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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의 다정한 살인마18화

내 집의 다정한 살인마

내 집의 다정한 살인마

18화: 뒤바뀐 진실

은수는 손가락 끝이 허얗게 질릴 정도로 축축하게 젖은 메모지를 움켜쥐고 서 있었다. 마당을 가로질러 불어오는 차가운 아침 바람이 뺨에 감은 거즈를 펄럭이게 했다.

안개 너머 숲길 초입에서 유령처럼 사라졌던 검은 우비 사내의 잔상이 은수의 뇌리 속에 박혀 떨어지지 않았다. 마당의 젖은 진흙 위에는 은수의 슬리퍼 자국 외에, 또 다른 거칠고 큰 장화 자국이 마당 대문 쪽을 향해 찍혀 있었다.

은수는 그 낯선 발자국을 바라보며 온몸의 털끝이 쭈뼛 일어섰다. 그 남자는 단지 숲길 초입에 서 있던 것이 아니었다. 어젯밤 은수와 진우가 피를 흘리며 대치하던 그 시간, 혹은 오늘 아침 은수가 마당으로 나오기 직전까지 이 대문 안쪽으로 걸어 들어와 우편함에 메모를 꽂아두고 사라진 듯했다.

‘진짜 괴물은 아직 네 마당에 숨어있다.’

은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서둘러 현관문 안으로 들어가 빗장을 질러 잠갔다. 문이 철컥 닫히는 소리와 함께 은수는 마룻바닥에 등을 기댄 채 주저앉았다.

혹시 진짜 살인마가 마당뿐만 아니라 이미 집 안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은수는 온몸을 떠는 손으로 부엌 문을 열어보고 다용도실의 낡은 문손잡이를 확인한 뒤, 어두운 지하실로 이어지는 나무 계단 아래를 손전등으로 비춰보았다.

지하실 문을 열었을 때 계단의 나무 바닥이 끼이익— 하고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고 낡고 건조한 참나무 계단은 은수의 쇠약한 체중이 얹힐 때마다 마치 마른 뼈마디가 부서지는 듯한 삐걱거림을 주방 안쪽까지 으스스하게 퍼트렸다.

지하실 구석의 차가운 벽돌 틈새에서 새어 나오던 습기와 메케한 곰팡이 냄새가 은수의 호흡기를 자극하여 기침이 터져 나왔고 목구멍에서 비릿한 피 맛이 일었다. 손전등 불빛 아래에서 먼지 더미가 유령처럼 춤을 추고 있었으나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지하실 구석의 어둠은 기괴하게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으나 비어 있었다.

은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2층으로 올라가 방문을 열었다. 침대 기둥에 황마 끈으로 결박된 채 고개를 꺾고 잠들어 있는 강태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뺨에는 흘러내려 마른 피눈물 자국이 흉측한 낙인처럼 번져 있었고 그의 손목을 옥죄고 있는 끈 주위에는 상처에서 배어 나온 핏방울들이 말라붙어 있었다. 은수는 미지근한 물을 대야에 담아와 타월을 적셨다. 그의 피투성이가 된 뺨과 굳어버린 이마, 황마 끈에 쓸려 피멍이 든 손목 주위의 혈흔을 아주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젖은 타월이 그의 이마 상처에 닿자 강태오가 몸을 흠칫 떨며 신음을 흘렸으나 잠에서 깨지는 않았다. 은수는 그의 뺨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와 맥박을 고스란히 느끼며 작업실 구석으로 걸어갔다. 은수의 머릿속에서는 지독한 자괴감이 소용돌이쳤다.

'내가 지금 묶고 있는 이 남자가 정말 괴물인가? 만약 아니라면 왜 내게 그런 살인의 조각들을 털어놓으며 스스로를 죽여달라 울부짖었던 걸까?'

은수는 구석에 놓인 아크릴 물감 상자를 열었다. 상자 주변에는 은수가 최근 캔버스에 칠했던 짙은 청색과 흙색 아크릴 튜브들이 무질서하게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 바닥 깊숙한 곳에서 예전에 진우 몰래 숨겨두었던 그의 소지품들을 다시 꺼냈다.

