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의 다정한 살인마

6화: 안감 속의 진실
비가 갠 뒤의 한낮은 기이할 정도로 평화로웠다. 마당의 잔디는 진우의 삽질 아래 고르게 정돈되고 있었고 정원의 흙더미를 뒤엎는 서걱거리는 소리가 거실 창문을 넘어 은수의 귀에 단조롭고 스산하게 스며들었다.
은수는 서랍장 거울 뒤로 몸을 숨긴 채, 마당에서 일하고 있는 진우의 등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는 아버지가 입던 낡은 회색 맨투맨 티셔츠를 입고 땀방울을 흘리며 정원 한구석에 깊은 구덩이를 파고 있었다. 무엇을 묻으려는 걸까, 아니면 꽃을 심으려는 걸까.
그의 다부진 어깨와 거침없는 삽질은 그가 육체적으로 매우 강인하며 숙련된 상태임을 보여주었다. 은수의 눈을 잡아끈 것은 흙을 퍼내어 쌓아 올리는 진우의 기묘한 방식이었다.
그는 파낸 흙을 아무렇게나 흩뜨려놓지 않고 구덩이 옆에 정확한 직사각형 모양으로 반듯하게 쌓아 올리고 있었다. 그 삽날의 각도와 흙더미의 균형마저도 완벽한 규칙을 그리고 있었다.
문득 은수는 자기가 그리고 있는 동화 삽화 속의 늑대를 떠올렸다. 그 그림 속의 늑대는 어둠 속에서 소년을 지켜주는 따뜻한 길잡이였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그림 속의 판타지가 아니었다.
그는 다정한 겉모습 이면에 날카로운 칼날을 숨겨두고 언제든 먹잇감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수 있는 진짜 야수였다.
저 등이 돌아보는 순간, 저 다정한 미소가 사라지는 순간, 자신은 순식간에 저 삽자루 아래 제압당해 차가운 정원 흙 속에 파묻힐 터였다.
은수는 이 지옥 같은 은신처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확실한 단서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경찰에 신고하더라도 몽타주가 닮았다는 심증만으로는 즉각적인 출동이나 보호를 받기 어려웠다.
더군다나 도로 복구가 덜 된 이 외진 곳에서 어설프게 경찰을 불렀다가 진우가 먼저 눈치를 채면 은수의 목숨은 그 자리에서 끝장날 것이 뻔했다. 그의 진짜 이름이 적힌 신분증이나, 그의 과거를 입증할 명백한 증거물이 필요했다.
은수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단 하나, 그가 첫날 밤 입고 왔던 그 젖은 옷가지들이었다.
진우가 마당에서 일을 멈추지 않는 지금이 유일한 기회였다. 은수는 침을 꿀꺽 삼키고 거실을 가로질러 다용도실로 향했다.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의 소리를 줄이기 위해 뒤꿈치를 들고 소리 없이 걸었다. 주방 앞을 지나갈 때, 조리대 위에 놓인 대구탕 냄비와 칼꽂이의 칼날들이 은수의 신경을 날카롭게 자극했다.
은수의 목덜미에 차가운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은수는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차가운 쇠 문고리를 돌렸다.
스으으…….
문이 열리며 다용도실의 서늘하고 습한 공기가 훅 끼쳐왔다. 그곳에는 첫날밤 은수가 대충 빨아서 건조대 옆 옷걸이에 걸어둔 진우의 짙은 남색 캐시미어 코트가 걸려 있었다.
피와 진흙은 물로 대충 씻겨 나갔지만 코트 원단 깊숙이 스며든 특유의 비릿하고 무거운 철분 냄새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상태였다. 은수는 코트의 두꺼운 원단을 응시하며 가슴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은수는 세탁기 위에 놓여 있던 녹슨 원예용 가위를 쥐었다. 그리고 코트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그의 코트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 주머니를 샅샅이 뒤졌을 때 먼지 하나 나오지 않았고 브랜드 라벨마저 정교하게 칼로 잘려 나간 상태였다.
