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으로
내 집의 다정한 살인마25화

내 집의 다정한 살인마

내 집의 다정한 살인마

25화: 비 갠 뒤의 온기

창문을 두드리는 여름 빗방울 소리는 이제 더 이상 은수에게 예전 같은 공포만을 자아내지는 않았다. 그래도 비가 갑자기 굵어지는 밤이면 그녀는 아직도 한 번씩 손을 멈추고 현관 쪽을 돌아보곤 했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빗물은 유리창 너머의 세상을 흐리게 만들었고 거실 한구석에 켜둔 주황색 스탠드 불빛은 방 안을 아늑하게 채우고 있었다.

은수는 이젤 앞에 앉아 붓끝에 노란색 물감을 묻혔다. 캔버스 위에는 자욱한 밤안개 속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붉은 벽돌집과 현관문 틈새로 흘러나오는 불빛이 유화의 두터운 질감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붓질 한 번에 과거의 흉터가 조금 옅어지고 또 한 번의 붓질에 어렵게 도달한 평화가 캔버스 위에 겹겹이 칠해지고 있었다.

법정의 판결이 있은 지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계절은 여러 번 옷을 갈아입었다. 가을이 지나고 혹독하게 추웠던 겨울이 갔다. 다시 새싹이 돋아나던 봄을 지나 어느덧 두 번째 초여름이 찾아와 있었다.

그 시간 동안 많은 것이 변했고 동시에 변하지 않은 것들도 있었다. 붉은 벽돌집 마당 구석에는 강태오가 직접 가꾼 작은 정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로즈마리와 라벤더, 민트 같은 허브들이 초여름 비를 맞아 짙은 초록빛을 띠며 싱그러운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강태오는 법원으로부터 선고받은 사회봉사 시간을 모두 성실히 이행했다. 그는 더 이상 피비린내 나는 강력계 형사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연쇄살인 용의자로 쫓기던 도망자도 아니었다.

과거 형사 시절 모아두었던 작은 저축과 동생의 유품을 정리한 돈으로 그는 은수의 집 근처 읍내에 작은 원목 가구 공방을 열었다. 공방은 소나무와 참나무 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대패질을 할 때마다 곱슬곱슬한 톱밥이 떨어졌고 거친 사포질 끝에 원목의 표면은 조금씩 매끄러워졌다.

복수의 사냥개로 살아가며 피와 차가운 철제 무기만 만지던 그의 거친 손은 이제 나무 향이 나는 목재를 정성껏 다듬고 누군가의 안식처가 될 가구를 만드는 손이 되어 있었다. 나무를 다듬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노동 속에서 강태오는 마음속에 깊게 파인 과거의 죄책감과 슬픔을 조용히 견디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다.

물론 오태수와의 사투로 입었던 부상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날씨가 찌푸리거나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이면, 강태오는 옆구리를 지긋이 움켜쥐며 밭은기침을 토해내곤 했다. 은수도 상담실에서 배운 호흡법을 아직 잊지 않았다. 두 사람은 완전히 괜찮아진 것이 아니라, 괜찮아지는 법을 매일 새로 익히고 있었다.

그의 왼쪽 눈썹 끝에 새겨진 작은 흉터와 어깨의 수술 자국은 그들이 함께 겪었던 밤들의 지울 수 없는 흔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아픔과 죄책감만의 상징이 아니었다. 서로의 목숨을 구해내고 그 뒤의 시간을 책임지며 살아온 증거이기도 했다.

“은수 씨, 슬슬 출발해야 합니다. 전시회 오프닝 리셉션 시간이 늦겠어요.”

부엌 쪽에서 들려오는 낮고 다정한 목소리에 은수는 붓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렸다. 식탁 앞에는 흰색 셔츠 소매를 단정하게 걷어올린 강태오가 따뜻하게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 두 개를 내려놓고 있었다.

그의 넓은 어깨와 곧은 등은 죄수복이나 환자복이 아닌 편안한 옷 아래서 그 어느 때보다 든든해 보였다. 그의 얼굴에 걸린 희미한 미소는 예전 은수가 그에게 '진우'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을 때 붉은 벽돌집에서 보았던 청년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네요. 이 그림만 마무리하고 가려고요.”

은수는 찻잔을 받아들며 미소 지었다. 따뜻한 레몬그라스 차의 향기가 거실의 공기를 향긋하게 채웠다. 오늘은 은수의 첫 단독 개인 전시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서 남의 글에 그림을 그리던 은수가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온전히 내걸고 갤러리에서 회화 전시를 열게 된 것이다. 전시회의 타이틀은 '내 집의 다정한 살인마'가 아니었다. 은수가 정한 이름은 '비 갠 뒤의 집'이었다.

전시회에 출품된 수십 점의 작품들은 폭우 속에서 마주했던 남색 코트의 사내, 유리 파편 위로 번지던 붉은 온기, 붕괴되는 어둠 속에서 뻗어 나오던 손끝 그리고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나는 원목 가구의 결을 입체적인 화풍으로 담아내고 있었다.

큐레이터들은 그녀의 작품들을 벽에 걸며

"어둠 속에서 피어난 숭고한 구원과 다정한 휴머니즘이 조화롭게 담겨 있다"

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준비 다 됐습니다. 가시죠.”

