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의 다정한 살인마

10화: 안개 너머의 붉은 빗소리
그날 숲속에서의 산책 이후, 진우의 편두통 발작은 기하급수적으로 빈번해졌고 그 강도 또한 끔찍할 정도로 거세졌다.
실내 공기는 장마철이 다가오듯 한층 눅눅하고 무거워졌고 붉은 벽돌집 구석구석에는 스산한 기운이 맴돌았다.
은수는 자신의 작업실 책상 앞에 앉아 태블릿 펜을 쥐고 있었지만 귀는 온통 벽 너머 안방 쪽을 향해 열려 있었다.
안방에서는 진우가 끙끙 앓는 신음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그 둔탁하고 억눌린 고통의 신음 소리가 울릴 때마다 은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태블릿 펜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진우는 하루의 절반 이상을 안방에서 혼자 머리를 감싸 쥔 채 신음하며 지냈다.
땀으로 흠뻑 젖은 머리칼을 쥔 채 방바닥을 뒹굴기 일쑤였다.
은수는 진우가 가위에 눌려 끙끙거리는 틈을 타, 아주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로 안방 문턱을 향해 다가갔다.
삐걱거리는 바닥의 소리를 줄이기 위해 숨을 죽였다.
살며시 미닫이문을 열고 들여다본 진우의 상태는 처참했다.
이불은 침대 아래로 절반쯤 흘러내려 있었고 낡은 맨투맨 티셔츠는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그의 탄탄한 어깨와 등 근육에 척 달라붙어 있었다.
그의 목덜미와 턱선 라인을 따라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고 가끔씩 근육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렸다.
은수는 떨리는 손으로 물수건을 쥐고 그의 젖은 이마를 닦아주려 손을 뻗었다가 찰나의 순간 멈추었다.
‘내가 왜 이 살인마를 보살펴주고 있지? 이 자는 나를 죽이려 찾아왔던 악마인데.’
연민과 경계심이 손끝에서 충돌하며 은수를 주저앉혔다.
하지만 진우는 은수의 멈칫함을 눈치채지 못한 채, 가위에 눌려 헐떡이며 정체불명의 헛소리들을 뱉어냈다.
“붉은 비가…… 내려…… 비명이 들려…… 멈춰…… 너는 안 돼…… 혜원아…… 제발 눈을 떠봐…… 어서 도망쳐…….”
혜원.
은수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굳었다.
혜원이라는 낯선 여자의 이름.
은수는 안방 문 앞에 주저앉아, 책상 서랍에서 꺼내 온 자신의 작업용 노트를 펼쳤다.
그리고 진우가 뱉어내는 헛소리의 조각들을 하나씩 필사하듯 꼼꼼하게 적어 내려갔다.
볼펜 끝이 종이를 긁는 사각사각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날카롭게 베어 냈다.
[붉은 비. 비명 소리. 칼. 멈춰. 혜원. 도망쳐.]
진우가 깊은 잠에 빠진 것을 확인한 은수는 서둘러 자기 방으로 돌아와 침대 밑에서 다시 노트북을 꺼내 켰다.
포털 검색창에 '적색 야경 연쇄살인 안혜원'을 입력했다.
수십 개의 기사가 떴다.
3번째 피해자 안혜원.
그녀는 29세의 학원 강사였으며 비가 내리던 밤 단독주택 2층 침실에서 예리한 경동맥 자상으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당시 기사에는 그녀의 몽타주와 함께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이 더 적혀 있었다.
"피해자가 평소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네 번째 손가락에 끼고 다녔던 이니셜 각인 은반지가 시신에서 사라진 상태입니다. 범인이 전리품으로 탈취해 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은반지.
은수는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치는 것을 느끼며 노트북을 덮었다.
그리고 방 한쪽에 놓인 무거운 아크릴 물감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미술 도구와 스케치북들을 전부 끄집어낸 뒤, 맨 바닥에 숨겨두었던 강태오의 피 묻은 가죽 지갑을 꺼냈다.
떨리는 손으로 지갑을 열고 동전 지퍼 주머니의 안쪽 깊숙이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사각.
손끝에 닿은 얇고 딱딱한 금속의 둥근 질감.
은수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끄집어냈다.