하지만 은수는 포기할 수 없었다. 범죄자가 자신의 흔적을 지우려 했다면, 오히려 가장 은밀하고 생각지 못한 곳에 중요한 것을 숨겨두었을 가능성이 컸다.
은수는 코트를 옷걸이에서 조심스럽게 내려 바닥에 폈다. 그리고 코트의 안감을 손으로 훑기 시작했다. 어깨 패드부터 가슴팍, 허리 라인을 거쳐 밑단까지 꼼꼼하게 손끝의 감각을 극한으로 곤두세웠다.
스슥, 스슥.
거친 캐시미어의 질감만이 손바닥에 전해지던 그때, 코트의 안쪽 오른쪽 밑단, 내부 안감과 겉감 사이의 이중 박음질이 되어 있는 틈새에서 묘하게 뭉툭하고 딱딱한 이물감이 손끝에 걸렸다.
은수의 심장이 폭발할 것처럼 거세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무언가 있었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게 안감 안쪽 깊숙이 밀어 넣고 아주 꼼꼼하게 손바느질로 꿰맨 흔적이 만져졌다. 은수는 다용도실 창문 밖으로 마당을 힐끗 살폈다.
진우는 여전히 허리를 굽힌 채 정교하게 흙을 파내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은수는 가위를 들어 안감의 바느질 실밥을 향해 날끝을 겨누었다.
툭.
첫 번째 실밥이 터졌다.
툭, 툭, 툭.
날카로운 가위 날끝이 실을 끊어낼 때마다, 고요한 다용도실 안에 실밥 터지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울리는 것 같았다.
그때 마당에서 진우의 삽이 흙 속에 묻혀 있던 돌덩이에 부딪쳐 쨍—! 하고 날카로운 금속음을 냈다. 은수는 소스라치게 놀라 가위를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심장이 요동쳤지만 그녀는 스스로를 진정시키며 다시 실밥을 뜯어 나갔다. 뜯어지는 안감 사이로 미세한 먼지와 함께 코트 안쪽의 오리털과 솜깃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은수는 코끝이 간지러워 재채기가 나오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손이 덜덜 떨려 코트 원단까지 잘라먹을 뻔했지만 멈출 수 없었다.
마침내 안감의 틈새가 약 10센티미터가량 벌어졌다. 은수는 그 틈새로 손가락마디를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거칠고 두꺼운 안감 천의 마찰을 뚫고 안쪽 깊숙이 손을 뻗어 마침내 딱딱한 물체를 쥐었다. 그리고 가만히 밖으로 끄집어냈다.
그것은 짙은 갈색 가죽 지갑이었다.
지갑 겉면에는 말라붙은 피가 갈색으로 얼룩덜룩하게 굳어 있어 가죽의 원래 부드러운 질감을 잃고 딱딱하게 말라 있었다. 은수는 떨리는 손으로 지갑을 펼쳤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투명한 비닐 막 너머에 꽂혀 있는 주민등록증이었다.
이름: 강태오.
생년월일: 1997년 10월 12일.
주소: 서울특별시……
주민등록증 속 사진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은수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하여 급히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사진 속의 남자는 지금 마당에서 미소 지으며 땅을 파고 있는 그 남자, 서진우가 확실했다.
하지만 사진 속의 강태오는 지금의 다정한 서진우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굳게 다문 입술,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냉혹하고 서늘한 눈빛.
그것은 먹잇감을 덮치기 직전의 매서운 맹수의 얼굴 그 자체였다.
왼쪽 눈썹 끝의 흉터는 사진 속에서도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강태오였다.
전국을 공포로 몰아넣은 연쇄살인마가 내 집 안에, 내 곁에 있었다.
은수는 떨리는 손으로 지갑 안쪽을 더 뒤졌다. 지갑 안에는 수십 장의 오만원권 지폐와 함께, 피 묻은 종이쪽지 하나가 접혀 있었다. 은수는 종이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05. 14. - 읍내 민가 뒤편 주택]
[06. 02. - 숲길 붉은 벽돌집]
‘숲길 붉은 벽돌집…….’
은수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6월 2일은 바로 폭우가 쏟아지던 그날 밤이었다. 그리고 붉은 벽돌집은 바로 은수의 집이었다.
