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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의 다정한 살인마12화

내 집의 다정한 살인마

내 집의 다정한 살인마

12화: 안개 너머의 응시

밤새도록 지붕을 사납게 두드리던 폭우는 동틀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기세가 꺾였다.
하지만 빗줄기가 가늘어졌을 뿐, 하늘은 여전히 무거운 잿빛 구름에 짓눌려 있었고, 사방은 숲에서 밀려든 축축하고 무거운 안개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경계가 흐릿한 백색 우유 속에 녹아내린 것만 같은 기이한 고립감이었다.

은수는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밤새 단 한 숨도 자지 못했다.
눈을 감기만 하면 어둠 속에서 진우의 눈물 젖은 얼굴과 자신의 목덜미를 적시던 그의 뜨거운 체온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다정하고도 절망적인 애원은 은수의 영혼을 난도질했다.

살인마의 슬픔이라니.
연쇄살인 혐의자의 구걸이라니.
이 얼마나 모순적이고 끔찍한 비극인가.

“아…….”

은수는 삐걱거리는 몸을 움직이려다 신음을 흘렸다.
무릎을 조금만 굽혀도 하얀 거즈 붕대 밑에서 칼로 찌르는 듯한 팽팽한 통증이 느껴졌다.
뺨에 난 장미 가시 상처는 붉게 부어올라 쓰라렸고, 방 안 가득 퍼진 소독약과 연고 냄새가 코끝을 아프게 찔렀다.

간밤의 미친 듯한 탈출 시도가 은수에게 남긴 것은 온몸의 상처와 피로, 그리고 스스로 놓아버린 탈출의 기회에 대한 지독한 자책감뿐이었다.
은수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뺨의 하얀 붕대는 마치 늑대에게 낙인찍힌 표식처럼 선명했다.

아침 7시를 알리는 시계 소리가 들리자마자 방문 너머에서 부드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은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똑똑.

조심스럽고도 예의 바른 노크 소리였다.
뒤이어 문이 천천히 열리며 진우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의 얼굴은 어젯밤 숲길에서 울부짖으며 무릎을 꿇었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차분하고 온화했다.
단정한 남색 셔츠를 입고 흰 앞치마를 두른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은수 씨, 깨어계셨네요. 몸은 좀 어떠세요? 많이 아프진 않으신가 해서…….”

진우의 눈동자에는 은수를 향한 지극한 걱정과 염려가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은수의 눈에는 그의 다정한 미소 이면에 숨겨진, 자신을 절대로 놓아주지 않겠다는 집착의 실개천이 흐르는 것이 보였다.
은수는 마른침을 삼키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생각보다 많이 나았어요.”

“다행이네요. 은수 씨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지만, 따뜻한 단호박 수프랑 호밀빵을 준비했어요. 꿀을 탄 홍차도 끓였으니 내려와서 조금이라도 드세요. 어제 체력을 너무 많이 소모하셔서 기운이 없으실 거예요.”

진우는 은수의 뺨에 덮인 거즈를 부드러운 시선으로 훑어본 뒤, 먼저 1층 주방으로 내려갔다.
그의 걸음걸이는 깃털처럼 가벼웠지만, 은수에게는 그것이 마치 먹잇감을 감시하는 거대한 포식자의 소리 없는 접근처럼 느껴졌다.


은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계단을 내려갔다.
거실을 지나 주방으로 들어서자 갓 구운 식빵의 고소한 냄새와 달콤한 단호박 향이 퍼져 있었다.
식탁 위에는 정갈하게 차려진 아침 식사가 은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노란 수프 위에 얹어진 파슬리 가루 하나까지도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진우는 은수가 다가오자 의자를 부드럽게 빼주며 앉기를 권했다.

“고마워요.”

은수는 기계적으로 숟가락을 들어 수프를 입에 넣었다.
부드럽고 달콤한 맛이 미각을 자극했어야 했지만, 목구멍이 굳어버린 탓인지 수프는 까끄러운 모래알처럼 서글프게 넘어갔다.
진우는 식탁 맞은편에 앉아 은수가 먹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의 두 손은 가지런히 모여 있었고, 왼쪽 눈썹 끝의 흉터는 아침 햇살을 받아 희미하게 번들거렸다.

“수프가 싱겁진 않나요? 어제 비를 많이 맞으셔서 특별히 따뜻하게 끓였습니다.”

“아니요, 맛있어요. 아주…… 따뜻해요.”

은수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해야만 진우를 자극하지 않을 수 있다는 본능적인 방어기제였다.
진우는 은수의 반응에 만족한 듯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그 웃음은 너무나 무해하고 아름다워서, 은수는 순간 자신이 잔인한 연쇄살인 용의자와 한 식탁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망각할 뻔했다.

