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의 다정한 살인마

2화: 빈 도화지 위의 이름
“모르겠습니다.”
남자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그 다섯 글자는 차가운 거실 공기 속을 유영하다가 은수의 귓가에 둔탁하게 와닿았다.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어둠이 걷히기 시작한 거실은 푸르스름한 미명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밤새 내린 비는 기세가 꺾였지만, 지붕을 타고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는 여전히 불규칙한 박자로 창문을 두드렸다.
은수는 멍하니 남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거짓을 말하는 이 특유의 미세한 눈동자의 흔들림이나, 회피하려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눈동자는 깊고 검었지만, 그 안에는 거대한 우주처럼 아득한 공백만이 가득 차 있었다.
마치 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가 처음 마주하는 광경을 보듯, 그의 시선은 은수의 얼굴에, 제 몸에 감긴 흰 붕대에, 그리고 낡은 소파의 가죽 질감에 차례로 머물렀다.
은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목구멍이 바짝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정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으세요? 이름이나, 나이, 혹은 어젯밤 왜 그렇게 다쳐서 우리 집 앞까지 오게 됐는지도?”
남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한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꾹 누르는 그의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뇌리를 헤집는 극심한 통증 탓인지 그의 긴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기억하려고 하면…… 머릿속이 하얗게 얼어붙는 것 같습니다.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머릿속을 헤집는 것 같기도 하고…….”
그가 신음하며 고개를 숙였다. 붕대를 감은 옆구리가 당기는지, 그의 몸이 눈에 띄게 움츠러들었다. 창백한 뺨 위로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은수는 반사적으로 그의 어깨로 손을 뻗으려다 허공에서 멈추었다. 경계심이 연민보다 반 걸음 앞섰다.
아무리 기억을 잃은 나약한 상태라 해도, 이 남자는 어젯밤 칼에 찔린 채 빗속을 헤매던 정체불명의 불청객이었다.
“일단, 무리해서 생각하지 마세요. 다친 곳이 덧날 수 있어요.”
은수는 한 걸음 물러서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따뜻한 물이라도 좀 가져올게요. 누워 계세요.”
주방으로 향하는 은수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웠다. 나무 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싱크대 앞에 서서 가스레인지에 주전자를 올리고 불을 붙였다. 파란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며, 은수는 싱크대 한쪽에 꽂힌 식칼들을 힐끗 바라보았다. 날카롭게 날이 선 칼날들이 아침 미명 속에서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 상식적인 수순이었다. 은수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다시 확인했다. 밤새 몇 번이나 떠올렸던 119 번호가 액정 위에서 차갑게 빛났지만, 통신 표시가 여전히 불안정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그 순간 어젯밤의 상황이 뇌리를 스쳤다.
도로가 통제될 정도의 폭우, 그리고 이 남자가 품고 있던 절박한 숨소리.
만약 그가 범죄에 휘말린 피해자라면? 혹은, 경찰에 신고하기에는 너무나 위험한 사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신고가 연결되더라도 구급대가 오기 전까지 이 외딴집에서 버텨야 하는 사람은 결국 은수 자신이었다.
무엇보다 은수의 마음에 걸린 것은 남자가 깨어나기 전, 그의 젖은 옷을 정리하며 느꼈던 기묘함이었다.
은수는 물이 끓는 동안 다용도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어젯밤 물기와 피를 대충 닦아내고 걸어둔 남자의 남색 캐시미어 코트가 걸려 있었다.
은수는 마른침을 삼키며 코트에 다가갔다. 코트는 여전히 눅눅하고 묵직했다. 주머니를 하나씩 뒤져보았다.
겉주머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안주머니 역시 비어 있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성인 남성이 지갑도, 휴대폰도, 차 키조차도 없이 칼에 찔린 채 거리를 헤맨다니. 더욱 이상한 것은 옷의 라벨이었다.
칼로 정교하게 도려낸 듯, 목 뒷부분과 안감 안쪽에 있어야 할 브랜드 라벨이 완전히 제거되어 있었다. 마치 자신의 신원을 철저히 숨기기 위해 준비된 옷처럼.
은수의 등덜미를 타고 서늘한 오한이 흘러내렸다.
‘그냥 우연히 강도를 당한 사람인 걸까? 아니면…….’
생각의 꼬리를 무는 의구심은 꼬리를 물고 이어져 최악의 시나리오를 그려내기 시작했다.
주전자가 삐이익— 요란한 소리를 내며 끓어오르자 은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다용도실을 빠져나왔다.
