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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의 다정한 살인마17화

내 집의 다정한 살인마

내 집의 다정한 살인마

17화: 기억의 귀환 (하)

아침이 밝아왔지만 하늘은 여전히 밤의 장막을 완전히 걷어내지 못한 채 납빛의 어두운 구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 희뿌연 안개는 붉은 벽돌집의 유리창에 달라붙어 거대한 백색 장막처럼 집 안의 풍경을 차단했다.

어젯밤의 광기 어린 각성과 자아의 붕괴 이후 거실에는 죽음 같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진우, 아니 자신의 진짜 이름을 ‘강태오’로 기억해 낸 남자는 침대 발치 아래 주저앉아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그의 핏발 선 눈동자에는 자신이 보았거나 저질렀다고 믿는 장면들에 대한 혐오와 공포가 진흙처럼 끈적하게 묻어 있었다.

“은수 씨…… 제발 부탁입니다.”

강태오는 갈라지고 찢어진 목소리로 은수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두 손바닥은 마룻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다. 그의 이마에 붙었던 젖은 밴드가 완전히 뜯겨 나가며 어젯밤 찢어졌던 이마의 상처에서 다시 한 번 검붉은 핏방울들이 바닥으로 뚝, 뚝 떨어져 기분 나쁜 얼룩을 남겼다.

“끈을 가져와서 저를 묶어주세요. 내 안의 그 괴물이 언제 다시 깨어나 당신의 목덜미를 겨냥할지 저도 모릅니다. 머릿속에서 그 시야가 비웃고 있습니다. 당신이 나를 다정하다고 했던 순간들까지 비웃으며 당신을 정사각형의 마지막 꼭짓점으로 세우라고 속삭이고 있어요. 내가 나를 제어할 수 있을 때 어서 나를 결박하세요. 튼튼한 사슬이든 끈이든 상관없습니다. 제발 나를 묶어두세요. 이 집이 우리 둘의 무덤이 되기 전에.”

그의 눈에 맺힌 눈물은 어젯밤 흘렸던 그 다정한 ‘진우’의 눈물과 같았지만 그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압도적인 폭력성의 아우라는 은수의 숨통을 턱턱 막히게 했다. 은수는 침을 삼키며 뒷걸음질 쳤다. 그를 묶어두는 것만이 자신이 이 밀실 같은 집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임시방편임을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은수의 머릿속에는 온몸에 피를 흘리며 집 앞에 쓰러져 있던 진우를 데려온 밤의 기억이 어지럽게 스쳐 지나갔다. 그때는 상처 입은 사람이라고 믿고 외면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남자는 언제든 자신을 물어뜯을 수 있는 밤의 야수처럼 보였다.

은수는 1층 창고로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무릎의 통증이 느껴졌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어두컴컴한 창고 창문을 열자 눅눅한 곰팡이 냄새와 오래된 유화 물감의 알싸한 알코올 냄새가 코를 찔렀다. 먼지 쌓인 선반 구석에서 캔버스 액자를 마대 더미와 묶어둘 때 쓰던 튼튼하고 굵은 황마 끈을 찾아냈다. 거칠고 까끄러운 황마의 촉감이 손바닥을 거칠게 긁어왔다.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때, 강태오는 미동도 하지 않고 그 자세 그대로 엎드려 은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은수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두 손목을 등 뒤로 모아 쥐었다. 그의 손목 피부는 차갑고 축축했다.

서걱, 서걱.

은수는 굵은 황마 끈을 그의 손목에 여러 번 감아 단단히 매듭을 지었다. 끈의 거친 가시 같은 잔털들이 그의 피부를 쓸어내리며 마찰을 일으켰고 붉게 긁힌 자국들 사이로 미세한 피붙이가 맺혔다.

