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의 다정한 살인마

21화: 빗속의 고백
어두컴컴한 폐공가 천장의 틈새로 스며든 달빛이 바닥에 고인 빗물 위에서 차갑게 부서지고 있었다. 바람이 거칠게 불어와 낡은 목조 건물의 판자 틈을 흔들 때마다 기괴한 울음소리가 났다.
하지만 한은수는 그 소리가 무섭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세상은 오직 눈앞에서 숨을 고르는 강태오의 거친 숨소리, 그에게서 풍기는 비릿한 피 내음, 희미한 소독약 냄새로만 가득 차 있었다.
강태오는 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열려 있는 셔츠 깃 사이로 붕대에 감긴 상처가 움찔거릴 때마다 그의 짙은 눈썹이 잘게 떨렸다.
은수는 그 곁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그의 왼쪽 눈썹 끝에 아스라이 새겨진 작은 흉터를 손가락으로 가만히 쓸어내렸다.
"태오 씨."
은수의 나직한 부름에 강태오가 서서히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는 밤의 심연을 닮아 깊고 어두웠지만 그 안에는 은수를 향한 한없이 부드러운 온기가 여전히 흔들림 없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많이 아픕니까?"
강태오가 쉰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자신의 고통보다 은수의 안위가 먼저인 모양이었다. 은수는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눈물을 삼켰다.
“저는 괜찮아요. 조금 긁힌 것뿐이에요. 그것보다…… 태오 씨의 기억이 다 돌아온 거죠? 당신이 누구인지, 왜 그런 일들을 겪어야 했는지 전부 다요.”
강태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 낡은 천장의 먼지 서린 공간 속에서 그의 머릿속을 가득 메운 과거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강태오입니다. 서울시경 강력계 형사였지요.”
그의 첫마디는 나직하면서도 묘하게 낯설었다. 늘 자신을 '진우'라고 부르며 은수의 뒤를 따르던 다정한 남자의 목소리에, 원래 그가 서 있던 거칠고 서늘한 세계의 그림자가 덧씌워진 느낌이었다.
“적색 야경 연쇄살인 사건. 그게 내가 맡았던 마지막 사건이었습니다. 비 내리는 붉은 밤마다 벌어지던 잔혹한 연쇄살인. 피해자들은 모두 외진 골목에서 날카로운 메스에 목이 베인 채 발견되었습니다. 범인은 현장에 어떤 단서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마치 공기처럼 나타났다가 안개처럼 사라지는 놈이었지요. 수사본부는 놈을 잡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매번 헛발질만 할 뿐이었습니다.”
강태오의 목소리가 점차 낮아지더니 분노로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나는 놈의 범행 패턴을 집착에 가깝게 분석했습니다. 피해자들의 동선, 날씨, 범행 장소의 기하학적 위치까지 조사했지요. 수사망이 좁혀오자 오태수, 그 괴물은 위협을 느꼈던 겁니다. 하지만 놈은 비겁하게도 나를 직접 공격하는 대신 내 가장 소중한 존재를 과녁으로 삼았습니다.”
강태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등의 굵은 정맥이 터질 듯 솟아올랐다.
“혜원이…… 내 동생 안혜원입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서로가 유일한 가족이었던 아이였습니다. 혜원이가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던 어느 비 내리는 밤, 당직을 서고 있던 나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발신자 제한 번호였지요. 수화기 너머에서는 빗소리와 함께 오태수의 기분 나쁜 휘파람이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혜원이의 짧은 비명이 끊겼습니다.”
그의 시선은 대피소의 젖은 바닥이 아니라, 3년 전 경찰서 당직실의 형광등 아래로 돌아가 있었다. 차갑게 식은 커피, 수사본부 벽면에 빼곡히 꽂힌 피해자 사진, 그리고 수화기 너머에서 한순간 끊어진 동생의 숨소리까지. 은수는 그의 말이 설명이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은 현장이라는 것을 느꼈다.
은수는 숨을 들이켰다. 강태오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그의 뺨에 묻은 굳어버린 피딱지를 적시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미친 듯이 혜원이의 자취방 근처로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습니다. 어두운 골목길 가로등 아래, 혜원이는 차가운 빗물과 피 웅덩이 속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목에는 오태수 특유의 잔인한 메스 자국이 깊게 새겨진 채였습니다. 그 아이의 눈은 허공을 바라보며 굳어 있었고 젖어 있던 옷자락에는 아직도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었습니다. 내가 10분만, 아니 단 5분만 더 일찍 도착했더라면…….”
강태오의 가슴이 가파르게 들썩였다. 3년 전의 그 끔찍한 절망감이 이 낡은 대피소 안으로 고스란히 내려앉은 것 같았다.
은수는 말없이 그의 어깨를 두 팔로 꼭 안아주었다. 그의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거대한 체구의 사내가 아이처럼 웅크린 채 슬픔을 견뎌내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내 안의 무언가가 완전히 깨져버렸습니다. 형사로서의 이성도, 법에 대한 신념도 사라졌습니다. 게다가 나를 아들처럼 아껴주던 사수 강혁 선배님마저 놈에게 기습을 당해 식물인간이 되셨을 때, 저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습니다. 오직 오태수라는 괴물을 내 손으로 찢어 죽이겠다는 복수심만이 나를 움직였습니다. 나는 경찰 조직에 사표를 던지고 홀로 놈을 쫓기 시작했습니다. 오태수가 남긴 사소한 단서들을 역추적하며 사설 탐정처럼, 아니 굶주린 사냥개처럼 놈의 뒤를 밟았습니다.”
