우의 편두통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몇 번이고 비틀거렸다.
은수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묵직한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치고 그를 부축해야 했다.
진우의 뜨겁고 땀에 젖은 몸이 은수의 체중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은수의 머릿속에 위험한 충동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이야. 이 비탈길 아래로 그를 밀쳐버린다면? 아니면 길가에 널린 저 뾰족한 돌멩이를 쥐고 그의 뒤통수를 쳐버린다면?’
하지만 은수는 자신의 손목을 지탱하는 그 튼튼한 아대의 존재감을 느꼈다.
만약 실패한다면? 그가 깨어나 반격한다면?
은수는 온몸에 돋는 소름과 함께 자신의 살인 충동에 지독한 혐오와 공포를 느끼며 충동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복귀한 이후, 진우는 은수를 식탁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구급상자를 가져와 은수의 다친 엄지손가락을 조심스럽게 마주 잡았다.
진우는 구급상자에서 노란 소독액이 든 약병을 열고 하얀 면봉을 꺼냈다.
면봉의 하얀 솜끝이 붉은 소독액을 스르르 빨아들이는 모습을 바라보며 은수의 뇌리 속에는 연쇄살인의 붉은 핏물이 연상되었다.
진우는 붉게 피가 스며 나오는 은수의 손톱 끝을 바라보더니, 슬그머니 자신의 입술을 은수의 손가락 끝에 가져다 대었다.
스읍.
진우가 은수의 손가락 끝의 선혈을 조심스럽게 빨아내며 지혈했다.
그의 뜨겁고 부드러운 입술 감각과, 그 너머에 숨겨진 잔혹한 짐승의 잇새가 은수의 얇은 살결에 닿을 때마다 은수는 극도의 관능과 기괴한 공포를 동시에 느끼며 뻣뻣하게 굳었다.
진우는 지혈을 마친 후 소독약을 적신 솜으로 은수의 다친 손가락을 꼼꼼히 소독했다.
“피는…… 굳기 전에 닦아내야 흔적이 남지 않습니다. 은수씨의 손에 흉터가 생기는 것은 원치 않아요. 피비린내 나는 흔적은 아주 조심해서 깨끗하게 지워버려야죠.”
진우는 밴드를 붙인 뒤 손을 뻗어 은수의 젖은 이마를 짚었다.
“공포는 은수씨의 적입니다. 은수씨, 식은땀을 많이 흘리시네요. 밤샘 작업도 몸을 해치지만 숲길을 무리하게 걸으신 탓입니다. 열은 없지만 안정을 취하는 게 좋겠어요. 방으로 들어가 푹 쉬세요. 오늘은 은수씨만을 위한 시간을 가지셨으면 합니다.”
그의 다정하고 나긋나긋한 태도와, 그 '정화' 강박이 은수의 머릿속에 연쇄살인의 참혹한 수법들과 겹치며 은수의 정신을 통째로 뒤흔들었다.
은수는 방으로 돌아와 잠긴 미닫이문 뒤에 주저앉았다.
자신의 다친 엄지손가락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진우가 꼼꼼히 감아준 하얀 밴드는 붉은 약품 냄새를 풍기고 있었고 손목에 감긴 아대는 여전히 쇠사슬처럼 무거웠다.
그가 입술로 지혈했던 엄지손가락 끝의 감각이 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과 뒤섞였다.
안개 낀 소나무 숲에서 본 그의 정교한 사냥꾼의 동작과, 마당에서 쌓아 올렸던 그 반듯한 직사각형 흙더미.
그 모든 것들이 강태오라는 존재의 본질이었다.
은수는 이 어두운 방 안에서 스스로의 숨소리를 죽이며 그의 다정한 미소 이면에 깃든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임을 깨달았다.
은수는 이제 자신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진우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기억해 내고 고백하게 만드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진짜 강태오라면, 왜 이런 일들을 벌이고 있었는지 그 진실을 끄집어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집은 은수의 완전한 묘지가 될 터였다.
살기 위해서는 더 대담하고 치밀해져야만 했다.
은수는 방 안의 어둠 속에서 조용히 몸을 떨었다.
어둠은 걷혔지만 은수의 영혼은 가장 깊고 차가운 심연에 잠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