하지만 주머니 속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휴대폰의 존재가 은수를 차가운 현실로 돌려보냈다. 외부와의 소통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의심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은수는 작업실이 있는 2층으로 도망치듯 올라갔다.
지금 이 상황에서 도저히 그림에 집중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진우의 시선에서 단 몇 분이라도 벗어날 공간이 절실했다.
은수는 액정 태블릿을 켜고 터치펜을 쥐었다.

손끝이 가볍게 떨렸다.
화면 위에 선을 그어보려 했지만, 펜촉은 어지럽게 흔들리며 날카롭고 왜곡된 궤적만을 그렸다.
은수의 캔버스 위에 칠해진 것은 깊고 어두운 남색과 검은색의 대비였다.
그것은 간밤에 찢어발겼던 진우의 코트 색깔이었고, 그 안감에서 쏟아져 나왔던 피 묻은 안혜원의 은반지와 가죽 지갑의 어둠이었다.

은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자신이 마주한 것은 풀리지 않는 미로였다.
진우는 자신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빌었다.
만약 자신이 진짜 괴물이 된다면 죽여달라고까지 했다.
하지만 그의 지갑에 들어있던 그 정교한 살인 분석 메모와 안혜원을 향한 스토킹 정황은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그는 나를 완벽하게 속이고 있는 걸까? 아니면 기억상실이라는 거대한 장벽 뒤에 숨어 진짜 자신을 부정하고 있는 걸까?’

답이 없는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답답함에 신음하던 은수는 환기를 하기 위해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창문을 위로 밀어 올리자, 비 개인 뒤의 비릿한 풀 냄새와 차가운 흙바람이 들이닥쳤다.
안개는 아침보다 한층 더 짙어져 마당의 울타리 너머를 거의 가려버린 상태였다.
은수는 무심코 마당 너머, 숲길로 이어지는 오솔길 초입을 바라보았다.

그때, 은수의 시선이 한곳에 멎었다.

짙은 안개 속에서 어떤 형체가 서 있었다.
처음에는 기괴하게 뒤틀린 나무 밑동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바람이 불어 안개가 살짝 흩어지는 순간 그것이 사람의 실루엣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자의 덩치는 상당히 다부지고 컸다.
검은색 바람막이 점퍼의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얼굴에는 검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어 이목구비를 전혀 분간할 수 없었다.
남자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의 고개는 정확히 은수가 서 있는 2층 작업실 창문을 향해 비스듬히 꺾여 있었다.
은수는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아났다.
심장이 다시 빠르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남자는 은수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피하려 하지도 않고, 그저 짙은 안개 너머에서 유령처럼 은수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그 검은 구멍 같은 시선이 은수의 숨통을 조여왔다.
은수는 뒷걸음질을 쳤다.

발이 엉켜 바닥에 넘어질 뻔한 것을 간신히 태블릿 책상을 짚어 버텼다.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을 때, 남자는 감쪽같이 사라진 후였다.
안개만이 그 자리를 메우며 유유히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은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누구지? 경찰인가? 아니면……?’


은수는 서둘러 1층으로 내려갔다.
무릎의 통증이 느껴졌지만 계단을 뛰어내려가다시피 했다.
1층 거실 창문으로 마당을 내다보았다.
진우는 마당 한구석에서 삽을 들고 빗물에 막힌 배수로를 묵묵히 정비하고 있었다.
진우의 널따란 어깨는 젖은 흙으로 더러워져 있었고, 그의 움직임은 군더더기 없이 절제되어 있었다.

진우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거실 창가에 선 은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눈꼬리를 부드럽게 접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의 미소는 다정했지만, 은수의 머릿속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진우는 방금 전 그 남자를 보았을까?
만약 보았다면 왜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걸까?
아니면, 저 숲속의 남자는 진우조차 알지 못하는 불길한 과거의 그림자일까.
은수는 더 이상 집 안의 질식할 것 같은 공기를 견딜 수 없었다.

이곳에 계속 있다가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은수는 외출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마침 일러스트 작업에 필요한 전용 드로잉 펜과 특정 규격의 스케치북이 거의 다 떨어져 가고 있었다.
읍내의 작은 화방에 다녀오겠다는 핑계를 대면 진우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은수는 현관으로 가 외출복을 챙겨 입었다.
저수지의 흙탕물을 털어낸 진우가 삽을 내려놓고 현관문으로 들어와 은수를 맞이했다.

“은수 씨, 외출하시려고요?”

