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의 다정한 살인마

14화: 피어오르는 의심의 불꽃
폭풍 같은 밤이 지나간 자리는 기이할 정도로 정결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은수가 아침 햇살에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시선이 닿은 곳은 어젯밤 대추차 잔이 요란하게 박살 났던 방바닥이었다.
날카로운 사기그릇 파편과 어둡고 진한 대추차 액체로 엉망이었던 바닥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
진우가 은수가 잠든 사이 기척도 내지 않고 들어와 모든 흔적을 완벽하게 치워둔 것이 분명했다.
바닥의 나뭇결은 물기를 머금어 옅은 윤기를 내고 있었고, 방 안에서는 희미하게 쑥과 라벤더 향이 섞인 섬유유연제 냄새가 감돌았다.
어젯밤의 광기 어린 비명과 피비린내 나는 기억의 고통이 한 편의 지독한 악몽이었던 것처럼, 집 안은 다시 평화로운 일상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그 완벽한 질서와 강박적인 청결함이 은수에게는 도리어 소름 끼치도록 위협적인 경고장처럼 읽혔다.
은수는 이 붉은 벽돌집이라는 폐쇄적인 공간이 자신을 서서히 옥죄어오는 거대한 무덤처럼 느껴졌다.
벽에 걸린 낡은 액자조차도 미세한 기울기 없이 완벽한 수평을 이루고 있었다.
은수는 힘겹게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무릎의 통증은 어제보다 조금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걸을 때마다 거즈 아래가 팽팽하게 당겨와 온몸이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1층으로 내려가자 주방에서 도마를 두드리는 규칙적인 칼질 소리가 거실의 적막을 깨뜨리며 흘러나왔다.
은수는 주방 문턱에 서서 조용히 칼질을 하고 있는 진우의 뒷모습을 묵묵히 응시했다.
진우는 이마에 하얀 일회용 밴드를 붙이고 있었다.
어젯밤 벽에 머리를 부딪쳐 찢어진 상처 부위인 듯했다.
그의 넓고 단단한 어깨는 여전히 온화한 리듬으로 들썩이고 있었다.
은수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진우가 칼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렸다.
“아, 은수 씨. 깨어나셨군요. 뺨에 상처는…… 좀 어떠세요? 어젯밤 제가…… 정말 흉한 모습을 보여드렸습니다. 면목이 없네요.”
진우는 멋쩍은 듯 이마의 밴드를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해맑게 웃어 보였다.
그의 눈동자는 맑게 개어 있었고, 어젯밤 은수의 품에 안겨 울부짖던 그 나약한 남자의 흔적은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은수는 그의 이마에 붙은 밴드와 온화한 얼굴을 번갈아 보며 복잡한 한숨을 삼켰다.
어젯밤 보았던 옆구리와 손목의 상처까지 떠올랐지만 지금 묻기에는 이마의 피가 먼저였다.
“괜찮아요. 진우 씨 머리는…… 괜찮은 건가요? 피가 많이 났었는데…….”
“네, 살짝 긁힌 것뿐이라 금방 아물 겁니다. 다만…….”
진우가 식탁 위의 칼을 행주로 꼼꼼하게 닦아내며 말끝을 흐렸다.
“어젯밤 머릿속에 들어왔던 그 조각들 때문에 두통이 쉽게 가라앉지 않네요. 안개가 좀 걷히는가 싶더니, 이제는 머리 전체를 짓누르는 듯한 묵직한 통증이 계속됩니다. 집에 비상약으로 둔 두통약이 다 떨어져서, 읍내 약국에 잠시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진우의 말에 은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진우가 읍내로 나간다니.
은수는 순간적으로 어제 읍내 카페에서 만났던 뺨에 흉터가 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남자가 은수에게 경고하지 않았던가.
조만간 붉은 벽돌집으로 직접 찾아오겠다고.