따뜻한 보리차를 잔에 따라 거실로 돌아왔을 때, 남자는 은수가 지시한 대로 소파에 얌전히 누워 있었다.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올린 채 창밖을 바라보는 그의 옆얼굴은 지나치게 고요했다.
왼쪽 눈썹 끝에 가로로 뉘어진 하얀 흉터만이 그의 험난한 과거를 대변해 주는 유일한 흔적 같았다.
“여기요, 따뜻한 물이에요.”
남자는 상체를 서서히 일으켰다. 거동이 불편할 텐데도 그는 인상을 쓰면서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컵을 건네받는 손이 아주 살짝 떨렸다.
“감사합니다.”
목소리는 낮고 감미로웠다. 남자는 컵을 두 손으로 쥐고 한 모금씩 천천히 들이켰다. 물을 마시는 그의 태도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갈했다.
팔꿈치를 몸에 붙이고 컵을 들어 올리는 각도와 속도까지 모두 몸에 밴 규칙처럼 자연스러웠다. 아무렇게나 자란 들개 같은 난폭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품격 있는 교육을 받은 사람의 몸짓이었다.
은수는 소파 맞은편의 1인용 안락의자에 앉아 그를 관찰했다. 남자는 은수의 조심스러운 시선을 눈치챘는지, 컵을 내려놓으며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 몸에서…… 피비린내가 많이 나죠. 더러운 옷을 입고 소파를 망쳐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옷은…… 어젯밤에 저체온증이 올 것 같아서 제가 갈아입혔어요. 저희 아버지가 쓰시던 옷인데, 좀 작죠?”
남자는 제 몸에 걸쳐진 낡은 회색 맨투맨 티셔츠의 소매를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그의 넓은 어깨와 긴 팔에는 옷이 다소 끼어 보였다.
“아닙니다. 아주 따뜻해요. 살려주신 것도 모자라 이렇게 배려해 주시니…… 어떻게 은혜를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었다. 그 다정하고 순수한 눈빛을 보고 있노라면, 아까 느꼈던 의구심과 라벨이 잘려 나간 코트에 대한 불안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갈 곳은 있으신가요?”
은수가 묻자 남자의 눈빛이 다시 어두워졌다.
“……모르겠습니다. 기억나는 곳이 아무것도 없어서요.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지조차…….”
슬픔과 막막함이 깃든 목소리였다.
은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일단…… 몸이 나을 때까지는 여기 계세요. 빗길에 산길이나 도로가 엉망이 되기도 했고, 그 몸으로 나가봤자 갈 곳도 없을 테니까요.”
남자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전혀 모르는 사람을 집에 들여 두는 건 위험할 텐데요.”
그가 스스로 위험을 경고하는 모습에 은수는 헛웃음이 나왔다.
“위험한 사람인가요, 그쪽이?”
남자는 말문이 막힌 듯 가만히 은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씁쓸하게 웃었다.
“나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당신을 해치고 싶지는 않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이 손이 기억하는 감각이 있다면, 그건 누군가를 다치게 하는 용도가 아니기를 바랄 뿐입니다.”
남자가 제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손가락 마디마디는 굳은살 없이 곧고 길쭉했다.
하지만 손바닥 안쪽에는 묘한 마찰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칼자루를 쥐어본 적이 있는 사람의 손일까, 아니면 연장을 다루는 사람의 손일까.
은수는 그 의문을 마음속 깊이 묻어두기로 했다.
아침 8시가 넘어가자, 은수는 배에서 나는 작은 꼬르륵 소리에 얼굴을 붉혔다. 남자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엷게 웃었다.
“제가 뭐라도 도울 수 있을까요? 요리 같은 건…… 할 줄 알지 모르겠지만요.”
“환자는 누워 계세요. 대단한 걸 만들 건 아니니까요.”
은수는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찬밥과 달걀 몇 개, 그리고 시들어가는 파가 전부였다.
상처를 입은 환자에게 찬밥을 줄 수는 없으니 가볍게 쌀을 불려 죽을 쑤기로 했다. 냄비에 참기름을 두르고 불린 쌀을 볶기 시작하자 고소한 냄새가 주방을 가득 채웠다.
쌀이 투명해질 때쯤 물을 붓고 불을 줄였다. 은수가 주걱으로 냄비 바닥을 살살 긁으며 쌀이 눌어붙지 않게 젓고 있을 때였다.
스윽.