피 묻은 짙은 갈색 가죽 지갑, 세 번째 피해자 안혜원의 은반지, 그리고 신문 스크랩과 꼼꼼한 필적의 메모지. 지갑은 빗물과 피가 엉겨 붙어 가죽 모서리가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만질 때마다 오래된 가죽 특유의 비릿한 냄새가 올라왔다.

은수는 스탠드 조명 밑에 메모지를 바짝 들이대고 한 글자씩 밀도 있게 읽어 내려갔다.

[범인은 비 오는 날만 골라 피해자의 목을 찌르고 현장을 기하학적으로 청소한다. 이것은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한 청소가 아니라, 완벽한 질서 속에 시신을 박제하려는 강박이다. 그의 행동 반경은 서서히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은수는 미간을 짓푸렸다. 예전에는 그저 살인마가 자신의 범행을 정교하게 분석한 시나리오라고만 믿었다. 하지만 지금 머리가 맑아진 상태에서 다시 읽어보니, 문장 곳곳에서 기이한 괴리감이 느껴졌다.

은수는 진우가 부엌 화이트보드에 적어두었던 장보기 목록("단호박, 달걀, 도라지차")의 서체와 메모지의 필적을 대조했다. '달걀'의 'ㄹ'을 그리는 자음의 획, '도라지차'의 '차'의 자음 획의 꺾임새, 펜이 머물며 잉크가 번졌던 압력과 기울기가 소름 끼치도록 정확하게 일치했다.

‘범인은…….’

‘그의 행동 반경은…….’

자신이 살인마 본인이라면 왜 자기 자신을 ‘범인’ 혹은 ‘그’라는 삼인칭 객관적 단어로 지칭하겠는가.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이 문장은 범행을 즐기며 적은 자백문이라기보다, 범인의 심리와 방식을 바깥에서 추적하는 사람의 기록에 가까웠다.

은수의 손가락 끝이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서둘러 갈색 가죽 지갑을 열었다. 이전에는 지갑 안의 돈과 주민등록증만을 대충 훑어보았지만 이번에는 가죽의 이음새와 비밀 수납부까지 샅샅이 뒤적였다.

지갑의 카드 수납 칸 안쪽, 미세하게 튀어나온 얇은 가죽 내피 틈새가 은수의 눈에 걸렸다. 은수는 책상 위의 드로잉용 펜칼을 들어 그 가죽 틈새를 조심스럽게 째어냈다. 가죽이 찢어지는 찌르르한 소리와 오래된 가죽 먼지 냄새가 방 안으로 약하게 퍼져 나갔다.

그 안쪽 공간에서 얇게 접힌 코팅 종이 한 장과 법적 공문서 사본 몇 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함께 접힌 작은 메모에는 굵고 짧은 글씨가 남아 있었다.

[오태수에게 먼저 보여주지 말 것. 혜원이와의 관계는 마지막 확인용.]

그 아래 종이에는 등록기준지 경기도 수원시, 피해자 안혜원의 사망 일시(2023년 4월 12일), 그리고 강태오와의 이부 관계를 증명하는 붉은색 관인이 찍혀 있었다.

[피해자 안혜원과 강태오는 아버지가 다른 이부남매 관계임.]

은반지 표면에 새겨진 이니셜 'H.W'는 안혜원의 이름과 맞아떨어졌다. 은반지를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 돌려가며 관찰할 때, 그 은반지의 차가운 반사광이 은수의 흔들리는 동공에 맺혔다.

은수는 곧장 결론을 내리지 않으려 애썼다. 지갑 속 필적과 신문 스크랩의 분석 문장, 가족관계 서류, 그리고 은반지의 이니셜을 하나씩 나란히 놓고 보았다. 그제야 다른 가능성이 떠올랐다.

강태오는 동생의 넋을 기리기 위해, 혹은 진짜 살인마가 남긴 그 차가운 서명을 다시 읽기 위해 그 반지를 간직했을 수 있었다. 그를 살인범으로 가리키던 단서들이 실은 진짜 범인을 향한 처절한 추적의 발자국일지도 몰랐다.

