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의 다정한 살인마

15화: 피 묻은 손
문고리가 아래로 덜컥거리며 비명처럼 거친 마찰음을 냈다.
이중 잠금쇠에 걸려 열리지 않는 현관문 틈새로 바깥의 차가운 빗방울 냄새와 숲속의 흙비린내가 거실 안으로 밀려들었다.
“은수 씨…… 안에 계시죠? 문이 안 열리네요. 저 왔어요, 은수 씨…….”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진우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평소의 그 상냥하고 믿음직한 온기를 담고 있었지만, 지금 은수에게는 그 속삭임이 마치 사냥감을 유인하는 교활한 포식자의 소리 없는 덫처럼 들렸다.
은수는 거실 구석의 어둠 속에 몸을 감춘 채 싱크대 서랍에서 꺼내 쥔 식도를 두 손으로 꽉 움켜잡았다.
날카로운 칼날이 스탠드의 희미한 불빛을 받아 서늘한 은빛 궤적을 그리며 번뜩였다.
손바닥에 축축하게 배어난 식은땀 때문에 칼자루가 자꾸만 미끄러지려 했다.
은수는 문 너머에 서 있을 그의 모습을 상상했다.
비에 젖은 채 어두운 눈빛으로 문손잡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남자의 실루엣.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 집의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는 은수에게 가장 달콤한 구원의 멜로디였다.
과거의 은수는 늘 지독한 고독 속에서 살았다.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살아가며 사방이 침엽수림으로 가로막힌 이 외딴 붉은 벽돌집에 자신을 가둔 것은 다름 아닌 그녀 스스로였다.
세상과의 소통을 끊고 밤낮없이 태블릿 화면만 바라보며 생계를 이어가던 그녀에게, 어느 날 폭우 속에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굴러들어온 이 남자는 낯선 침입자이자 동시에 유일한 구원자였다.
매일 아침 은수를 위해 버터에 토마토와 달걀을 볶아 노릇한 달걀 요리를 만들던 그의 손길, 노른자가 톡 터지는 소리와 고소한 향기가 부엌을 채울 때 은수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꼈다.
매끄럽게 닦인 창틀, 가지런히 정돈된 식기들, 은수가 작업하는 소리를 배경 삼아 조용히 책을 읽던 그의 단정한 모습.
그 완벽한 일상이 은수를 무섭게 중독시켰다.
하지만 그 다정함이 철저히 계산된 살인마의 가면이거나, 그의 내면에 잠재된 괴물의 기만극이라면 어쩌란 말인가.
은수는 112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자신의 떨리던 손가락을 기억했다.
신고해야 마땅했다.
그의 손을 타고 흐르는 진짜 피의 흔적과 밖에서 마주친 흉터 난 남자의 경고가 실재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만약 그를 내치고 신고한다면, 자신이 누렸던 유일한 온기였던 그 아름다운 동화는 영원히 산산조각 날 터였다.
그 지독한 모순과 공포가 은수의 심장을 찢어발겼다.
‘열어줘야 해. 열어주지 않으면…… 그가 이 문을 부수고 들어올지도 몰라. 아니, 범인이 정말 그가 맞다면, 내가 여기서 버틴다고 해서 살 수 있을까?’
은수는 떨리는 눈동자로 현관문을 응시했다.
아드레날린이 심장을 터뜨릴 것처럼 때려댔고, 관자놀이 부근의 맥박이 고통스럽게 고동쳤다.
은수는 떨리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어 현관문 앞으로 한 걸음씩 기어가다시피 걸어갔다.
문고리를 잡은 은수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철컥, 스르륵.
은수는 이중 잠금 빗장을 조심스럽게 풀고 도어록의 수동 레버를 돌렸다.
문이 서서히 열렸다.
문틈 사이로 들이닥친 것은 자욱한 안개와 장대비,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거대한 그림자처럼 서 있는 진우의 실루엣이었다.