그것은 낡고 빛바랜 은반지였다.
반지의 표면에는 옅은 갈색 핏자국이 점처럼 묻어 굳어 있었다.
은수는 반지를 형광등 불빛에 비추어 안쪽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반지 안쪽에는 미세하게 이니셜이 각인되어 있었다.
[H.W to ...]
혜원의 이니셜이 새겨진 반지.
안혜원의 이니셜인 H.W가 확실했다.
이것은 진우, 아니 강태오가 살해한 피해자로부터 강탈해 간 연쇄살인의 전리품처럼 보였다.
은수는 반지를 쥔 손가락 끝에서부터 벼락을 맞은 듯한 공포가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그것을 침대 위로 던져 버렸다.
그의 존재 자체가 주는 기괴한 위험성에 숨이 막혔다.
은수는 떨리는 손으로 반지를 다시 지갑 속에 넣고 상자 맨 아래에 숨겼다.
오후가 되자, 밤새 그쳤던 비가 다시 요란하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지붕을 때리는 빗줄기는 한층 더 굵어졌고 거친 천둥소리가 집 전체를 주기적으로 거칠게 진동시켰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진우의 발작은 최고조에 달했다.
콰르릉—!
천둥소리와 함께 안방 문이 거칠게 열렸다.
진우가 이마에 굵은 힘줄을 잔뜩 올린 채 관자놀이를 움켜쥐고 거실 바닥으로 비틀거리며 나왔다.
그의 창백한 피부는 거실의 희미한 전등 불빛 아래에서 거의 푸른빛을 띠고 있었고 굵은 땀방울이 그의 수려한 얼굴을 타고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아윽…… 머리가…… 머리가 쪼개질 것 같습니다, 은수 씨…….”
진우는 바닥을 손톱으로 긁으며 신음했다.
거실 바닥에 손가락 끝이 긁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스산하게 울렸다.
은수는 냉장고에서 꺼낸 차가운 물컵을 들고 떨리는 발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진우 씨, 진정해요. 약을 먹어야 해요. 여기 물 마셔요.”
하지만 진우는 은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듯했다.
그는 은수의 옷자락을 미친 듯이 움켜잡아 당겼다.
스왁.
그의 뜨거운 손아귀가 은수의 치맛자락을 쥐자, 은수는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열기와 땀 냄새에 짓눌렸다.
진우의 눈동자가 위로 풀리며 기괴한 환각 속을 헤매는 듯한 텅 빈 눈빛으로 허공을 째려보았다.
“보여요…… 붉은 피가 비처럼 내리고 있어요. 내 눈앞에…… 한 여자가 쓰러져 있고 내 손에는 날카롭게 날이 선 칼이 들려 있어요.”
진우의 갈라진 목소리가 거실의 빗소리 사이로 흘러나왔다.
은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그의 고백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피를 흘리고 있었어요. 목에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어요. 나는 그걸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어요. 그리고…… 닦아내야 했어요. 지우지 않으면, 현장을 완벽하게 청소하지 않으면 그 괴물이 나를 잡아먹을 테니까요. 가구들을 대칭으로 맞추고 물건을 정돈하고 흔적을 지워야 해…… 깨끗하게 정화해야 해…….”
진우는 허공을 향해 손을 허우적거리며 마치 보이지 않는 피 묻은 바닥을 닦아내는 듯한 강박적인 손놀림을 보였다.
그것은 강태오의 살인 행위에 대한 명백한 자백이자, 기억의 파편이 맞춰지는 기괴한 순간이었다.
은수의 심장은 터져나갈 것처럼 뛰었고 온몸의 핏기가 가셨다.
이 남자는 살인마였다.
사람을 죽이고 그 피를 닦아내는 것에 지독한 강박을 품고 있는 괴물.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진우의 환각 고백은 전혀 다른 어조로 변했다.
“아니야…… 내가 죽인 게 아니야. 나는…… 살리려 했어. 제발 눈을 떠봐…… 제발…… 혜원아…….”
진우가 갑자기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며 사시나무 떨리듯 떨었다.
그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내가…… 내가 그 괴물인가요, 은수 씨? 내가 저 뉴스에 나오는 수배범 강태오인 겁니까? 내가 사람을 죽인 겁니까?”