강태오는 은수의 손가락 끝 떨림을 돕기라도 하려는 듯 스스로 손목을 더 깊숙이 내밀며 끈을 더 강하게 조여 달라고 요구했다. 그의 단단한 팔 근육과 손목 안쪽의 핏대가 끈의 압박에 눌려 부르르 떨리는 것이 은수의 손바닥으로 그대로 전해졌다.

은수는 침대 모퉁이에 고정된 육중하고 무거운 참나무 기둥에 끈의 반대편 끝을 몇 번이나 복잡한 매듭으로 옭아맸다. 매듭이 완성되자 강태오는 힘없이 기둥에 몸을 기댄 채 주저앉았다. 끈이 그의 두꺼운 손목 피부를 깊숙이 파고들며 순식간에 붉은 피멍 자국을 만들어냈지만 그는 통증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 허공을 응시했다.

“고마워요, 은수 씨…….”

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의 입술은 바짝 말라 터져 피가 배어 있었다.

“이제…… 조금은 안심이 되는군요. 만약 내가 미쳐 날뛰더라도, 이 끈이 내 발목을 잡을 테니까요.”

은수는 그의 맞은편 바닥에 조심스럽게 주저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 놓인 황마 끈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도 슬픈 경계선이었다.

은수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다.

“진우 씨…… 아니, 태오 씨. 기억해 낸 것들을 말해줘요. 그날 밤…… 그리고 어제 오후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강태오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이마에 붙은 하얀 거즈 너머로 다시금 붉은 피가 희미하게 번져 나왔다. 그가 고백을 시작하자, 방 안의 공기는 얼어붙는 것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안혜원…… 내 기억 속의 세 번째 피해자입니다. 그녀를 쫓던 밤의 장면이 남아 있습니다. 내 머릿속은 비 오는 날의 완벽한 질서를 완성해야 한다는 미친 강박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 같아요. 왜 그런 살의를 품은 시야가 내 안에 남아 있는지 모릅니다. 가로등 아래 붉은 우산을 쓰고 빗물 속을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 젖은 가죽 구두가 아스팔트를 때리던 소리, 그리고 가로등 불빛이 바닥 물웅덩이에 붉게 깨지던 장면이 생생합니다. 누군가 그녀의 목줄기를 그었고…… 그 순간의 손끝 감각까지 같이 돌아왔습니다. 그 피가 골목길의 빗물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던 질척한 소리까지 기억납니다.”

강태오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시신이 쓰러진 뒤 현장은 완벽한 정사각형 구도로 정돈되었습니다. 내 가죽 수첩에 달린 금속 자로 시신과 소지품 사이의 간격을 재던 손, 지갑과 화장품과 빗, 그리고 은반지를 각 꼭짓점에 놓던 손의 감각이 내 손끝에 남아 있습니다. 바닥에 튄 피를 특수 약품 묻힌 흰 천으로 닦아 물길의 흐름과 맞추던 장면도요. 그 피 묻은 단서들이 내 옷 안감에 숨겨져 있었다면…… 내가 범인이거나, 적어도 범인처럼 현장에 있었다는 뜻이겠죠. 미친 짓입니다.”

은수는 온몸에 돋아나는 소름을 억누르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의 목소리는 기이할 정도로 건조하고 차분했다. 살인마의 뇌 속이 지닌 그 차가운 강박이 그의 쇳소리 섞인 독백을 타고 방 안 가득 울려 퍼졌다.

“오늘 오후의 살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약국을 나선 뒤 머릿속이 지워졌을 때, 내 몸은 숲길 산책로 쪽으로 향했습니다. 안개 속에서 노란 우의를 입고 전화를 걸며 걷던 마트 직원의 등이 보였고 내 안의 사냥개가 다시 눈을 뜬 것 같았습니다. 그녀가 가방을 쥐고 흔들 때 나던 비닐과 캔들의 달가닥 소리, 낙엽을 밟지 않으려 뒤꿈치를 들던 긴장감이 떠오릅니다. 흉기가 번뜩이고 붉은 피가 소매에 튀던 감각…… 그리고 숨이 멎은 몸 주변을 다시 청소하고 노란 가방과 전자기기를 정사각형 구도로 정렬하던 손길…….”

