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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의 다정한 살인마3화

내 집의 다정한 살인마

내 집의 다정한 살인마

3화: 다정한 침입자

은수의 집은 원래 늙은 화가의 작업실이었던 곳이다. 도시 외곽의 한적한 숲길 언저리에 자리 잡은 붉은 벽돌집.

은수가 반년 전 이 집을 계약했을 때만 해도 마당은 허리까지 오는 잡초로 무성했고, 집 안 구석구석에는 세월의 먼지와 거미줄이 가득했다. 은수는 그 어수선함과 고립감이 마음에 들어 집을 거의 손보지 않은 채 그대로 살았다.

정돈되지 않은 혼돈 속에서 오히려 마음의 평온을 얻는 것, 그것은 은수 나름의 방어기제였다.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격리하고 자신만의 견고한 요새 속에서 그림을 그리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은수가 자신을 지키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서진우라는 남자가 들어온 지 일주일째 되던 날, 은수는 제 집이 낯설어질 정도로 완벽하게 변화한 풍경을 목격해야 했다. 의사는커녕 약국도 먼 외딴집이라 은수가 거의 강제로 쉬게 했지만, 진우는 상처가 당길 때마다 잠깐씩 멈춰 서면서도 손이 닿는 작은 일부터 조용히 해치웠다.

아침 햇살이 창가를 통해 환하게 쏟아지는 거실. 먼지 한 톨 날리지 않는 공기는 투명하리만치 맑았다.

뒤죽박죽 꽂혀 있던 책장의 책들은 출판사별, 높낮이와 색상 톤에 따라 기하학적인 규칙을 그리며 오와 열을 맞추고 있었다. 거실 바닥은 왁스칠이라도 한 듯 반짝였고, 은수가 아무렇게나 던져두던 소파 위의 담요들은 칼날처럼 날이 서서 개어 있었다.

주위에 굴러다니던 연필 깎기 잔해나 뭉개진 지우개 가루, 스케치북 연습장들마저 책상 서랍 안으로 질서정연하게 수납되어 있었다. 은수는 자신의 손때와 무질서가 사라진 공간을 둘러보며 기묘한 해방감과 동시에 묘한 이물감을 느꼈다.

주방은 더욱 놀라웠다. 양념통들은 라벨의 글자가 정확히 정면을 향하도록 일렬로 정렬되어 있었고, 건조대 위의 식기들은 크기순으로 흐트러짐 없이 포개어져 있었다.

싱크대 수전은 물때 하나 없이 광이 났다. 마치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모델하우스의 주방을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진우 씨……?”

은수가 하품을 하며 방에서 나오다 멈칫했다. 주방에서는 맛있는 냄새와 함께 조심스러운 칼질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탁, 탁, 탁, 탁, 탁.

일정하기 짝이 없는 간격.

소름 끼칠 정도로 기계적이고 완벽한 속도였다.

은수는 홀린 듯 주방 문턱으로 다가갔다. 진우는 소매를 걷어붙인 채 나무 도마 위에서 당근을 썰고 있었다. 그의 탄탄한 전완근이 움직일 때마다 굵은 힘줄이 돋아났다가 사라졌다.

그가 쥔 식칼은 은수가 다이소에서 산 싸구려 칼이었지만, 그의 손에 들리니 마치 명장이 만든 수술용 메스처럼 정교하고 예리하게 궤적을 그렸다. 얇게 썰려 나가는 당근 조각들은 소름 돋게도 단 1밀리미터의 오차도 없이 동일한 두께를 유지하고 있었다.

썬 단면 역시 짓눌림 없이 매끄럽게 잘려 나갔다.

은수는 그 완벽한 칼질 소리에 묘한 서늘함을 느꼈다.

칼을 다루는 저 단호하고 거침없는 손길.

만약 저 손에 들린 것이 채소가 아니라면? 저 예리한 날끝이 향하는 곳이 도마가 아니라면?