그가 기억을 잃기 전, 이미 은수의 집을 범행 타깃으로 삼고 찾아왔었다는 뜻이었다.
그는 우연히 쓰러진 것이 아니었다. 은수를 죽이기 위해, 이 외딴 집을 덮치기 위해 비를 뚫고 찾아왔던 것이다.
단지 그 과정에서 누군가의 습격을 받았거나 사고가 나 머리를 다쳐 기억을 잃었을 뿐이었다. 은수는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지갑 안쪽 주머니에서 물건들이 두어 개 더 툭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것은 은빛 여성용 귀걸이와 낡은 은반지였다.
귀걸이와 반지 표면에는 붉은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피해자들의 소지품 일부가 사라졌다는 추측성 보도가 떠올랐다. 은수의 눈에는 이것들이 강태오가 살해한 무고한 피해자의 전리품처럼 보였다.
은수는 온몸의 핏기가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귀걸이와 반지를 쥐고 있는 손끝에서부터 끔찍한 원초적 공포가 퍼져나갔다.
그리고 또 다른 물건은 반으로 접힌 신문 스크랩 기사였다. 기사 제목은 ‘적색 야경 연쇄살인, 경찰 수사 난항’이었는데 신문 뒷면에는 붉은색 펜으로 여러 개의 선과 메모가 복잡하게 그려져 있었다.
[사건 현장 간의 거리 계산: 평균 4km 이내]
[다음 예상 지점: 북서쪽 외곽 주택가]
그리고 기사 하단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의 연락처와 함께 '강 형사'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또한 신문 기사 귀퉁이에는 "이 살인은 방식이 너무 정교하다. 이것은 단순한 쾌락 살인이 아니다. 범인은 현장을 흔적도 없이 청소하여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 메시지가 향하는 곳은...?"이라는 손글씨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은수는 이 메모들을 보며 극도의 혼란을 느꼈다. 강태오 본인이 살인마라면 왜 수사 상황을 프로파일러처럼 꼼꼼하게 분석해 두었을까?
하지만 지갑에 묻은 피와 피해자의 것으로 보이는 귀걸이와 반지 그리고 자신을 타깃으로 삼은 듯한 메모는 그가 위험한 인물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게 만들었다.
그때였다.
벅, 벅, 벅.
마당 쪽에서 들려오던 삽질 소리가 멈추고 묵직한 발소리가 현관을 지나 거실 나무 바닥을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우가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발소리는 거실을 지나 다용도실 쪽으로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삐걱, 삐걱.
은수는 미칠 것 같은 공포 속에서 소지품들을 챙겼다. 피 묻은 가죽 지갑과 메모지, 신문 스크랩, 귀걸이와 반지를 자신의 바지 주머니 속 깊숙이 구겨 넣었다.
그리고 벌어진 코트 안감을 급하게 손으로 밀어 맞추고 옷걸이에 다시 걸어두었다. 안감에서 흘러나온 하얀 솜털과 실밥 조각들을 발로 세탁기 뒤 어두운 틈새로 급하게 차 넣었다.
손가락 끝이 가위 날에 긁혀 살짝 피가 났지만 통증을 느낄 새도 없었다. 다용도실 문고리가 돌아갔다.
철컥.
은수는 반사적으로 세탁기 옆 선반으로 손을 뻗어 빈 세제 통을 쥐었다. 문이 열리고 땀에 젖은 진우가 문턱에 서 있었다.
그의 한 손에는 흙이 묻은 삽이 들려 있었고 그의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검은 눈동자는 다용도실 안의 공기와 은수의 미세한 떨림을 감지한 듯 예리하게 반짝였다.
“어라, 은수 씨. 다용도실에서 뭐 하세요?”
진우의 시선이 은수의 손에 들린 빈 세제 통과 묘하게 부자연스럽게 비뚤어져 걸려 있는 남색 코트로 향했다가 다시 은수의 얼굴로 돌아왔다. 그의 눈길이 은수의 볼록하게 튀어나온 바지 주머니에 찰나 동안 머물렀다.
은수는 주머니 속의 지갑이 째깍거리는 시한폭탄처럼 느껴졌다.