그는 남색 장우산을 접어 쥔 채 흠뻑 젖은 몰골로 현관 디딤돌 위에 서 있었다.
셔츠는 빗물에 젖어 그의 탄탄한 가슴팍과 어깨에 무겁게 달라붙어 있었고, 앞머리는 물기를 머금어 이마와 눈가를 덮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읍내 약국 이름이 선명하게 인쇄된 작은 하얀색 비닐봉투가 쥐어져 있었다.
진우는 은수를 발견하자 안도 어린 표정을 지으며 억지로 눈꼬리를 접어 미소를 지었다.
“은수 씨…… 왜 문을 걸어 잠그고 계셨어요? 비밀번호를 눌렀는데 문이 안 열려서 깜짝 놀랐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어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버스도 늦고, 길도 미끄러워 생각보다 늦어졌습니다. 약국 밖에는 경찰들이 전단지를 붙이며 골목을 수색 중이더군요. 약사가 제 얼굴과 몽타주를 번갈아 보는 것도 느껴졌고요. '강태오'라는 살인마가 이 근처 숲으로 흘러들었다는 소문 때문에 경계가 너무 삼엄해졌습니다. 겁이 나서 얼른 집으로 와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미안합니다, 많이 기다리게 해서.”
진우는 현관 안으로 들어서며 젖은 우산을 우산꽂이에 꽂아 넣었다.
우산살 끝에서 맑은 빗방울이 바닥 타일 위로 톡, 톡, 톡…… 떨어지며 요란한 정적을 깨뜨렸다.
은수는 자신도 모르게 식도를 등 뒤로 숨기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진우는 은수의 창백한 안색과 비정상적으로 굳어 있는 어깨를 눈치챈 듯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뻗어 은수에게 다가오려 했다.
“은수 씨, 얼굴이 왜 이렇게 하얗게 질렸습니까? 몸이 많이 안 좋으신가요? 이마에 땀이 많이 나는데…… 감기 기운이 더 심해진 건 아닙니까?”
그가 손을 내밀며 다가오는 바로 그 순간, 은수의 시선이 그의 오른손 소매 끝자락에 못 박혔다.
그의 젖은 남색 셔츠 오른쪽 소매 깃에 짙고 거무스름한 붉은 얼룩이 길게 번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손자국처럼 번진 피의 궤적이 셔츠의 남색 원단을 타고 검붉은 자색으로 변색시켜 놓고 있었다.
빗물에 완전히 씻겨 내리지 않고 섬유의 깊숙한 곳까지 스며든,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끈적한 혈흔이었다.
은수의 코끝으로 빗물 냄새를 뚫고 희미한 철분 냄새가 들이쳤다.
은수는 벼락을 맞은 듯 굳어졌다.
전신에 오한이 일며 털끝이 꼿꼿이 일어섰다.
방금 전 TV 뉴스 속보에서 들었던 살인 사건의 흔적이, 지금 다정한 얼굴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남자의 소매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다, 다가오지 마…….”
진우는 멈칫하며 은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거대한 당혹감이 서렸다.
“은수 씨? 왜 그러십니까? 내가 무서운 건가요?”
“다가오지 말라고 했잖아!”
은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등 뒤에 숨겨두었던 식도를 진우의 얼굴을 향해 치켜들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주황색 조명 아래서 매섭게 번뜩였다.
칼날의 서늘한 기운이 두 사람 사이의 공기를 조각조각 찢어발겼다.
은수는 칼을 들고 뒷걸음질을 쳤지만 무릎 상처가 욱신거리며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진우가 본능적으로 은수를 붙잡아 주려 손을 뻗었으나, 은수는 칼끝을 미친 듯이 휘두르며 소리 질렀다.
“오지 마! 내 몸에 손대지 마!”
진우는 은수의 손에 들린 칼을 보며 눈동자를 크게 키웠다.
그의 시선은 칼날 끝에서 은수의 눈물 젖은 눈으로 다시 칼날로 어지럽게 움직였다.