만약 진우가 읍내에 나갔다가 그 남자와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혹은, 진우가 진짜 살인을 저지르기 위해 약국을 핑계로 나가는 것은 아닐까?
그의 내면에 숨겨진 강태오의 어둠이 어젯밤의 충격으로 깨어나 버려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밖으로 향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진우 씨…… 꼭 지금 가야 해요? 날씨도 안 좋고 몸도 안 좋은데, 그냥 집에서 쉬는 게…….”
은수의 목소리에 우려와 의심이 동시에 섞여 흘러나왔다.
진우는 은수의 미세한 태도 변화를 알아차린 듯 칼을 칼꽂이에 꽂아 넣으며 은수에게 다가왔다.
그의 차가운 손가락 끝이 은수의 뺨에 닿았다.
뺨의 거즈 너머로 그의 손가락에서 뿜어져 나오는 옅은 열기가 느껴졌다.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은수 씨. 하지만 이 통증을 참다가는 또다시 어젯밤처럼 이성을 잃고 은수 씨를 놀라게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일은 절대 만들고 싶지 않아요. 제 손으로 은수 씨를 다치게 하는 일만큼은 죽어도 피하고 싶습니다. 약만 얼른 사서 올 테니, 문 꼭 걸어 잠그고 집 안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금방 다녀올게요.”
진우의 눈빛은 너무나 온순하고 단호해서 은수는 더 이상 그를 말릴 구실을 찾지 못했다.
결국 은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진우는 현관문 옆에 꽂혀 있던 남색 장우산을 집어 들고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며 자물쇠가 잠기는 철컥 소리가 유난히 크게 거실을 울렸다.
진우가 떠난 붉은 벽돌집은 물속에 잠긴 것처럼 적막해졌다.
창밖으로 안개가 낮게 내려앉아 집 주변의 풍경을 완전히 가려버렸다.
은수는 주방으로 가 찬장을 열어보았다.
진우가 정돈해 둔 식기들은 크기와 종류별로 칼같이 분류되어 있었고, 싱크대 서랍 안의 칼날들은 기하학적 정렬을 이루고 있었다.
그가 지닌 이 강박적인 완벽주의가 어쩌면 살인마의 현장 정돈 습관과 맞닿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은수는 2층 작업실로 올라가 책상 앞에 앉았다.
액정 태블릿 위에 펜을 그어대며 마감 작업을 진행하려 했지만, 시선은 자꾸만 책상 구석에 놓아둔 가방을 향했다.
가방 속에는 어제 그 남자가 준 진우의 옛 사진이 들어있었다.
은수는 예전에 발견했던 휴대폰 모니터링 프로그램을 떠올렸다.
진우가 이 집 안의 디지털 기기까지 들여다보고 있다면,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공포조차도 그의 통제 아래 있는 것일까.
은수는 현재 진행 중인 동화 일러스트 캔버스를 들여다보았다.
그림 속에는 짙은 안개 낀 숲속에서 소년이 거대한 늑대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울부짖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었다.
늑대의 눈동자는 소년을 해치려는 살의가 아닌, 깊은 슬픔으로 얼룩져 있었다.
은수는 자신의 붓끝이 진우의 내면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는 것 같아 기이한 자괴감이 들었다.
‘그 남자는 도대체 누구였을까? 경찰이 아니라면…… 강태오와 어떤 관계였던 걸까?’
남자는 강태오를 ‘사냥개’라고 불렀고, 자신이 그에게 ‘큰 빚’을 졌다고 했다.
그리고 강태오가 살인을 저지르는 짐승이며, 다음 타깃은 바로 은수 자신이었다고 경고했다.
은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진우가 이 집에 처음 쓰러져 들어온 날부터 지금까지 보여준 모든 다정함이 철저한 연기였을까?
하지만 어젯밤 그의 두통과 눈물, 발작적인 자해 행동은 도저히 연출된 것이라 보기 어려웠다.