발소리도 없이 그림자가 은수의 발치에 드리워졌다.
“악!”
은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에 쥐고 있던 주걱을 떨어뜨릴 뻔했다. 언제 다가왔는지, 남자가 주방 문턱에 기대어 서 있었다.
“죄송합니다!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남자는 안절부절못하며 은수의 눈치를 보았다. 어젯밤 보았던 그 날카롭고 수려한 외모의 남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덩치 큰 대형견이 주인의 눈치를 보는 듯한 모양새였다.
“발소리가 안 나서 깜짝 놀랐잖아요.”
은수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몸도 아픈 사람이 왜 일어났어요?”
“고소한 냄새가 나기도 했고…… 혼자 계시는데 나만 편히 누워 있는 게 마음이 불편해서요. 이거, 제가 저어도 될까요?”
남자가 냄비를 가리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옆구리 상처 벌어져요. 그냥 가서 쉬라니까요.”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정말이에요.”
남자는 사양하는 은수를 향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의 몸에서 은수의 잠옷에서 나던 은은한 섬유유연제 냄새와 묘한 열기가 훅 풍겼다. 남자는 은수의 손에서 주걱을 부드럽게 건네받았다.
그의 손가락이 은수의 손등에 아주 살짝 스쳐 지나갔다.
닿은 부위가 화끈거리는 느낌에 은수는 얼른 손을 뒤로 감추었다.
남자는 주걱을 쥐고 냄비 안의 죽을 젓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의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일정한 속도로 냄비 바닥을 둥글게 긁어내며 쌀알이 뭉개지지 않도록 조절하는 손놀림은 요리를 자주 해본 사람의 것이 분명했다.
“요리…… 해보신 적 있나 봐요?”
은수의 질문에 남자는 주걱을 젓던 손을 멈추고 멍하니 냄비를 바라보았다.
“그러게요……. 손이 알아서 움직이네요. 이상하게 이 느낌이 낯설지 않습니다.”
그가 씁쓸하게 웃으며 다시 주걱을 움직였다.
“다행이네요. 굶어 죽지는 않으시겠어요.”
은수는 남자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빗물에 젖어 헝클어졌던 머리카락은 이제 단정하게 말라 있었고, 그의 날카로운 턱선과 높은 콧대 아래로 흐르는 묵직한 침묵은 묘한 안도감과 긴장감을 동시에 자아냈다.
이윽고 완성된 흰죽을 식탁 위에 마주 앉아 먹기 시작했다. 반찬이라고는 며칠 전에 담근 짠지 조림과 조미김이 전부였다.
남자는 숟가락을 들고 한 입 먹어보더니 두 눈을 반짝였다.
“아주 맛있습니다.”
“그냥 쌀이랑 물밖에 안 들어갔는데요, 뭐.”
“아닙니다. 이 온기가…… 정말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그의 눈에 어린 깊은 쓸쓸함을 보며 은수는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그는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따뜻한 죽 한 그릇에 이토록 감격하는 걸까.
“많이 드세요. 그리고 빨리 나아서 집으로 돌아가셔야죠. 가족들이 걱정하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남자는 숟가락을 쥔 손을 멈추었다.
“나를…… 걱정해 줄 사람이 있을까요?”
스스로에게 묻는 듯한 나지막한 중얼거림이었다.
그의 표정에 스쳐 지나간 찰나의 서늘함에 은수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삼겼다.
하지만 이내 남자는 다시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식사를 이어갔다.
식사가 끝나자마자 남자는 은수가 말릴 틈도 없이 그릇들을 싱크대로 실어 날랐다. 그리고는 물을 틀고 능숙하게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제가 한다니까요!”
은수가 다가가 그의 옷자락을 잡았지만,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정도 일도 안 하면 제가 너무 염치가 없지 않습니까. 은수 씨는 가서 일하세요. 어젯밤에 보니 밤새 작업하시는 것 같던데.”
그가 슬쩍 은수의 방을 가리켰다. 거실 한쪽에 마련된 미닫이문 너머로 은수의 작업 책상과 켜져 있는 태블릿 화면이 보였다.
은수는 그의 고집에 못 이겨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럼…… 부탁할게요.”
방으로 들어온 은수는 의자에 앉아 태블릿 펜을 잡았다. 하지만 좀처럼 그림에 집중할 수 없었다. 미닫이문 너머로 들려오는 그릇 부딪히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 그리고 남자의 가벼운 발소리가 은수의 신경을 자극했다.