진우는 은수를 품에 거칠게 끌어안았다.
그의 단단하고 묵직한 가슴이 은수의 얼굴을 내리눌렀고 그의 가쁜 숨소리가 은수의 귓가에 울렸다.
“나…… 나 너무 무서워요. 내 손에 묻은 이 보이지 않는 핏자국이 지워지지 않아요. 은수 씨, 제발 아니라고 말해줘요. 나 그런 무서운 사람 아니라고…… 은수 씨 옆에 있는 다정한 진우일 뿐이라고 말해줘요, 제발…….”
진우는 은수의 품에 얼굴을 묻고 어린아이처럼 꺼느끼며 오열했다.
그의 넓은 어깨가 눈물겨운 박자로 흐느끼며 아래위로 요동쳤다.
지독한 증오와 공포 뒤에 찾아온 기이한 동정.
은수는 그의 젖은 등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내 은수의 작은 품 안으로 진우의 맨투맨 티셔츠에서 나는 뜨거운 온기와 그의 머리카락에서 풍기는 은은한 샴푸 향이 섞여 들었다.
은수는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그의 단단한 등을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손끝에 닿는 그의 단단한 뼈마디와 등 근육의 수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진우 씨…… 일단 안정을 취해요. 무리해서 생각하지 마세요. 괜찮을 거예요.”
은수의 나지막한 어조에는 가벼운 물기가 서려 있었다.
한참을 울부짖던 진우는 피로가 극에 달했는지 은수의 어깨에 기댄 채 서서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은수는 끙끙거리며 그의 거대한 몸뚱이를 소파 위로 눕혔다.
그의 땀에 젖은 티셔츠를 벗겨주려다, 은수는 그의 옆구리에 남은 칼자국 흉터를 빤히 보게 되었다.
날카로운 칼날에 베인 그 자국은 흉측하게 비뚤어져 굳어 있었고 그 상처 주변의 살결은 붉은 발적으로 덮여 있었다.
은수는 그 흉터를 매만지며 이 상처야말로 그가 겪었던 그 빗속의 사투의 증거임을 깨달았다.
진우가 거실 바닥에 뒹굴며 묻힌 진흙과 다친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핏자국들이 은수의 눈에 들어왔다.
은수는 다용도실에서 젖은 걸레를 가져와 거실 바닥을 조용히 닦아내기 시작했다.
무릎을 꿇고 앉아 바닥의 얼룩을 문질러 지우며 은수는 기묘한 전율을 느꼈다.
‘나 또한 진우처럼 바닥을 기어 다니며 피를 닦아내고 있구나. 나도 모르게 그 연쇄살인마의 정화 의식을 닮아가고 있단 말인가…….’
소름 끼치는 동질감에 손등에 닭살이 돋았다.
은수는 바닥 정리를 마친 뒤, 잠든 진우의 숨소리를 들으며 방 안의 스마트폰을 가져왔다.
그의 오른쪽 검지와 중지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펼쳐보았다.
손바닥에는 굳은살과 마찰의 상처들이 선명했다.
은수는 스마트폰 카메라를 켜고 무음 셔터 기능을 확인한 후, 진우의 지문을 초근접 매크로 촬영하기 시작했다.
그때 진우의 손가락이 순간적으로 움찔하더니, 은수의 손목을 확 움켜잡았다.
턱!
은수는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에 눈을 부릅떴다.
진우는 손목을 쥔 채 놔주지 않았고 은수는 스마트폰 카메라 렌즈가 그의 뺨에 닿을 듯한 좁은 거리에서 비명을 억눌러야 했다.
하지만 진우는 눈을 뜨지 않은 채, 가위에 눌린 듯 잠꼬대를 하며 은수의 손목을 자신의 차가운 뺨에 갖다 대며 부볐다.
“가지 마세요…… 내 곁에 있어줘요, 은수 씨…….”
그의 차갑고도 슬픈 숨결이 은수의 손등을 적셨다.
은수는 얼어붙을 듯 긴장한 채 겨우 손목을 빼내고 촬영을 마무리했다.
은수는 방으로 돌아와 문을 잠그고 혜진의 메신저 창을 열었다.