만약 그가 정말로 다중인격이거나, 기억의 한 구석에 살인마의 인격이 억눌려 있는 상태라면?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질수록 은수의 호흡은 가빠졌다.
태블릿 화면 위에 그어지는 선들은 형체를 잃고 날카로운 가시덤불처럼 어지럽게 뻗어나갔다.
은수는 신경질적으로 펜을 던져두고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진우가 집을 나선 지 벌써 3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읍내 약국까지 버스를 타고 다녀온다 해도 길어야 1시간 반이면 충분한 거리였다.
비가 와서 버스가 지연되는 걸까, 아니면 정말로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은수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그 모니터링 프로그램 때문에 전화를 거는 것조차 그의 감시망에 스스로 발을 들여놓는 것 같아 꺼림칙했다.
하지만 밀려오는 초조함을 이기지 못한 은수는 액정 화면을 켜고 진우의 번호를 터치하려 했다.
손가락이 통화 버튼 위에서 망설이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1층 거실에 일부러 크게 켜두었던 TV 소리가 작업실 열린 문틀을 타고 은수의 귀로 들이쳤다.
평소 백색소음처럼 흘려듣던 뉴스 속보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유난히 날카롭고 다급하게 변해 있었다.
[……속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오후 2시경, 경기도 외곽 숲길 인근 산책로에서 20대 여성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피해자는 인근 마트에서 근무하던 직원으로 밝혀졌으며, 목 부위에 날카로운 흉기로 인한 깊은 자상을 입고 현장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발견 당시 현장은 이물질이나 발자국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피해자의 소지품들은 시신 주변에 정사각형 구도로 정렬되어 있었으며…….]
은수는 자리에 못 박힌 듯 굳어버렸다.
들고 있던 휴대폰이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바닥에 툭 떨어졌다.
[……경찰은 범행 수법이 최근 전국을 공포에 몰아넣은 ‘적색 야경 연쇄살인 사건’의 특징인 ‘기하학적 정돈’과 유사하다는 점을 토대로, 동일범의 소행이거나 모방 범죄일 가능성을 열어두고 긴급 수색에 나섰습니다. 현장 주변에는 도주 경로를 파악하기 위한 임시 검문 지점이 설치되었으며, 주민들의 각별한 주의가 요구됩니다…….]
뉴스의 음성이 은수의 뇌리를 사정없이 때려부쉈다.
‘숲길 인근 산책로.’
‘목 부위의 자상.’
‘정사각형 구도로 정렬된 피해자의 소지품.’
이 붉은 벽돌집에서 오솔길을 따라 걸어서 불과 20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는 그 산책로였다.
은수와 진우가 며칠 전 함께 산책하다가 위험한 올가미를 발견했던 바로 그 숲길이었다.
은수는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 내리는 듯한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
진우가 나간 지 3시간이 넘었다.
약국에 간다던 그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고, 그 시간에 집에서 불과 20분 거리인 숲속에서 또 하나의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이 과연 우연이란 말인가?
‘진우 씨…… 당신이 정말로……?’
어젯밤 그의 뜨거운 고백과 눈물이 한순간에 차가운 살인의 예고편으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
은수는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공포와 배신감 속에서 숨을 헐떡였다.
그는 약을 사러 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살인 충동을 억제하지 못해 밖으로 나간 것인지도 몰랐다.
은수에게 기대던 그 다정한 남자가, 마침내 빗장 풀린 어둠 속으로 뛰쳐나가 무고한 이의 목을 긋고 그 현장을 기하학적으로 청소한 뒤 돌아오고 있는지도 몰랐다.
은수의 뺨에 난 장미 가시 상처가 마치 그의 살인 예고편이었던 것처럼 욱신거렸다.
은수는 당장 이 집에서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나갔다가 숲속에서 도주 중인 그 괴물과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혹은 경찰이 배치한 초소에 닿기도 전에 그 다정한 살인마에게 발목이 잡힌다면 어떻게 될까.