은수는 자신이 강태오를 의심하며 그에게 칼날을 들이댔던 어젯밤의 기억이 너무나 죄스러워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모든 퍼즐 조각들이 은수의 머릿속에서 폭풍처럼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강태오가 안혜원의 주변을 미행했던 이유도 다르게 읽혔다. 그것은 그녀를 스토킹하여 살해하기 위함이 아니라, 진짜 살인마의 다음 타깃이 자신의 동생인 안혜원이라는 사실을 직감하고 그녀를 지키기 위해 그림자처럼 뒤따른 것일 수 있었다.

그날 밤 강태오가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의미가 달라지고 있었다. 그는 범행을 끝낸 살인자가 아니라, 범인을 뒤쫓다 늦게 도착한 사람일 수도 있었다. 시신 옆 소지품을 만진 손끝의 감각도 전리품을 정리한 기억이 아니라, 진짜 살인마의 ‘정사각형 서명’을 재고 분석하던 수사 행위였을 수 있었다.

오늘 오후 숲길에서 일어난 새로운 살인 사건 역시 은수는 섣불리 단정하지 않기로 했다. 강태오의 소매에 묻었던 피가 피해자를 찌른 피인지, 지혈을 하다 묻은 피인지 지금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다만 그의 손등에 난 방어흔처럼 보이는 새 상처와, 소매 안쪽까지 번진 피의 방향은 그가 흉기를 휘둘렀다기보다 누군가와 뒤엉켜 막아낸 쪽에 가까워 보였다.

그리고 우편함 봉투에 찍힌 작은 네모 문양. 강태오의 수사 노트 속 정사각형 서명 도해와 닮은 그 흙자국은, 누군가가 일부러 같은 기호를 은수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직 모든 사실이 확정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단서들은 적어도 하나의 가능성을 향해 기울고 있었다. 강태오는 살인마라기보다 살인마를 쫓던 사람일지 모른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에게 피와 기억을 덧씌워 은수 앞에 세워두고 있었다.

은수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태오 씨…… 살인마가 아닐지도 몰라. 나를 죽이려던 게 아닐지도 몰라…….”

은수는 비틀거리며 침대 기둥에 묶인 강태오에게 다가갔다. 은수의 기척에 강태오가 힘겹게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에 서린 것은 괴물로서의 자학이 아닌, 깊은 혼란이었다.

은수는 잠시 망설였다. 끈을 한 번에 풀어주는 것은 위험했다. 하지만 피멍이 든 손목은 이미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다. 은수는 펜칼을 들어 그의 손목을 묶고 있던 황마 끈의 가장 바깥 매듭부터 잘라냈다.

툭.

끈이 풀리자 강태오는 굳어버린 손목을 움켜쥐며 의아한 눈빛으로 은수를 바라보았다.

“은수 씨…… 왜 끈을 푸는 겁니까? 내가 위험하다고…… 내 안의 강태오가 널 찢어 발길지도 모른다고 맹세했잖아요.”

“태오 씨. 당신이 살인마라는 증거가 아니었어요.”

은수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지갑에서 뜯어낸 신분증과 가족관계증명서, 그리고 우편함에서 발견한 메모지를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걸 봐요. 이 메모에 적힌 글을 봐요. 당신은 범인을 '그'라고 부르고 있었어요. 그리고 안혜원 씨…… 그녀는 당신의 이부동생이었어요. 이 은반지는 전리품이 아니라, 당신이 붙잡고 있던 관계의 증거였을 수 있어요. 당신은 동생을 죽인 사람이 아니라 동생을 죽인 진짜 범인을 쫓던 사냥개였을지도 몰라요. 어제 오후 숲속의 피도, 아직 우리가 다시 확인해야 해요.”

강태오는 은수가 건넨 종이들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코팅된 신분증 속 자신의 차가운 얼굴과 동생 안혜원의 이름, 피로 물든 수사 기록의 활자들이 그의 뇌리를 강렬하게 타격했다. 은반지 안쪽의 작은 흠집을 보는 순간,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 흠집은 혜원이 어릴 때 계단에서 넘어져 생긴 것이라고 자신이 직접 놀리듯 말했던 기억이 아주 작게 되살아났다.