강태오는 갑자기 전신을 격렬하게 흔들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기둥에 묶인 황마 끈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기둥 가죽이 끼익, 끼익 비명을 질렀다. 그의 손목 상처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와 황마 끈을 적셨다.

“내가 그런 괴물입니다, 은수 씨! 나는 살아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구해주고 먹여 살려준 이 '진우'라는 껍데기 뒤에 강태오라는 이름이 숨어, 시시때때로 밖으로 나가 피를 묻히고 돌아왔을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나를 경찰에 넘기세요. 어서 전화기를 들어 112를 누르세요. 그게 은수 씨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강태오는 이마를 마룻바닥에 처박으며 울부짖었다. 이마의 거즈가 밀려나며 상처가 다시 터져 바닥에 피가 붉은 소용돌이 모양으로 번져 나갔다.

은수는 그가 털어놓는 잔혹한 장면의 묘사에 극도의 혐오감과 공포를 느끼면서도, 자신의 눈앞에서 피를 흘리며 스스로를 단죄해달라 울부짖는 남자를 바라보며 심장이 쪼개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의 기억 속에는 피해자의 단서들과 살인의 순간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다만 그것이 직접 저지른 기억인지, 목격과 추적과 죄책감이 뒤엉킨 왜곡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은수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손목을 기둥에 묶어두고 스스로를 경찰에 고발하라고 피눈물을 흘리며 애원하고 있었다. 그 모습만큼은 은수가 알고 있던 ‘진우’와 너무 닮아 있었다.

은수는 떨리는 몸을 일으켜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앉아, 바닥에 엎드린 그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쥐어 올렸다.

강태오는 눈물과 이마의 피로 얼굴이 엉망진창이었다. 그는 은수의 따뜻한 손바닥이 뺨에 닿자, 마치 구원을 갈구하는 젖은 짐승처럼 그녀의 손길에 얼굴을 비비며 나직하게 신음했다.

은수는 그의 뺨에 흐르는 피눈물을 닦아주며 차갑고 비린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상처약의 씁쓸한 요오드 맛과 피의 철분 냄새가 입안을 채우며 두 사람의 가쁜 숨결이 엉켰다.

그것은 구원이 아닌 파멸의 길로 걸어 들어가는 스스로를 향한 기괴하고도 잔혹한 서약과 같았다. 은수는 그의 목덜미를 꼭 껴안았고 묶여 있던 강태오는 더 큰 흐느낌을 터뜨리며 은수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새벽이 지나고 아침 8시가 넘었을 때 강태오는 마침내 극도의 정신적 탈진을 이기지 못하고 기둥에 묶인 채 까무러치듯 잠이 들었다. 그의 고개는 비스듬히 꺾여 있었고 그의 굳어있는 이마 상처에서는 붉은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은수는 그의 어깨에 담요를 덮어주고 지친 다리를 이끌고 거실로 내려왔다. 집 안의 눅눅한 공기를 환기하기 위해 현관문을 열었다. 안개 낀 아침의 서늘한 바람이 밀려들며 은수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흔들었다.

은수는 마당 구석에서 젖은 흙더미가 거칠게 파헤쳐진 흔적을 발견하고 흠칫 놀라 굳어졌다. 진우가 돌아오기 전 피 묻은 무언가를 묻어둔 흔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리가 저릿해졌다.

은수는 마당의 젖은 진흙을 밟으며 대문으로 걸어갔다. 실내 슬리퍼가 진흙 속에 푹푹 박히며 차가운 감촉이 발등을 스쳤다.

우편함에서 하얀 종이봉투를 꺼내 들었다. 우편함 문이 열릴 때 녹슨 쇠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이물감이 손목에 전해졌다. 봉투의 표면에는 수신인 이름도 없었다. 빗물에 번진 희미한 잉크 자국과 마른 흙이 찍힌 작은 네모 문양만 남아 있었다.