“아…… 그게, 세탁세제가 다 떨어진 것 같아서요. 새로 사 둔 게 어디 있나 찾고 있었어요.”
은수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간신히 대답했다.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었다.
진우는 가만히 은수를 응시했다.
몇 초간의 침묵이 흐르는 동안, 다용도실 안의 공기는 얼어붙을 듯 차가웠다. 진우의 표정 없는 얼굴이 은수의 숨통을 조였다.
진우는 코트 쪽으로 시선을 던지더니, 슬그머니 손을 뻗어 코트의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가 뜯어진 안감 부분을 만지는 순간 은수는 심장이 정지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내 진우는 눈꼬리를 접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아, 세제라면 싱크대 아래 수납장 안쪽에 새 제품이 하나 더 있습니다. 제가 깜빡하고 말씀을 안 드렸네요. 이리로 나오세요. 먼지가 많아서 기침하십니다. 어라, 얼굴에 뭐가 묻었네요.”
진우는 삽을 문 옆에 세워두고 은수에게로 다가왔다. 그의 큰 손가락이 은수의 창백한 뺨에 닿았다.
그의 손길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섬세하고 조심스러웠다. 진우는 은수의 뺨에서 아까 날아올랐던 하얀 오리 털 조각 하나를 부드럽게 떼어냈다.
“하얀 솜털이네요. 코트 세탁할 때 깃털이 좀 빠졌나 봅니다. 조심하세요, 옷이 상할지도 모르니까요.”
진우는 은수를 향해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에는 다정함과 동시에, 은수의 비밀스러운 행동을 모두 눈감아 주겠다는 은밀한 함축이 담겨 있는 듯했다.
은수는 그의 손길이 뺨에 닿았을 때 전신이 경직되며 숨을 쉴 수 없었다. 은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며 진우를 지나쳐 다용도실을 빠져나왔다.
진우의 몸에서 뜨거운 땀 냄새와 함께 마당의 흙내음이 훅 끼쳐왔다. 거실로 나온 은수는 다리가 풀려 소파를 짚고 서야 했다.
주머니 속의 피 묻은 강태오의 지갑과 여성용 귀걸이, 반지와 메모지들이 그녀의 허벅지를 차갑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은수는 떨리는 걸음으로 자기 방으로 들어와 조용히 미닫이문을 닫았다. 주머니 속에서 그 무겁고 끔찍한 물건들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이것들을 어디에 숨겨야 할까. 진우는 결벽증에 가까운 성격으로 집안을 매일 쓸고 닦는 사람이었다. 조금이라도 흔적이 남으면 그가 즉각 발견할 터였다.
은수는 방 안을 둘러보다가 책상 아래에 놓인 아크릴 물감과 미술 도구들이 가득 든 무거운 나무 상자를 발견했다. 은수는 물감 상자의 뚜껑을 열고 깊숙이 쌓인 스케치북과 팔레트들을 전부 끄집어냈다.
그리고 상자 맨 바닥, 낡은 화가의 유화 도구들이 잠든 틈새에 지갑과 귀걸이, 반지와 쪽지들을 밀어 넣었다. 다시 스케치북과 물감들을 얹고 상자 뚜껑을 닫은 뒤, 무거운 미술 책 여러 권을 올려놓아 자연스럽게 위장했다.
정리가 끝나자마자 은수는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냈다.
진우가 연쇄살인마라는 명백한 증거. 그리고 그가 원래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끔찍한 진실.
은수는 이 다정한 악마의 덫에서 어떻게 살아서 빠져나가야 할지, 눈앞이 아득해졌다.
마당에 파인 그 깊고 직사각형 모양의 구덩이가 마치 자신을 묻기 위해 파둔 완벽한 규격의 무덤처럼 느껴져, 은수는 창밖을 바라보며 터져 나오는 오열을 삼켰다.
“은수 씨, 저녁 식사가 거의 다 준비되었습니다. 얼른 나오셔서 같이 드세요.”
은수는 거울 속의 자신을 향해 억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다시 한번 지옥 같은 연극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위해 문손잡이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