그의 얼굴에서 다정한 연인의 미소가 조각조각 부서져 내렸다.
그의 가슴이 거칠게 오르내렸다.
“은수 씨…… 왜 이러시는 겁니까? 내가…… 내가 또 무슨 실수를 했나요? 어젯밤 일 때문이라면…… 내가 정말 은수 씨를 해치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약속했잖아요.”
“그 소매…….”
은수는 턱끝을 떨며 진우의 오른손 소매를 칼날 끝으로 가리켰다.
“그 소매에 묻은 피는 뭐야? 그게 뭔데……! 방금 뉴스에서…… 우리 집 앞 산책로에서 여자가 죽었다고 했어. 목을 찔려서…… 흉터 난 남자가 말한 게 진짜였어. 당신, 약국에 간 게 아니었잖아. 사람을 죽이러 간 거였잖아!”
은수의 목소리는 패닉과 배신감으로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다.
은수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뺨에 붙인 거즈를 적시며 흘러내렸다.
진우는 은수의 말에 자신의 오른쪽 소매를 천천히 내려다보았다.
젖은 남색 섬유 위로 끈적하게 번진 적갈색 핏자국이 그의 시선에 닿았다.
그 순간 진우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창백하게 변했다.
그의 무릎이 떨렸고 들고 있던 약국 비닐봉투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하얀 알약 상자들이 바닥으로 쏟어져 내렸다.
“이, 이게 왜…… 왜 여기에…….”
진우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소매를 만지려다 이내 손을 떼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의 왼쪽 눈썹 끝 흉터 부위가 다시 한번 벌겋게 충혈되며 부풀어 올랐다.
“아니야…… 내가 그런 게 아니야…… 나는 분명히…….”
진우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혼란스럽게 비틀거렸다.
그의 눈동자가 위아래로 거칠게 흔들렸다.
“저는 분명 약국에 갔었습니다. 두통약을 사고…… 돈을 내고 밖으로 나왔는데…… 그 직후에 갑자기 머릿속에서 날카로운 고주파 소리가 울렸습니다. 귀가 찢어질 것 같았고, 뒤통수가 망치로 맞은 것처럼 욱신거렸어요. 그리고…… 눈앞이 온통 하얗게 번졌습니다. 정신을 잃었던 것 같아요. 칼을 든 그림자와 비 오는 골목길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누군가의 목을 찌르고 그 주변을 닦아내던 모습이 찰나의 사진처럼 머릿속을 지나갔습니다.”
진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어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안개 낀 숲길 한가운데 서 있었습니다. 빗소리만 들렸고, 주변은 온통 축축한 나무들뿐이었어요. 손목이 욱신거려서 내려다보았는데……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저는 길을 잃고 헤매다 나뭇가지에 긁힌 줄 알고 옷자락으로 닦아낸 것뿐입니다. 정말입니다, 은수 씨. 제가 사람을 죽이다니요…… 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제가 정말 그런 짓을 한 건가요? 내 안의 그 괴물이…… 나 모르게 밖으로 나가 사람의 목을 그은 겁니까?”
진우는 거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소리 내어 울부짖었다.
그의 넓은 등판이 격렬하게 들썩였고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것은 빗물인지 눈물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가 울부짖을 때마다 이마에 붙어 있던 하얀 밴드가 빗물에 젖어 떨어져 나갔고 어젯밤 찢어졌던 상처에서 다시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스스로가 무섭습니다. 내 머릿속의 어둠이 나를 삼켜버린 것 같아요. 은수 씨가 보는 내가 정말로 그런 괴물이라면…… 차라리 저를 죽이세요.”
진우는 고개를 들어 은수의 식도를 쥔 손을 향해 무릎으로 기어갔다.
은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칼을 쥔 손을 뒤로 뺐지만 진우는 거침없이 다가와 자신의 목덜미를 은수의 칼날 끝에 바짝 들이밀었다.
