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의 다정한 살인마

24화: 법정의 시간
차가운 법정의 형광등 아래, 공기는 얼어붙은 것처럼 서늘했다. 피고인석에 서 있는 사내는 더 이상 예전의 피투성이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강태오는 짙은 남색 정장 겉옷을 단정하게 입고 있었다. 붕대로 고정된 한쪽 어깨는 아직 온전히 회복되지 않아 자세가 조금 기울어 있었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하고 맑게 가라앉아 있었다.
방청석의 가장 앞줄에 앉은 한은수는 마른 입술을 깨물며 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은수의 손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고 그녀의 마음속에는 지난 수개월 동안 겪었던 지옥 같은 시간들이 생생하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채석장 폐광이 붕괴된 지 정확히 석 달이 지났다. 당시 붕괴된 흙더미 속에 갇혀 있던 강태오는 구조대원들의 밤샘 굴착 작업 끝에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거대한 시멘트 잔해가 그를 덮쳐 내릴 때, 격투 과정에서 무너져 비스듬히 쓰러져 있던 낡은 철제 캐비닛이 천장 잔해 일부를 지탱했다. 그 아래 생긴 좁은 삼각 생존 지대가 그를 압사의 위험으로부터 가까스로 지켜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구조되었을 때 그의 상태는 처참했다. 등뼈와 갈비뼈가 여러 군데 골절되었고 오태수의 칼에 찔린 옆구리 상처는 패혈증으로 진행되어 혼수상태에서 삼 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강태오가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채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매는 동안, 은수는 매일 병원 대기실의 차가운 플라스틱 의자에서 밤을 지새웠다.
그녀는 작은 드로잉 북에 강태오의 얼굴, 왼쪽 눈썹 끝에 새겨진 작은 흉터, 부엌에서 사과를 깎아주던 큰 손을 끊임없이 그리며 그가 깨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강태오가 혼수상태에서 사투를 벌이는 동안, 은수는 바깥 세계에서 또 다른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검찰과 경찰은 처음에 강태오를 연쇄살인 용의자로 기소하려 했다.
오태수가 꾸며둔 정황 때문에 강태오의 지문과 혈흔이 기존 살인 현장에서 발견되었고 은수와의 동거 역시 그가 은수를 인질로 삼아 은신처를 확보한 것처럼 해석되었다.
경찰 수사관들은 병실에 누워 있는 은수를 찾아와 강압적인 태도로
“강태오에게 감금당하고 위협받았던 사실을 인정하라”
며 유도 신문을 펼쳤다.
일부 언론은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쏟아내며 강태오를 '두 얼굴의 연쇄살인마'로 낙인찍었고 은수의 집 앞에는 기자들이 진을 치고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려대며 사생활을 짓밟았다.
하지만 은수는 결코 굴하지 않았다. 그녀는 병실에서 퇴원하자마자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고 오태수의 폐광 아지트에서 목숨을 걸고 찍어온 휴대폰 속 사진들을 결정적인 무죄 증거로 제출했다.
사진 속에는 오태수가 자신의 범죄 행위를 세밀하게 기록해 둔 스크랩북과 피해자들의 유품, 무엇보다 강태오의 동생 안혜원의 사진 위에 오태수가 직접 휘갈겨 쓴 핏빛 낙서가 고스란히 찍혀 있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정밀 감정 결과, 그 낙서와 아지트의 혈흔들은 오태수의 필적 및 DNA와 일치하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폐광에서 회수된 녹음기와 캠코더에는 오태수가 범행 전후를 기록한 음성과 영상 일부도 남아 있었다. 피해자 유품 봉투의 섬유와 혈흔 역시 기존 사건 기록과 맞아떨어졌다. 이로써 오태수가 '적색 야경 연쇄살인 사건'의 진범임이 명백히 밝혀졌고 강태오에게 씌워졌던 살인 용의자 누명은 공식적으로 벗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법적 책임이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강태오가 사적 복수를 위해 강력계 형사직을 이탈하고 허가 범위를 벗어난 무기를 휴대했던 점, 불법 사설 조사를 감행하며 피의자 주거지와 폐건물에 무단 침입했던 점, 오태수와의 사투 과정에서 법을 벗어나 사적인 폭력을 행사한 혐의는 여전히 엄연한 범법 행위로 남아 있었다.
사법 체계를 무시한 사적 제재는 법치국가 아래에서 처벌을 면하기 어려웠다.
피해자 유족들 중 일부는 강태오가 진범을 밝혀낸 공을 인정하면서도, 그가 법 밖에서 움직인 시간을 쉽게 용서하지 못했다. 강태오는 그 시선들을 피하지 않았다. 이미 그는 형사직 복귀를 포기했고 자신이 넘은 선에 대한 책임을 법정에서 받아들이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증인 한은수, 증언대로 나아와 주십시오.”
재판장의 차가운 목소리가 법정에 울려 퍼졌다. 은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증언대로 걸어 나갔다. 검은색 치마 정장을 단정하게 입은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지만 재판장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단단했다.
법정 방청석은 취재진들의 노트북 타이핑 소리와 방청객들의 나직한 수군거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증인은 피고인 강태오와 수개월 동안 동거하며 그의 정체를 지켜보았습니다. 피고인이 본인의 신분을 숨기고 증인을 기만하거나 위협한 사실이 있습니까?”