차가운 상상이 뇌리를 스치던 순간, 진우가 칼질을 멈추고 은수 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가득했던 예리한 집중력은 은수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봄눈 녹듯 스르르 사라졌다.

진우는 이내 눈꼬리를 접으며 세상에서 가장 무해하고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은수 씨, 깨어났어요? 더 자도 되는데.”

“아…… 냄새가 너무 좋아서요. 또 뭘 만들고 계신 거예요?”

“감자 옹심이를 곁들인 닭고기 스튜예요. 어제 은수 씨가 작업하느라 밤을 새워서 기력이 없을 것 같아 닭을 좀 고아봤습니다. 마트에서 파는 영계가 아니라, 어제 은수 씨가 사서 냉장고에 넣어 두셨던 토종닭으로 요리했거든요.”

진우는 국자를 들어 냄비 안을 저었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뽀얀 육수에서 한약재와 닭고기의 고소한 향이 어우러져 피어올랐다.

은수는 그 냄새만으로도 위가 기분 좋게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진우 씨는…… 정말 못 하는 요리가 없네요. 어제 먹은 파스타도 그렇고, 그제 먹은 생선구이도 그렇고. 솔직히 웬만한 레스토랑 셰프보다 훨씬 나아요. 간도 항상 딱 맞고요.”

은수의 칭찬에 진우는 쑥스러운 듯 목 뒷덜미를 쓸어내렸다. 왼쪽 눈썹 끝의 흉터가 그가 미소 지을 때마다 둥글게 휘어졌다.

“그냥…… 손이 가는 대로 만드는 것뿐이에요. 요리법을 따로 배운 기억은 없는데, 재료를 보면 어떻게 썰고 어떻게 조리해야 할지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더라고요. 다행이에요, 입맛에 맞으신다니.”

진우는 테이블 위에 수저를 놓았다. 은수는 수저의 위치를 보고 또 한 번 감탄했다.

냅킨 위에 정렬된 숟가락과 젓가락의 각도가 자를 댄 듯 수평을 이루고 있었다. 식기와 컵의 거리마저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진우 씨는 평소에도 성격이 엄청 깔끔하신 편이었나 봐요. 집이 너무 깨끗해서 제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예요. 좀 어지르고 사셔도 돼요. 제가 원래 워낙 어질러놓고 사는 편이라 도리어 민망해지네요.”

은수가 농담조로 말하자, 진우는 스튜를 그릇에 담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어질러져 있는 것을 보면 마음이 불안해져요. 모든 물건이 제 자리에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어야 안도감이 든달까요. 어쩌면 제 잃어버린 기억도 이렇게 흩어져 있어서, 주변 환경이라도 정리정돈을 해야 안정을 찾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죄송해, 은수 씨 생활 방식을 어지럽힌 건 아닌지 걱정스럽네요.”

그의 슬픈 자조에 은수는 마음이 짠해졌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과거에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증오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상태.

그것은 세상이라는 거대한 망망대해에 닻도 돛도 없이 흘러 다니는 널빤지 조각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은수는 따뜻한 스튜를 한 입 떠먹었다. 닭고기는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아내렸고, 진하고 고소한 국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 지친 몸을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정말…… 맛있어요. 고마워요, 진우 씨. 신경 쓰지 마세요. 깨끗하니까 오히려 제 기분도 좋아지는걸요.”

은수가 진심을 담아 말하자, 진우의 검은 눈동자에 깊은 감정이 차올랐다. 그는 은수가 먹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배가 부르다는 듯,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식사를 마치고 은수가 그릇을 치우려 하자, 진우는 어김없이 은수를 제지했다.

“설거지는 제가 할 테니 은수 씨는 어서 작업실로 가세요. 오늘이 마감일이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하지만 맨날 얻어먹기만 하고 일까지 시키려니 미안해서…….”