“네…… 작업 도구 중에 떨어져 가는 게 있어서요. 읍내 화방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진우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그의 시선은 은수의 무릎과 뺨의 붕대에 머물렀다.

“다리가 아직 불편하실 텐데, 제가 대신 다녀오면 안 될까요? 아니면 제가 같이 동행하겠습니다. 길도 험하고 비가 또 올지 모르니까요.”

진우의 목소리는 지극히 상냥했으나, 그 안에는 은수를 자신의 감시망 밖으로 내보내고 싶지 않다는 팽팽한 통제욕이 섞여 있었다.
은수는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억누르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어떤 종이인지 제가 직접 만져보고 사야 해서요. 그리고…… 혼자 조용히 생각 정리도 좀 하고 싶어요. 금방 다녀올게요.”

은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연인에게 응석을 부리듯 덧붙였다.
진우는 은수의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은수의 숨이 막힐 것 같은 수 초간의 정적이 흐른 뒤, 진우의 긴장된 어깨가 조금 누그러졌다.

“……알겠습니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시다면 존중해 드려야죠. 대신 너무 늦지 않게 돌아오셔야 합니다. 보조배터리 꼭 챙기시고요. 연락은 계속돼야 하니까요.”

진우는 은수의 뺨에 닿을 듯 말 듯 손을 올렸다가, 이내 거두고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은수 씨.”


그의 배웅을 받으며 대문을 나서는 은수의 등 뒤로, 진우의 집요한 시선이 화살처럼 꽂히는 느낌이 들었다.
은수는 숲길을 걸어 내려가면서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지만, 진우는 대문 앞에 서서 은수가 안개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읍내로 가는 버스는 하루에 몇 대 다니지 않는 낡고 덜컹거리는 구형 버스였다.
버스 창문에 이마를 기대자 차가운 진동이 머리뼈를 흔들었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은 온통 잿빛이었다.
은수는 외진 시골 마을인 이곳에 들어와 정착했던 지난날을 후회했다.
평화롭고 조용한 창작의 공간을 원했으나, 결국 스스로를 거대한 덫 속에 가둬버린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읍내는 한산했다.
비가 온 직후라 거리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은수는 단골로 이용하던 작은 문구점 겸 화방에 들어가 필요한 펜과 스케치북을 샀다.
물건을 사고 나니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집으로 바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은수는 버스 정류장 바로 옆에 위치한 오래된 다방 겸 카페로 들어갔다.
딸랑이는 종소리와 함께 카페 안으로 들어서자 낡은 가죽 소파와 쾨쾨한 커피 향이 어우러진 실내가 나타났다.
손님은 은수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은수는 가장 안쪽 구석진 자리에 앉아 따뜻한 녹차 한 잔을 주문했다.

따뜻한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자 비로소 굳어있던 몸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은수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진우의 머릿속 안개를 걷어내기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의 피 묻은 소지품들과 안혜원의 물건들을 경찰에 넘겨야 할까?

하지만 그렇게 하면 진우가 정말로 연쇄살인마로 낙인찍혀 평생 감옥에 갇히거나 사형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은수의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그를 향한 기묘한 연민과 미련이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다.

딸랑.

다시 한번 카페 문에 달린 종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은수는 무심코 문 쪽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문으로 들어온 남자는 아침에 집 앞 숲길 초입에서 보았던 바로 그 사내였다.
검은색 후드 바람막이를 입은 그는 축축하게 젖은 어깨를 털어내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스크는 벗어둔 상태였지만, 모자는 여전히 깊게 눌러쓰고 있었다.
그는 카페 안을 쓱 훑어보더니 은수를 발견하고는 망설임 없이 은수의 테이블을 향해 걸어왔다.
그의 발소리가 낡은 나무 바닥을 삐걱거리며 밟을 때마다 은수의 숨통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남자는 은수의 맞은편 의자를 거칠게 드르륵 끌어당기며 자리에 앉았다.

“한은수 씨.”

남자의 목소리는 쇳소리가 섞인 듯 낮고 거칠었다.
은수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앉으시지.”

남자가 은수의 손목을 테이블 위에 강하게 짓눌렀다.
그의 손아귀 힘은 엄청나게 강해서 은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누, 누구세요? 이거 놓으세요. 소리 지를 거예요.”

은수는 떨리는 목소리로 경고했지만, 남자는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모자 밑으로 날카로운 눈빛을 빛냈다.
그의 오른쪽 뺨에는 칼에 베인 듯한 얇고 긴 흉터가 새겨져 있었다.
눈동자는 마치 굶주린 짐승의 그것처럼 살기가 번뜩였다.