날카로운 칼끝이 그의 하얀 목 살갗에 닿아 미세한 붉은 핏방울이 맺혔다.
그 한 방울의 핏방울이 목선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려 그의 남색 셔츠 깃을 붉게 적셨다.
“찌르세요…… 차라리 지금 나를 죽여줘요. 은수 씨의 손에 죽는다면 내 안의 괴물도 영원히 잠들 수 있을 테니까. 내 손에 누군가의 피를 묻히고 은수 씨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어 살아가는 것보다…… 차라리 지금 여기서 죽는 게 낫습니다. 제발…… 찔러줘요, 은수 씨. 나도 더 이상 나 자신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진우는 눈물을 흘리며 은수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핏발 선 눈동자 깊은 곳에 깃든 것은 기괴할 정도의 순수함과 자학적인 절망이었다.
은수를 향한 그의 복종과 맹목적인 애정이 날카로운 칼날 끝에서 슬픈 꽃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은수의 손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칼날 끝을 타고 흘러내리는 진우의 붉은 피가 은수의 손목으로 번져오는 것 같았다.
그의 목을 찌르고 도망쳐야 마땅했다.
그는 연쇄살인 혐의자였고 그의 옷에는 방금 일어난 살인 사건의 피가 묻어 있었다.
이성적으로는 그를 찔러 제압하거나 당장 도망쳐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 생존을 위한 유일한 길이었다.
하지만 그가 스스로 목을 내밀고 죽여 달라고 애원하는 이 순간만큼은 은수의 칼이 생존의 도구인지, 돌이킬 수 없는 살인의 시작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그가 정말 범인이라면 경찰에 넘겨야 했다. 그가 범인이 아니라면, 지금 자신의 손으로 이 남자를 찌르는 일은 오태수가 원했을지도 모를 또 하나의 파멸이었다.
그 판단의 틈으로 연민과 중독적인 애정이 밀려들어 칼날을 쥔 손가락 끝의 힘을 빼놓고 있었다.
어젯밤 자신을 씻겨주던 손길, 자신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던 남자의 실루엣이 칼날을 든 이성의 벽을 허물어뜨리고 있었다.
은수는 자신이 이 살인마의 다정한 지옥에서 결코 빠져나갈 수 없음을 직감했다.
진우가 흘린 피가 은수의 손가락 끝에 닿았을 때, 그 피는 공포스러운 오염이 아니라 서로의 비극을 묶어주는 붉은 끈 같았다.
“진우 씨…… 제발…… 왜 날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요…….”
은수는 결국 식도를 쥔 손의 힘을 풀었다.
탱그랑
하며 식도가 마룻바닥으로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냈다.
은수는 주저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통곡했다.
진우는 바닥에 떨어진 칼을 멀리 치워두고 은수를 자신의 품 안에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그의 품은 차갑게 젖어 있었으나 은수를 안은 심장만큼은 무섭도록 빠르게 고동치고 있었다.
진우는 은수의 젖은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내가 지키겠습니다. 내 기억이 돌아와 내가 괴물이라는 것이 밝혀지더라도, 은수 씨만큼은 절대로 해치지 않게 나를 묶어두세요. 내 목줄을 당신이 쥐고 있으니까요.”
안개 낀 붉은 벽돌집 안의 침묵은 그들의 파멸적인 운명을 선포하는 종소리와 같았다.
거실 벽면의 낡은 괘종시계가 희미하게 흔들리며 무거운 소리를 냈고, 두 사람의 젖은 옷이 천천히 마르는 동안 밤의 냉기가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기억을 잃은 살인마와 그 살인마의 다정하고 슬픈 덫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희생자.
이제 그들의 위태롭고 잔혹한 포옹은 차가운 어둠보다 더 깊은 영원의 심연 속으로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창밖에는 피할 수 없는 파국을 재촉하듯 굵은 장대비가 지붕을 하염없이 두드려 대고 있었고, 붉은 벽돌집은 그 거대한 장마 한가운데서 침묵을 지킨 채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