“제 몸을 눕힐 수 있는 공간을 주신 것만으로도 제가 평생 갚아야 할 빚입니다. 이런 사소한 일이라도 하게 해주셔야 제 마음이 편해요. 그러니 제발 물 묻히지 마시고 들어가세요.”

진우는 단호하면서도 다정한 어조로 은수의 등을 떠밀었다.

은수는 어쩔 수 없이 작업실로 향했다. 의자에 앉아 태블릿 화면을 켜자, 며칠 동안 진도가 나가지 않아 속을 썩이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어두운 숲속에서 소년을 지켜보던 늑대의 실루엣. 은수는 펜을 쥐고 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오늘은 손끝이 가벼웠다.

주방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와 규칙적인 그릇 소리. 그것은 소음이 아니라 기분 좋은 백색소음이 되어 은수의 집중력을 끌어올려 주었다.

늘 혼자 작업하며 느끼던 숨 막힐 듯한 고독감 대신, 얇은 벽 너머에 나를 위해 설거지를 하고 나를 걱정해 주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은수의 마음속에 깊은 안도감을 불어넣고 있었다.


오후 2시경, 출판사 담당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은수는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받았다.

“네, 작가님. 보내주신 콘셉트 시안 확인했는데요, 조금 더 밝고 대중적인 느낌으로 수정할 수 있을까요? 늑대의 실루엣이 너무 어둡고 무서워서 아이들이 보기에 거부감이 들 수 있다는 의견이 있어서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딱딱하고 기계적인 피드백. 은수는 매번 이런 순간마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작품의 본질보다 대중성의 잣대로 모든 것을 재단하려는 타협의 요구.

“아…… 그렇군요. 하지만 이 장면에선 소년의 내면적 공포를 표현하는 게 핵심이라서요. 늑대는 단순한 악당이 아니라 소년의 공포를 실체화한 장치거든요.”

“그래도 책을 파는 입장에서는 독자들의 첫인상이 중요하니까요. 조금만 타협해서 선을 좀 부드럽게 다듬고 채도를 높여주세요. 마감은 오늘 저녁 6시까지 아시죠? 부탁드립니다.”

일방적인 통보와 함께 끊긴 전화. 은수는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가슴속에서 피어오르는 무력감에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때 미닫이문이 살포시 열리며 진우가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쟁반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머그잔과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은빛 마들렌이 놓여 있었다.

“집에 밀가루랑 버터가 조금 남았길래 구워봤습니다. 마침 작업이 일단락된 것 같아 가져왔어요.”

“세상에, 마들렌까지 구울 줄 알아요?”

은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노란 마들렌은 조개 모양이 완벽하게 잡혀 있었고, 레몬 제스트를 넣었는지 상큼하고 달콤한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은수 씨가 단것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요. 작업할 때 가끔 초콜릿을 드시는 걸 봤거든요.”

진우는 머그잔을 은수의 책상 옆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이건 캐모마일 티예요.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시면 밤에 잠을 설칠 테니까요. 통화 소리가 흘러나와서 본의 아니게 들었습니다. 마음이 많이 상하셨겠어요.”

그의 따뜻한 배려에 은수는 목구멍이 찌르르 아파왔다. 타인에게 자신의 지친 내색을 들킨 것이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아니에요. 늘 있는 일인걸요. 프리랜서의 비애죠, 뭐.”

은수는 찻잔을 들어 올렸다.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진우는 은수의 모니터 화면 속 완성되지 않은 그림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림이 참 아름답습니다. 소년의 눈빛은 무척 깊고, 늑대 역시 단순히 악한 짐승으로만 보이지 않아요. 어둠 속에서 소년을 덮치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모진 바람막이가 되어주려고 등 뒤를 지키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늑대가…… 모진 바람막이가 된다고요?”