검사의 냉정한 질문에 은수는 방청석의 가림막 너머로 피고인석에 서 있는 강태오를 바라보았다. 강태오 역시 고개를 돌려 은수를 응시했다. 그의 깊은 눈동자에는 은수를 향한 한없는 미안함과, 동시에 결코 흔들리지 않는 신뢰가 가득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그는 단 한 번도 저를 위협하거나 기만한 적이 없습니다.”
은수는 법정이 떠나가라 또렷하고 굳건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는 기억을 잃어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도 늘 타인을 위해 헌신하고 저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매일 아침 따뜻한 식사를 준비해 주었고 제가 다쳤을 때는 밤새도록 제 곁을 지키며 간호해 주었습니다. 진짜 범인 오태수가 저희 집에 침입해 저를 인질로 잡고 칼을 들이댔을 때…… 그는 저를 살리기 위해 유리 파편 위에 스스로 무릎을 꿇었습니다. 마지막 순간 폐광이 무너져 내릴 때조차 자신의 온몸을 던져 저를 감싸 안았고 저를 출구 밖으로 밀쳐낸 뒤 자신은 붕괴되는 암석 속에 갇혔습니다.”
은수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고 눈가에는 결국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세상이 말하는 괴물이 아닙니다. 법이 미처 지켜주지 못했던 동생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형사였고 저에게는 목숨을 바쳐 저를 구해준 소중한 사람입니다. 피고인이 법을 어긴 부분에 대해서는 책임을 피할 수 없겠지만 그가 처했던 극한의 상황과 그가 지키고자 했던 생명의 무게를 재판장님께서 부디 헤아려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은수의 절절한 호흡과 증언이 끝나자 법정 안은 잠시 엄숙한 침묵에 휩싸였다. 방청석에 앉아 있던 일부 시민들과 기자들 사이에서도 나직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재판장은 안경을 치켜쓰며 강태오를 바라보았다.
“피고인 강태오, 마지막으로 진술할 기회를 주겠습니다.”
강태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부상당한 몸은 비록 온전치 못했으나, 그의 자세는 곧고 위엄이 있었다.
“저는 전직 형사로서 대한민국 사법 체계의 엄정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오태수를 쫓는 과정에서 제가 저지른 무단 침입, 불법 무기 휴대, 사적 폭력 등 모든 범법 혐의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있으며 재판장님께서 내리실 처벌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사적인 복수심에 눈이 멀어 법치주의의 한계를 넘어선 저의 행동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과오입니다. 다만 제가 기억을 잃고 헤매던 어두운 밤에 저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 주고 저의 정체를 의심하면서도 끝까지 진실을 확인해 준 한은수 씨에게 머리 숙여 깊은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그녀 덕분에 저는 분노와 피비린내로 가득 찼던 복수의 사냥개에서 비로소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온기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저지른 죄에 대한 합당한 벌을 받고 나와 떳떳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그녀의 믿음에 보답하고 싶습니다.”
강태오의 담담하면서도 진심 어린 최후 진술이 끝나자, 재판장은 잠시 서류를 정리하더니 최종 판결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주문. 피고인 강태오를 징역 1년 6개월에 처한다. 다만, 피고인이 강력계 형사로서 오랜 기간 헌신한 점, 수사기관에 아지트 증거를 인계하고 이후 조사에 전면 협조한 점, 여동생의 참혹한 죽음이라는 참작할 만한 동기가 있었던 점, 진범 오태수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시민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여 치명상을 입은 점 등을 참작하여 이 판결의 집행을 3년간 유예한다. 아울러 120시간의 사회봉사를 명한다.”
탕! 탕! 탕!
법봉이 세 번 울려 퍼지는 순간, 은수의 가슴 깊은 곳에서 참았던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굵은 눈물방울들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실형을 면한 집행유예 판결이었다.
비록 형사로서의 지위는 완전히 잃어버렸고 과거의 오점은 남았지만 그는 마침내 차가운 감옥이 아닌 따뜻한 은수의 곁으로 완전히 돌아올 수 있게 된 것이다.
법정이 정리되고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소란스러움 속에서 강태오는 법대 아래로 내려와 천천히 은수에게 다가왔다. 그의 굳은 손이 뻗어 나왔고 은수는 주저하지 않고 그 손을 꽉 움켜쥐었다.
“고맙습니다, 은수 씨. 나를 포기하지 않아 줘서.”
강태오의 다정한 미소는 예전 붉은 벽돌집 부엌에서 그가 사과를 깎아주며 지어 보이던 그 미소와 똑 닮아 있었다. 은수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의 품에 가만히 고개를 묻었다.
그들은 법원 건물을 빠져나와 밖으로 걸어 나왔다. 서부지검 법조타운 앞마당에는 가을 오후의 햇살이 그들의 어깨 위로 따뜻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찬 바람이 스쳤지만 은수는 강태오의 코트 자락을 단단히 잡은 채 함께 걸어갔다. 비록 그들의 시작은 피비린내 나는 폭우와 살인마의 몽타주로 얽힌 비극이었지만 마침내 도달한 법정의 끝에서 그들은 죄악의 그늘을 벗고 빛을 향해 걸어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