은수는 전신을 사시나무 떨듯 떨며 1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현관문으로 달려가 이중 잠금 빗장을 지르고 도어록의 수동 레버를 단단히 잠갔다.
거실의 모든 창문을 잠그고 커튼을 촘촘히 쳐 안쪽의 불빛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다.
집 안은 순식간에 어두컴컴한 감옥처럼 변했다.
은수는 거실 모퉁이 벽에 등을 기댄 채 주저앉아 무릎을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손목시계의 초침 소리가 마치 시한폭탄의 카운트다운처럼 귓전을 때려댔다.
은수는 부엌으로 기어가 싱크대 서랍에서 날카로운 식도 하나를 꺼내 손에 꽉 쥐었다.
칼날의 서늘한 촉감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이것만이 지금 은수의 유일한 방패였다.
은수는 바닥에 떨어진 폰을 쥐고 112 번호를 입력했다.
통화 버튼에 손가락이 닿았지만 차마 누르지 못했다.
만약 진우가 정말로 무죄라면?
자신이 그를 신고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오해를 만들고 그의 위태로운 정신을 망가뜨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다.
하지만 그가 정말 연쇄살인범이라면, 자신은 지금 살인범과의 기괴한 동거를 묵인하는 공범에 다름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은수의 패닉은 극에 달했다.
깡—
마당의 쇠 대문이 바람에 밀려 닫히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은수는 숨을 멈추고 온 신경을 귀에 집중했다.
식도를 쥔 손가락끝에 땀이 흥건하게 배어 나왔다.
자갈밭을 규칙적으로 밟으며 다가오는 질척이는 발소리.
빗속을 뚫고 붉은 벽돌집을 향해 걸어오는 묵직한 구두 소리가 현관문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은수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눈물을 흘렸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현관문 도어록 키패드가 켜지는 날카로운 전자음이 정적을 깨뜨렸다.
띡, 띡, 띡, 띡…….
도어록 비밀번호가 하나씩 눌릴 때마다 은수의 심장은 터져버릴 것처럼 요동쳤다.
마침내 비밀번호가 모두 눌리고, 잠금장치가 풀리는 육중한 금속음이 울렸다.
띠리리릭—
하지만 이중 잠금 빗장을 걸어 잠갔기 때문에 문은 열리지 않았다.
문밖에서 당황한 듯 손잡이를 덜컥거리는 소리가 거칠게 들려왔다.
덜컥, 덜컥, 덜컥!
은수는 숨을 죽인 채 현관 너머를 응시했다.
거실 구석의 어둠 속에 몸을 감춘 채, 식도를 쥔 손을 허공에 세웠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거친 호흡 소리.
그리고 이내 빗소리를 뚫고 은수가 가장 두려워하면서도 의지하고 싶었던 그 목소리가 문틈 사이로 낮게 들려왔다.
“은수 씨…… 안에 계시죠? 문이 안 열리네요. 저 왔어요, 은수 씨…….”
진우의 갈라진 목소리가 거실의 차가운 어둠을 찢어발겼다.
은수는 떨리는 눈동자로 문고리를 응시했다.
문밖의 그가 들고 있는 것은 약국에서 산 두통약 봉지일까, 아니면 무고한 희생자의 피가 흥건하게 묻은 칼날일까.
그림 속 소년의 눈앞에 마침내 밤의 야수가 젖은 털을 흔들며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빗방울은 창문을 두드리는 채찍이 되어 온 집안을 흔들어댔고, 은수는 자신의 호흡마저 지우려는 듯 입을 틀어막은 채 차가운 벽에 머리를 기댔다.
손에 쥔 식도의 서늘한 날이 은수의 손목 안쪽을 찔러왔지만, 은수는 그 통증조차 느끼지 못한 채 어둠 속을 응시했다.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진우의 다정한 호흡 소리와 뉴스에서 보도된 피 묻은 시신의 모습이 겹쳐지며, 그들의 위태로운 동거는 이제 피할 수 없는 파국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