은수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네. 제 느낌엔 그래요. 늑대의 매서운 눈빛이 소년이 아니라 소년을 위협하는 숲속의 보이지 않는 어둠을 겨누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작가님이 그리신 본래의 의도가 전 무척 마음에 듭니다. 출판사 사람들도 그림을 찬찬히 뜯어보면 결국 알아차릴 거예요. 그러니 너무 힘들어하지 마세요.”

진우의 말은 은수의 심장을 정통으로 관통했다.

내 그림을 진심으로 이해해 주는 단 한 사람의 존재.

그것이 주는 위로는 그 어떤 칭찬보다도 달콤하고 따뜻했다.

“고마워요, 진우 씨. 늑대를 지우지 않고, 진우 씨 말대로 그 느낌을 조금 더 살려볼게요. 선을 굳이 뭉개지 않고, 대신 늑대의 눈빛에 미세한 슬픔을 담아봐야겠어요.”

“네, 분명 훌륭한 그림이 될 겁니다.”

진우의 격려를 받으며 은수는 다시 펜을 잡았다. 4시간 동안의 사투 끝에, 마침내 은수는 자신이 만족할 만한 퀄리티의 삽화를 완성하여 전송했다.

마감을 끝내고 나자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뻐근함이 밀려왔다.

“어깨가 많이 뭉치신 것 같습니다.”

진우가 조심스럽게 다가오며 말했다.

“제가 가볍게 주물러 드려도 될까요? 어제 은수 씨가 작업하면서 몇 번이고 어깨를 주무르시는 걸 보았습니다.”

“아, 괜찮은데…….”

은수가 사양하려 했지만, 진우는 이미 은수의 등 뒤로 다가와 있었다. 그의 큰 손이 은수의 어깨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따뜻한 손길이었다.

진우의 손가락이 어깨의 굳은 근육을 부드럽게 짚어 나갔다.

하윽.

은수는 자기도 모르게 가벼운 신음을 흘렸다. 그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압력은 놀라울 정도로 정교했다.

뭉친 혈 자리를 정확히 찾아내어 아프지 않게 지그시 누르는 솜씨는 안마사 뺨칠 정도였다.

“아프시면 말씀하세요.”

“아니요…… 아주 시원해요. 진우 씨는 안마사 일도 하셨던 거 아니에요? 솜씨가 보통이 아니네요.”

은수가 농담을 던지자, 진우는 나지막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가 은수의 등판을 타고 울려 퍼졌다.

“글쎄요. 인체의 뼈와 근육의 구조가 머릿속에 투명하게 그려지는 느낌이 들긴 합니다. 어디를 눌러야 힘이 빠지고, 어디를 눌러야 통증이 완화되는지…… 그런 감각이 손에 익어 있어요. 마치 해부학 책을 통째로 외운 것처럼요.”

진우의 부드러운 손길 속에서 은수의 긴장은 완전히 무장해제되었다.

그의 손가락이 목덜미를 타고 올라와 머리와 목의 경계 부분을 지그시 누를 때 은수는 나른한 피로감과 함께 묘한 심장 박동을 느꼈다.

그의 다정한 손길이 너무나 달콤해서, 그리고 이 평화로운 일상이 너무나 소중해서 이 순간이 영원히 깨지지 않기를 바랐다.


며칠 뒤, 비가 완전히 개고 맑은 하늘이 드러난 오후였다. 진우는 마당에 서서 잡초가 우거진 정원을 정리하겠다고 자처했다.

은수는 거실 창가에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진우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마당에 방치되어 있던 낡은 삽과 원예용 가위를 들고 일하기 시작했다.

햇살 아래에서 땀을 흘리며 일하는 그의 몸짓은 거침이 없었다. 땅을 깊게 파내고 덤불을 잘라내는 그의 팔과 등 근육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단하게 수축하고 이완되었다.

그때 진우가 덤불 틈에 섞여 있던 찔레꽃 나무를 정리하다가 날카로운 가시에 손가락을 긁혔다.