강태오는 은수를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다 며칠 전 밤, 마침내 오태수의 진짜 은신처를 찾아내 그를 이 근처 침엽수 숲속으로 유인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놈과 마주했지요. 혜원이의 원수를 갚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오태수는 생각보다 훨씬 교활하고 잔인한 놈이었습니다. 놈은 숲의 지형을 미리 파악하고 함정을 파놓았더군요. 나는 놈의 기습에 넘어져 머리를 심하게 얻어맞았습니다. 절벽 아래 흙더미 위로 굴러떨어지며 정신을 잃었지요. 그 충격 속에서 내 이성과 기억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가라앉아 버린 겁니다.”
“그래서…… 우리 집 마당에 쓰러지게 된 거군요.”
은수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렇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내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과거의 그 끔찍한 기억들, 혜원이의 죽음과 피비린내 나는 복수심이 내 뇌의 방어기제에 의해 통째로 봉인되어 버린 것이지요. 하지만 신기하게도…… 기억은 사라졌지만 내 몸과 무의식은 여전히 무언가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강태오는 은수의 뺨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은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내가 기억을 잃은 채 은수 씨의 집에서 깨어났을 때, 내 가슴속에는 알 수 없는 거대한 부채감과 죄책감이 응어리져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지키지 못했다'는 그 끔찍한 무의식적인 후회가 나를 지배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은수 씨를 보았을 때, 내 영혼이 본능적으로 속삭였습니다. 이 사람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목숨을 바쳐 지켜내야 한다고. 그것이 내 평생의 의무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의 절절한 고백이 은수의 가슴을 후벼팠다. 그가 이름도 모르는 자신에게 왜 그토록 헌신적이었는지, 왜 요리를 하고 청소를 하며 자신을 향해 그토록 애틋한 눈빛을 보냈는지 비로소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그는 '진우'라는 가짜 이름 속에서, 과거에 잃어버린 동생을 향한 속죄와 은수를 향한 순수한 애정을 동시에 불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은 괴물이 아니었어요.”
은수가 강태오의 손을 꼭 쥐며 말했다.
“몽타주를 보고 당신의 소지품에서 피 묻은 지갑과 메모들을 보았을 때 나는 너무 무서웠어요. 당신이 연쇄살인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알아요. 당신은 내 생명을 구해준 다정한 사람이고 동생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형사였다는 것을요. 다만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너무 멀리 몰아붙였다는 것도요.”
“태오 씨…….”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세요. 태오 씨의 잘못이 아니에요. 혜원이 씨의 죽음도, 오태수라는 괴물이 저지른 짓일 뿐 태오 씨 탓이 아니에요. 우리는 반드시 그놈을 잡을 거예요.”
강태오는 은수의 따뜻한 위로에 마음속을 짓누르던 거대한 바위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참혹했다.
“하지만 상황이 너무 나쁩니다. 오태수는 이미 나를 살인범으로 만들기 위해 오랜 시간 준비해왔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살인 현장에 나의 혈흔과 머리카락을 교묘하게 흘려놓았을 겁니다. 은수 씨의 스마트폰과 공유기 설정까지 몰래 조작해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한 것도 그자가 벌인 기만극이겠지요. 경찰이 나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고 쫓아온 이유도 그 때문일 겁니다. 오태수는 합법적인 공권력의 손을 빌려 나를 영원히 제거하려 하고 있습니다.”
강태오는 눈을 매섭게 빛냈다. 다시 예리한 사냥개 형사의 지성이 깨어나고 있었다.
“오태수를 잡으려면 놈의 아지트를 먼저 쳐야 합니다. 내가 기억을 잃기 직전, 놈의 은신처가 이 숲 깊은 곳에 있는 오래된 채석장 인근의 폐쇄된 탄광 건물이라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놈은 그곳을 자신의 '작업실'이자 도살장으로 쓰고 있었습니다.”
“그럼 그리로 가야겠네요.”
“안 됩니다. 은수 씨는 여기 남으십시오. 아니, 이 근처 민가로 내려가 안전하게 경찰의 보호를 받으세요. 거기는 정말 위험합니다. 오태수는 인간의 탈을 쓴 악마입니다. 내가 놈과 끝을 보겠습니다.”
“싫어요.”
은수는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나도 같이 가요. 나를 혼자 두고 가면 태오 씨가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신은 상처가 깊고 경찰의 눈도 피해야 해요. 내가 옆에서 도와줘야 해요. 게다가 오태수는 이미 나를 알고 있어요. 내가 어디에 있든 그 괴물은 나를 찾아내려 할 거예요. 차라리 태오 씨 옆에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해요.”
강태오는 은수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직감했다. 은수의 눈빛에는 흔들림 없는 결의와, 그를 향한 깊은 신뢰가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대신 내 지시에 무조건 따라야 합니다. 위험한 순간이 오면 지체 없이 도망치겠다고 내게 약속하십시오.”
“약속할게요.”
은수는 엷게 웃었다. 두 사람은 잠시 동안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무너져 내리는 낡은 목조 가옥 안으로 밤바람이 매섭게 불어와 뺨을 스쳤지만 맞잡은 두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 덕분에 그들은 더 이상 춥지 않았다. 창밖의 빗줄기가 서서히 가늘어지고 있었다. 안개 또한 조금씩 걷히며 어두운 하늘에 차가운 새벽빛이 푸르스름하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출발합시다.”
강태오가 아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옆구리의 붕대 틈으로 피가 조금 배어 나왔지만 그의 걸음걸이는 단호했다. 은수 또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그의 곁에 섰다.
두 사람은 폐공가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새벽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숲길은 차갑고 쓸쓸했지만 진실을 밝히기 위한 그들의 위태로운 여정은 이제 막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