그리고 지문 사진들과 강태오라는 이름의 메모 사진을 전송하려 전송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화면 상단에 붉은색 경고 표시가 떴다.
[전송 실패. 네트워크 연결 상태를 확인해 주십시오.]
은수는 자신의 Wi-Fi 설정 창을 켰다.
공유기 접속용 주소인 '192.168.0.1'을 브라우저에 입력해 보았으나, 페이지 관리자 접속 비밀번호가 은수가 기존에 사용하던 비밀번호 대신 모르는 16자리의 난수로 변경되어 차단되어 있었다.
접속 기기 목록에는 은수가 모르는 낯선 단말 이름 하나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접속 시간은 어젯밤 폭우가 가장 거셌던 무렵으로 찍혀 있었다.
데이터 송출 자체가 누군가에 의해 통제된 상태였다.
이윽고 한 시간쯤 지나자 진우가 가볍게 기침을 하며 깨어났다.
은수는 주방에서 끓인 따뜻한 꿀물과 진통제를 들고 그의 방으로 향했다.
진우는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댄 채 초점 없는 눈으로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은수가 다가가 꿀물 잔을 내밀자, 진우는 놀라며 얼른 잔을 받아 들었다.
“은수 씨…… 미안합니다. 제가 또 은수 씨에게 흉하고 무서운 헛소리를 늘어놓은 것 같네요. 머릿속의 안개가 아주 잠깐 걷힐 때마다, 제 영혼이 날카로운 칼끝에 찢겨 나가는 아픔을 느낍니다. 혹시 내가…… 내가 저 무서운 용의자 강태오일까 봐, 그래서 은수 씨를 다치게 만들까 봐…… 그게 가장 두렵습니다.”
진우는 잔을 쥔 채 은수의 밴드가 감긴 엄지손가락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쓸쓸하게 읊조렸다.
“상처는 제가 받았는데 왜 은수 씨의 손가락이 이렇게 더 깊게 찢어졌습니까. 제 손목 아대를 차고도 왜 다치셨습니까. 다음부턴…… 절대로 다치지 마세요. 제 곁에 계시는 동안엔 제가 다 닦아낼 테니까요.”
그의 나지막하고 집요한 목소리에는 서늘하면서도 지독한 헌신이 깃들어 있었다.
은수는 그의 다정한 눈빛 이면에 깃든 차갑고 날카로운 칼날을 떠올리며 억지 미소를 지어 보이고 안방을 빠져나왔다.
노트북의 네트워크 차단, 스마트폰의 검열, 그리고 물증인 안혜원의 은반지.
은수는 방으로 돌아와 잠긴 미닫이문 뒤에 주저앉았다. 진우가 꼼꼼히 감아준 하얀 밴드는 붉은 약품 냄새를 풍기고 있었고 손목에 감긴 아대는 여전히 쇠사슬처럼 무거웠다. 은수는 아대의 지지대가 피부에 남겨놓은 붉은 압박 자국을 문지르며 욱신거리는 고통을 느꼈다.
비 내리는 붉은 벽돌집은 밤의 어둠 속에서 마치 외딴 섬처럼 외롭게 고립되어 있었다.
은수는 아크릴 물감 상자를 바라보았다.
그 상자 속에 잠든 피해자의 은반지와 신분증.
그것들은 은수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이 동거는 절대로 평화롭게 끝날 수 없다는 것을.
은수는 다시 태블릿 펜을 쥐었다.
그림 속의 소년은 이제 늑대에게서 달아나는 것을 멈추고 늑대의 목덜미를 향해 똑바로 서서 째려보고 있었다.
소년이 숲에서 살아서 나가기 위해서는 늑대의 눈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기회를 잡아야 하듯이, 은수 또한 진우의 머릿속 안개를 강제로라도 걷어내야만 했다.
그가 진짜 살인마인지, 아니면 다른 진실이 숨어 있는지, 그 비밀의 껍질을 벗겨내는 사투는 이제 오롯이 은수 자신의 몫이었다.
창밖에는 거센 비가 지붕을 때리고 있었고 은수는 눈을 감으며 자신의 나약한 연민을 무섭게 다잡았다.
내 집의 다정한 살인마.
그와의 동거는 이제 가장 치열한 심리적 전쟁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