그 순간 그의 뇌 속에서 굳게 닫혀 있던 진짜 기억의 방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쏴아아아…….

비 오는 날 밤의 골목길. 동생 안혜원의 시신을 안고

“혜원아! 눈 떠봐! 제발!”

하고 통곡하던 자신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리고 골목 너머 어둠 속에서 자신을 비웃으며 기하학적인 손짓을 보낸 뒤 도망치던 검은 우비의 사내.

그 사내를 잡기 위해 미친 듯이 쫓아가다 숲길 비탈 아래로 굴러떨어지며 날카로운 바위와 흙에 머리를 찧던 충격과 통증의 감각이 마침내 제자리를 찾았다.


“내가…… 내가 혜원이를 죽인 게 아니었어…….”

강태오의 목소리가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깃들었던 차가운 살기가 완전히 지워지고 잃어버렸던 뜨거운 정의의 의지와 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지독한 슬픔, 그리고 은수를 향한 안도감이 가득 차올랐다. 그는 울부짖으며 은수를 꽉 껴안았다.

“내가…… 내가 혜원이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은수 씨……. 그런데 그 죄책감과 뒤엉킨 기억에 눈이 멀어, 당신마저 위험하게 만들었습니다. 당신이 이걸 다시 읽어주지 않았다면 나는 영영 나 자신을 범인으로 믿고 무너졌을 겁니다. 이제 도망치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요, 태오 씨. 당신은 내가 생각했던 괴물이 아니에요. 하지만 아직 끝난 건 아니에요.”

은수는 그의 등을 토닥이며 함께 울었다. 그들의 아슬아슬했던 동거는 마침내 오해의 껍질을 벗기 시작했다. 다만 그 아래 드러난 것은 구원만이 아니라, 아직 확인해야 할 피 묻은 진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안도감도 잠시였다. 은수의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우편함 메모의 마지막 문장이 은수의 뇌리를 서늘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진짜 괴물은 아직 네 마당에 숨어있다.]

두 사람은 천천히 포옹을 풀고 창밖의 짙은 안개 낀 마당을 응시했다. 진짜 연쇄살인마는 여전히 붉은 벽돌집 주변의 안개 속에 숨어 강태오의 기억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사냥의 덫을 조이고 있었다. 그들의 진짜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창밖에는 안개가 더욱 짙게 피어오르며 보이지 않는 살인마의 숨결처럼 집 안의 온기를 서서히 빼앗아가고 있었다. 강태오의 굳은 의지와 은수의 떨리는 안도가 교차할 때, 붉은 벽돌집 아래에는 폭풍 전야의 무거운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얽힌 시선 너머로, 안개 낀 오솔길의 어둠은 기괴하게 몸을 부풀리고 있었다. 가로등도 없는 어둠 속에서 젖은 장화 소리가 마당의 자갈을 지그시 누르고 지나가는 듯한 환청이 두 사람의 심장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강태오는 은수를 자신의 등 뒤로 숨기며 바닥에 떨어져 있던 식도를 다시 주워들어 어두운 대문을 경계했다. 그의 큰 손이 식도의 자루를 꽉 쥐었을 때 손바닥의 흉터가 붉게 벌어졌지만 눈빛은 흔들림 없이 차갑고 예리하게 대문을 노려보았다.

은수는 그의 넓은 등 뒤에 서서 자신의 떨리는 심장을 지그시 억눌렀다. 바람이 한 번 더 거세게 불어 낡은 대문을 사정없이 때리자 대문 빗장이 요란하게 흔들렸고 지붕 위의 함석 물받이가 사납게 삐걱이며 날카로운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마침내 다가온 진짜 살인마의 살기를 온몸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이 어둡고 외진 붉은 벽돌집은 이제 그들이 나누었던 마지막 따뜻한 피난처가 아니라, 안개 너머에 도사린 진짜 연쇄살인마를 끌어내기 위한 처절한 사투의 전쟁터로 서서히 변해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가쁜 숨소리를 들으며 마침내 시작될 밤의 혈전을 마주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몸을 웅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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