강태오는 가구 공방에서 만든 튼튼한 원목 우산을 챙겨 들고 은수에게 겉옷을 씌워주었다. 은수는 그의 든든한 팔에 자신의 팔짱을 가만히 끼웠다. 두 사람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슈우우우—

마당의 젖은 풀잎 냄새가 빗물과 섞여 싱그럽게 피어올랐다. 무너졌던 붉은 벽돌집의 대문은 이제 강태오가 직접 공방에서 참나무를 깎아 만든 오크 원목 대문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대문 옆에 세워둔 우체통 안에는 더 이상 오태수의 조롱 섞인 편지나 협박 편지가 들어있지 않았다. 오직 이웃들이 보낸 안부 편지와 전시회 축하 엽서들만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강태오는 우산을 크게 펼쳐 은수의 머리 위를 가려주었다. 우산의 절반 이상이 은수 쪽으로 쏠려 있어 그의 오른쪽 어깨는 빗물에 빠르게 젖어 들어갔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은수를 바라보며 미소 지을 뿐이었다.

“어깨 젖어요, 태오 씨. 이쪽으로 좀 더 와요.”

“괜찮습니다. 은수 씨만 비에 젖지 않으면 됩니다.”

그의 한결같고 고집스러운 배려에 은수는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차오르는 뭉클함을 느꼈다. 사건 수사와 오태수의 사후 처리가 공식적으로 마무리된 후, 은수는 가끔 강태오에게 물어보았었다.

'만약 그날 밤 폭우 속에서 기억을 잃지 않았다면,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당신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때 강태오는 은수의 손을 꼭 쥐며 나직하게 대답했었다.

'기억을 잃지 않았다면 나는 오태수를 죽이고 나 또한 파멸했을 겁니다. 형사로서의 양심도 버린 채 평생 어둠 속을 헤매는 짐승으로 죽어갔겠지요. 은수 씨가 나를 마당에서 구해준 그 비 내리던 밤은, 나에게 단순한 기억상실의 밤이 아니라 괴물로 죽어가던 나를 다시 사람으로 붙잡아 준 밤이었습니다.'

은수는 그 대답을 평생 잊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를 구원했다.

강태오는 오태수라는 괴물로부터 은수의 생명을 지켜냈고 은수는 복수심에 찌들어 괴물이 되어가던 강태오의 영혼을 신뢰로 붙잡아 다시 인간으로 살아가게 만들었다.

그들의 인연은 피비린내 나는 폭우와 살인마의 몽타주라는 비극적인 오해로 시작되었지만 그 고통의 터널을 함께 통과한 끝에 마침내 평온한 햇살 아래 도달했다.

두 사람이 탄 차는 빗길을 부드럽게 달려 시내의 갤러리에 도착했다. 갤러리 입구는 벌써부터 많은 관객과 기자들로 붐비고 있었다. 은수의 그림들을 감상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깊은 여운이 서려 있었다.

은수는 전시실 한가운데서, 자신의 그림 중 가장 크고 화려하게 전시된 마지막 작품을 바라보았다. 그림의 제목은 '나의 다정한 사람'.

화폭 안에는 어두운 비 내리는 날, 붉은 벽돌집 부엌에서 주황색 조명을 받으며 은수를 향해 사과를 건네는 남색 코트의 사내가 그려져 있었다. 사내의 왼쪽 눈썹 끝에는 작은 흉터가 선명했지만 그의 눈동자만큼은 세상의 어떤 별빛보다 따뜻하게 은수를 비추고 있었다.

강태오는 그 그림 앞에 가만히 서서 오랫동안 캔버스를 응시했다. 그의 눈가에 맺힌 작은 이슬이 갤러리의 은은한 조명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였다.

그는 말없이 은수의 손을 잡았다. 은수는 그의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얽어 마주 잡았다.

“사랑합니다, 은수 씨.”

강태오가 은수의 귓가에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제 과거의 서늘함보다 오래 견딘 사람의 조심스러운 온기가 배어 있었다.

“저도 사랑해요, 태오 씨. 아니…… 나의 다정한 진우 씨.”

은수는 그의 가슴팍에 고개를 기댔다.


전시회를 무사히 마치고 깊은 밤 붉은 벽돌집으로 돌아왔을 때, 비는 여전히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지붕을 두드리고 있었다. 강태오는 부엌에 서서 은수를 위해 야채 스튜를 보글보글 끓이기 시작했다. 맛있는 냄새가 온 집안에 퍼졌다.

은수는 식탁에 턱을 괴고 앉아 그 다정한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진우 씨가 끓여주는 스튜는 여전히 맛있네요.”

“기억을 되찾아도 내 요리 솜씨는 그대로인 모양입니다. 다행이네요.”

강태오가 장난스럽게 답하며 스튜를 그릇에 담아냈다. 마주 보고 앉아 나누는 소소한 대화와 숟가락이 부딪치는 소리.

처음의 그 비 내리던 밤에는 피비린내와 절망만이 가득했지만 이제 그 집에는 서로를 향한 다정함과 사랑의 온기가 오래 머물고 있었다.

창밖에는 여전히 여름비가 주적주적 내리고 있었지만 그 비는 더 이상 그들의 세상을 얼어붙게 만드는 차가운 빗줄기가 아니었다. 상처와 슬픔을 단번에 지우지는 못해도, 새로 돋아나는 것들이 숨 쉴 자리를 적셔주는 비였다.

두 사람은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다시 시작되는 길고 조용한 인연을 향해 함께 발걸음을 내디뎠다.

(완결)

YOU MAY ALSO LIKE

이런 작품은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