혼자만의 공간이었던 이 집안에 타인의 숨결이 가득 차 있는 느낌.
그것은 낯설었지만, 동시에 오랜 시간 잊고 지냈던 기묘한 온기를 채워주고 있었다.
은수는 가만히 제 뺨을 만져보았다.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오후가 되자 햇살이 창가를 통해 길게 들어왔다. 은수는 마감 기한이 임박한 동화 삽화를 그리기 위해 온 정신을 집중했다.
숲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작은 소년과, 그 소년을 멀리서 지켜보는 늑대의 실루엣을 그리는 중이었다.
그림을 그리다 문득 기척을 느껴 고개를 돌려보니, 남자가 미닫이문 틈새로 은수의 작업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은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방해하려던 건 아닙니다. 그림이 너무 예뻐서…… 나도 모르게 보게 되었네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들어와서 보셔도 돼요.”
남자는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시선이 모니터 화면에 고정되었다.
“동화 삽화인가요?”
“네.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어요. 이 숲길을 헤매는 소년의 모험담인데, 이번 장면에선 길을 잃고 무서워하는 소년의 내면을 표현해야 하거든요. 근데 잘 안 풀리네요.”
남자는 가만히 화면 속 소년의 눈망울을 들여다보았다.
“소년의 눈빛이…… 슬퍼 보입니다. 무서워한다기보다,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절망하는 것 같아요.”
은수는 그의 말에 뒤통수를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절망이요?”
“네. 사방은 어둡고, 뒤에는 무서운 짐승이 쫓아오는데, 앞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막막함. 마치…… 지금의 제 모습 같기도 하네요.”
남자의 목소리에는 짙은 외로움이 묻어났다.
은수는 화면 속 소년과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의 왼쪽 눈썹 끝 흉터가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이름이 필요할 것 같아요.”
은수가 불쑥 말했다.
남자가 의아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계속 ‘저기요’나 ‘그쪽’이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요. 기억을 찾으실 때까지 임시로 쓸 이름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이름…… 말입니까?”
“네. 음…… 어떤 이름이 좋을까요?”
은수는 잠시 턱을 괴고 고민했다. 문득 그녀가 가장 좋아하던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이자, 왠지 모르게 이 남자와 어울리는 다정하고 따뜻한 어감이 떠올랐다.
“‘진우’는 어때요? 서진우.”
“진우…….”
남자는 그 이름을 입안에서 조용히 굴려 보았다.
마치 오래전 잃어버렸던 소중한 물건을 되찾은 사람처럼, 그의 입술 끝이 호선을 그리며 말려 올라갔다.
“서진우…… 마음에 듭니다. 아주 따뜻한 이름이네요.”
“다행이네요. 그럼 앞으로는 진우 씨라고 부를게요. 제 이름은 어젯밤에 말했듯이 한은수고요.”
“네, 은수 씨.”
진우가 활짝 웃었다. 그 웃음은 티 없이 맑아서, 그가 어젯밤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던 남자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날 밤, 은수는 거실 바닥에 손님용 이불을 정갈하게 깔아주었다.
“거실이라 조금 추울 수도 있어요. 보일러 온도는 올려두었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이 정도도 과분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은수 씨.”
진우는 이불 위에 앉아 은수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헌신과 감사로 가득 차 있었다.
은수는 묘한 떨림을 느끼며 서둘러 방으로 돌아왔다.
방문을 닫고 은수는 자기도 모르게 방문고리를 걸어 잠갔다.
찰칵.
자물쇠가 잠기는 금속음이 고요한 방 안을 울렸다. 은수는 문에 등을 기대고 서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낮 동안 보여준 진우의 다정함과 무해한 미소. 하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의문들이 은수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라벨이 잘려 나간 남색 캐시미어 코트. 지갑도 휴대폰도 없는 상태. 그리고 무엇보다, 날카로운 칼날에 찔려 생긴 옆구리의 자상.
그는 정말로 기억을 잃은 불쌍한 피해자일까? 아니면 어떤 거대한 범죄에 연루되어 정체를 숨기려 하는 도망자일까?
은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거실 쪽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얇은 문 너머로 진우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다정한 구원자이자 잔혹한 불청객일지도 모르는 남자와의 동거.
은수는 이 선택이 자신을 어디로 이끌고 갈지 알지 못한 채, 서서히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창밖에는 밤새 그쳤던 빗방울이 다시 한두 방울씩 유리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새벽녘의 공기는 어제보다 한층 더 차가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