“앗!”

은수가 놀라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진우 씨! 괜찮아요?”

진우는 제 손가락 끝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피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은수는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진우의 얼굴에서 방금 전까지의 다정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손가락 끝에 맺힌 붉은 선혈을 지나치게 무표정하고 차가운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깊은 심연처럼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고, 마치 피라는 붉은 액체를 아주 익숙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서늘한 야수 같은 기운이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피를 보는 그의 눈에 일말의 당혹감도, 생리적 통증으로 인한 찌푸림도 없었다.

오로지 기괴할 정도로 건조한 관조만이 존재했다.

은수의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쫙 돋았다.

하지만 진우는 은수의 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평소의 다정한 서진우로 돌아왔다.

“아, 은수 씨. 찔레 가시가 생각보다 날카롭네요. 걱정 끼쳐서 미안합니다.”

그가 해맑게 웃으며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등 뒤로 감추었다.

은수는 방금 본 그의 눈빛에 가슴이 쿵쾅거렸지만, 세찬 고동을 억누르며 주머니에서 일회용 밴드를 꺼내 그의 손가락을 잡아당겼다.

“이리 줘봐요. 조심 좀 해요. 상처 입은 몸뚱이로 이렇게 험한 일 하다가 덧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은수는 그의 길고 단단한 손가락을 잡고 밴드를 꼼꼼히 감아주었다. 그의 체온은 겉보기와 달리 꽤나 차가웠다.

손끝이 닿을 때마다 느껴지는 은근한 전율.

진우는 밴드가 감긴 손가락을 보며 아이처럼 맑게 기뻐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은수 씨가 직접 밴드를 붙여주셨으니 내일이면 흔적도 없이 나을 것 같습니다.”

진우의 웃음에 은수는 방금 전의 서늘함이 그저 햇빛 아래의 착시였을 것이라 자신을 타일렀다.


그날 밤, 은수는 침대에 누워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았다. 방 안에는 시계 초침 소리만이 똑딱이며 흘러가고 있었다.

은수는 과거의 기억을 조심스럽게 들춰보았다. 그녀가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들어갔던 일러스트 에이전시에서 겪었던 배신.

믿었던 선배는 은수의 포트폴리오를 자신의 이름으로 도용해 큰 계약을 따냈고, 회사 사람들은 은수의 호소를 거짓말쟁이의 질투로 치부하며 외면했다. 그 뒤로 은수는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타인의 호의는 무언가 대가를 바라는 위선이라 여겼고, 자신의 마음의 문을 굳게 닫은 채 이 외진 붉은 벽돌집으로 스스로를 유배시켰다.

그런데 이 남자, 서진우는 너무나도 쉽게 은수의 방어벽을 허물어뜨렸다. 대가 없는 호의, 헌신적인 돌봄, 그리고 자신의 그림을 완벽히 이해해 주는 다정함.

‘나는 정말로 이 사람을 믿어도 되는 걸까?’

기억을 잃은 살가운 눈빛 너머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은수는 가만히 몸을 돌려 방문 쪽을 바라보았다. 늘 걸어 잠그던 자신의 방문 손잡이. 하지만 오늘 밤은 처음으로 그 자물쇠를 잠그지 않았다.

스으으…….

얇은 문틈 너머로 진우의 규칙적이고 고요한 숨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은수는 이불을 품에 꼭 안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다정한 침입자는 은수의 견고한 성벽 내부를 완전히 점령해 버렸고, 은수는 그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은수는 꿈에도 알지 못했다.

평화로운 일상의 수면 아래에서, 거대한 어둠의 해일이 이미 숨죽인 채 그녀를 향해 밀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어둠의 폭풍 중심에, 자신이 문을 열어준 이 다정한 남자가 서 있다는 것을.

어두운 밤하늘에서는 달빛조차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고, 고요한 주택가는 폭풍 전야의 침묵만을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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