은수는 떨리는 손으로 젖어 흐물거리는 종이봉투를 조심스럽게 개봉했다. 바스락거리는 마른 종이 찢기는 소리가 유난히 선명했다. 종이에는 컴퓨터로 인쇄된 문구가 쓰여 있었다.

[강태오는 진짜 살인마를 쫓던 사냥개였다. 진짜 괴물은 아직 네 마당에 숨어있다.]

은수는 머리를 둔기로 강타당한 듯 굳어버렸다. 들고 있던 종이가 바람에 가볍게 흔들렸다.

‘진짜 살인마를 쫓던 사냥개?’

‘진짜 괴물은 아직 마당에 숨어있다?’

이게 무슨 미친 소리란 말인가. 강태오는 방금 전 은수의 방에서 자신이 안혜원을 죽이고 시신 주변을 정사각형으로 정렬했다고 생생하게 살인 과정의 조각들을 털어놓지 않았던가.

그때였다.

바스락.

대문 너머, 짙은 안개로 가득 찬 숲길 초입의 수풀 속에서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왔다. 은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안개 저편, 수풀의 실루엣 너머로 검은색 우비를 입은 누군가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서 있었다. 그의 장화 아래 묻은 숲의 진흙이 빗물을 받아 어둡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후드 깊은 음영 속으로 차가운 눈동자가 은수를 노려보고 있는 듯한 오한이 일었다.

그는 은수가 우편함의 메모를 읽는 모습을 미동도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안개가 바람을 타고 흘러 그 남자의 실루엣을 잠시 가렸고 남자는 이내 숲속 깊은 곳으로 스며들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은수는 메모를 가슴팍에 꼭 움켜잡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방 위층에 묶여 있는 남자가 괴물이 아니라면, 진짜 괴물은 누구란 말인가. 그리고 이 우편함에 메시지를 남긴 사람은 누구인가.

안개 낀 붉은 벽돌집 아래, 뒤바뀌기 시작한 진실의 껍질이 무서운 균열을 일으키며 새로운 파국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창밖의 빗소리는 완전히 멎었지만 은수의 세계에는 한층 더 춥고 잔인한 장마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은수는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으로 종이를 꼭 구겨 쥐며 위층에 잠든 남자의 가쁜 숨결 소리를 머릿속에 그렸다. 그들의 다정했던 동거는 이제 가장 어둡고 차가운 미스터리 속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가고 있었다.

창밖에서 가볍게 흔들리는 나뭇가지 소리와 집 안에 잠든 남자의 고요한 숨소리만이 은수의 아침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붉은 벽돌집은 그들이 만든 침묵 속에서 서서히 가라앉는 작은 배처럼 위태로웠고 은수의 눈앞에 흐릿하게 지는 안개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살인마의 미소처럼 차갑게 흘러내렸다.

살기 위해선, 그리고 이 위태로운 남자를 지키기 위해선 그녀 스스로가 이 핏빛 수수께끼를 풀어내야만 했다. 은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굳어지는 두 손을 마른 주머니 속에 찔러 넣었다.

차가운 종이 메모지의 감촉이 손가락 끝을 자극했고 머리 위 2층 방 기둥에 묶인 채 잠든 그 남자가 과연 다정한 연인인지, 잔혹한 사냥개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에 대한 치열한 사투의 막이 이제 막 오르려 하고 있었다.

바람이 한 번 더 거세게 불어 낡은 대문을 사정없이 때리자, 대문 빗장이 둔탁하게 울리며 은수의 가녀린 온몸을 긴장과 공포 속으로 세차게 밀어 넣었다. 그녀의 등 뒤로 피어오르는 안개는 마치 그녀의 발목을 휘감아 붉은 벽돌집 아래로 영원히 가라앉히려는 괴물의 다정한 손길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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