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의 다정한 살인마

시놉시스
폭우가 쏟아지던 밤, 은수는 집 마당에 쓰러진 정체불명의 남자를 구해준다.
깨어난 남자는 모든 기억을 잃었지만 한없이 다정하고 헌신적인 모습으로 은수의 일상에 스며든다.
그러나 뉴스에 공개된 잔혹한 연쇄살인마의 몽타주가 그의 얼굴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되며, 은수의 안식처는 가장 위험한 장소로 변하기 시작한다.
1화: 빗속의 불청객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했다. 창문 위로 쏟아지는 빗줄기는 거친 채찍질처럼 유리를 때려댔다.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전향하며 도시 외곽의 낡은 단독주택을 개조해 들어온 지도 벌써 반년. 고요함이 좋아 선택한 이 집이었지만, 오늘 같은 밤이면 그 고요함은 기괴한 적막으로 변해 등 뒤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후우…….”
은수는 뻐근한 목을 뒤로 젖히며 태블릿 펜을 내려놓았다. 마감 기한이 코앞인 동화 삽화 작업은 좀체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커피라도 한 잔 더 마셔야 할 것 같아 주방으로 향하던 그때였다.
콰르릉—!
천둥소리와 함께 집 전체가 가볍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 진동이 채 가시기도 전, 은수의 귀에 이질적인 소리가 꽂혔다.
쿵.
무언가 둔탁한 것이 땅에 부딪히는 소리. 빗소리에 묻혀 희미했지만, 분명히 들렸다.
은수는 주방 창가로 다가가 밖을 살폈다. 센서등이 고장 난 마당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잘못 들었나?”
고개를 가로저으며 돌아서려던 찰나, 번쩍이며 번개가 밤하늘을 갈랐다. 찰나의 순간, 하얀 빛 속에 박제된 풍경이 은수의 시야에 들어왔다.
대문 앞, 낮은 담벼락 아래에 누군가 쓰러져 있었다.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은수는 떨리는 손으로 현관문 옆에 둔 긴 우산을 챙겨 들었다. 나가지 말아야 한다는 본능과, 저러다 사람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양심이 머릿속에서 격렬하게 충돌했다. 결국 그녀는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었다.
“저기요……?”
대답은 없었다.
거센 비바람이 은수의 잠옷 자락을 순식간에 적셨다. 은수는 손등을 타고 흐르는 빗물을 닦아내며 쓰러진 형체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코끝을 찌르는 비릿한 냄새가 빗물에 섞여 올라왔다.
피였다.
남자는 엎드린 채 미동도 없었다. 짙은 남색 코트는 이미 흠뻑 젖어 검게 변해 있었고, 그 주변으로 고인 빗물은 옅은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저기요! 정신 좀 차려보세요!”
은수는 우산을 내팽개치고 남자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묵직한 무게감이 손목을 타고 전해졌다.
남자의 얼굴이 위를 향하자, 다시 한번 번개가 내리쳤다. 창백하다 못해 투명해 보이는 피부, 길게 뻗은 속눈썹, 그리고 왼쪽 눈썹 끝에 난 작은 흉터. 고통에 일그러진 미간과는 대조적으로 남자의 이목구비는 조각처럼 수려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걸 감상할 때가 아니었다. 남자의 옆구리 쪽에서 붉은 선혈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세상에…….”
은수는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 속 휴대폰을 꺼냈다. 119에 신고해야 한다.
화면에는 신호 한 칸이 간신히 떴다가 사라졌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잡음 섞인 연결음이 두 번 울리고 끊겼다. 이곳은 구급차가 들어오기에도 한참이 걸리는 외딴곳이었다. 폭우로 산사태 주의보까지 내려진 터라, 도로는 이미 마비되었을 게 뻔했다.
남자가 은수의 소매를 움켜쥐었다. 아주 미약한 힘이었지만, 절박함이 느껴졌다.
“사, 살려…….”
갈라진 목소리가 빗소리 사이로 새어 나왔다. 남자의 눈이 아주 잠깐 떠졌다가 다시 감겼다. 검은 눈동자 속에 담겼던 것은 공포인지, 혹은 간절함인지 알 수 없었다.
은수는 이를 악물었다. 일단 안으로 들여야 했다. 여기서 내버려 둔다면 이 남자는 내일 아침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될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남자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가녀린 은수의 체구에 비해 남자는 너무나 컸고 무거웠다. 빗물에 젖은 몸은 자꾸만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제발…… 조금만 도와주세요. 네?”
은수는 헐떡이며 남자를 부축해 현관으로 향했다. 한 걸음 뗄 때마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진흙탕에 미끄러져 무릎이 까지고 빗물이 눈을 가려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영겁 같은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거실 불빛 아래로 남자를 끌어들였을 때 은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따뜻한 실내등 아래에서 본 남자의 상태는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옆구리의 상처는 날카로운 칼날에 베인 듯 깊었고, 코트 곳곳에는 흙먼지와 혈흔이 뒤엉켜 있었다.
은수는 서둘러 구급상자를 가져왔다. 예전에 배워두었던 응급처치 지식을 총동원해 상처를 지혈하고 소독했다. 남자는 간간이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냈지만, 눈을 뜨지는 못했다.
옷을 갈아입혀야 했다.
젖은 옷을 계속 입고 있으면 저체온증으로 위험해질 수 있었다. 은수는 얼굴을 붉히며 남자의 코트와 셔츠를 조심스럽게 벗겨냈다. 탄탄한 근육 위로 드러난 크고 작은 상처들이 그의 험난했던 밤을 짐작게 했다.
밤새도록 은수는 남자의 곁을 지켰다. 수건을 적셔 열을 내리고 수시로 맥박을 확인했다. 창밖의 빗소리는 조금도 잦아들지 않았고, 시계 초침 소리만이 방 안의 정적을 깨뜨리고 있었다.
새벽 5시.
동이 트기 직전의 푸르스름한 어둠이 거실을 채울 무렵, 남자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은수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남자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어젯밤 보았던 그 검은 눈동자가 허공을 헤매다 이내 은수에게 머물렀다.
“……여긴?”
목소리는 잠겨 있었지만, 어조는 차분했다.
“저, 제 집이에요. 어젯밤에 대문 앞에 쓰러져 계셔서…….”
남자는 멍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자신의 몸을 덮은 담요와 붕대가 감긴 옆구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은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경계심도, 감격도 없었다.
오직 거대한 공백만이 존재했다.
“당신은…… 누구죠?”
“네? 아, 저는 한은수라고 해요. 그쪽 성함은…….”
은수의 질문에 남자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는 무언가 필사적으로 떠올리려는 듯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성함…… 이름…….”
남자의 입술이 달달 떨렸다.
한참을 그렇게 괴로워하던 그가 텅 빈 눈으로 은수를 보며 속삭였다.
“모르겠습니다.”
“네?”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은수는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았다. 창밖의 비는 이제 잦아들고 있었다.
하지만 은수의 마음속에는 어젯밤의 폭우보다 더 거센 소용돌이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기억을 잃은 남자.
그리고 그를 제 집 안으로 들인 자신.
이것이 구원인지, 아니면 파멸의 시작인지.
은수는 아직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