“소리 지르면 가장 곤란해지는 건 내가 아니라 그쪽일 텐데? 그 붉은 벽돌집에 얌전히 숨어있는 그 미친 사냥개한테 당장 연락이라도 가길 바라는 건가?”

남자의 입에서 ‘사냥개’라는 단어가 나오자 은수는 얼어붙었다.

“무슨……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모르는 척하지 마.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 한은수. 그리고 지금 그쪽 집에서 사랑스러운 남편 노릇을 하고 있는 남자, 강태오.”

남자는 은수의 얼굴 가까이 고개를 들이밀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의 입에서 시큼한 담배 냄새가 뿜어져 나왔다.

“그 새끼가 기억을 잃었다고 하던가?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가여운 척, 다정한 척 그쪽 발가락 밑에 엎드려서 재롱을 피우고 있지? 참나, 기가 차서.”

남자는 코웃음을 치며 품 안에서 낡고 꼬깃꼬깃한 사진 한 장을 꺼내 은수의 앞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사진 속에는 정장 차림을 한 젊은 시절의 진우가 찍혀 있었다.
사진 속 진우의 눈빛은 지금의 다정한 모습과 달리 소름 끼치도록 차갑고 서늘했다.
누군가를 노려보며 멱살을 잡고 있는 듯한 구도였다.
그 얼굴은 분명 은수의 집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수프를 끓이던 진우가 맞았다.

“이 얼굴, 아주 잘 알겠지? 강태오. 전국을 피비린내로 물들인 그 ‘적색 야경 연쇄살인 사건’의 주범이자, 짐승 같은 새끼야.”

은수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눈앞의 사진이 흐릿하게 번져 보였다.

“당신은…… 누구예요? 경찰인가요?”

남자는 은수의 질문에 조소를 흘렸다.

“경찰? 나 같은 놈보고 경찰이라니 모욕이군. 나는 태오가 남긴 과거를 아주 잘 아는 사람이지. 그리고 그 새끼한테 아주 큰 빚을 진 사람이고. 경찰에 넘기면 너무 빨리 끝나. 나는 그놈이 제 손으로 기억해 내고 무너지는 꼴을 봐야겠거든.”

남자는 손가락으로 사진 속 진우의 얼굴을 툭툭 쳤다.

“그 새끼가 다정한 얼굴로 그쪽 상처를 치료해 주고 밥을 차려준다고 해서 착각하지 마. 그놈은 자기가 점찍은 타깃을 가장 완벽하게 도살하기 위해 덫을 놓는 놈이니까. 안혜원이 왜 죽었을 것 같아? 그 기하학적인 살인 현장, 완벽하게 통제된 흔적들…… 전부 강태오 그 새끼가 설계한 작품이야. 다음 타깃은 바로 너였어. 그 붉은 벽돌집은 그 새끼가 널 가두고 서서히 숨통을 조이기 위해 고른 무덤이라고.”

“아니야…….”

은수의 입술 사이로 약한 부정의 말이 흘러나왔다.
남자는 은수의 반응에 눈을 가늘게 뜨며 경고했다.

“부정하고 싶겠지. 그 다정한 껍데기 아래 숨겨진 살기를 마주하기 무서우니까. 하지만 명심해. 그놈의 기억이 돌아오는 순간, 그쪽 목덜미를 가장 먼저 물어뜯을 건 바로 그놈이야. 짐승의 본성은 절대로 변하지 않아. 기억을 잃었다고 해서 그놈이 흘린 피가 씻겨 나가는 건 아니니까.”

남자는 사진을 은수의 가방 안으로 깊숙이 쑤셔 넣었다.

“태오한테 전해. 조만간 내가 직접 그 붉은 벽돌집으로 찾아가겠다고. 그리고…… 네놈이 그 집 밑바닥에 숨겨둔 그 비밀도, 내가 전부 꺼내서 세상에 까발려 주겠다고 말이야. 잘 처신해, 은수 씨. 그 다정한 살인마 옆에서 목숨 아까운 줄 안다면 말이지.”

남자는 말을 마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모자를 눌러썼다.
은수를 비웃듯 한 번 바라본 뒤 들어올 때처럼 홀연히 카페를 빠져나갔다.
딸랑이는 종소리가 은수의 귓가에 이명처럼 길게 남았다.
은수는 자리에 굳은 채 움직이지 못했다.
차갑게 식어버린 녹차 표면에 자신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비쳤다.
남자의 경고는 구구절절 은수의 가슴을 후벼팠다.

‘그 붉은 벽돌집은 그 새끼가 설계한 무덤이다.’

‘그의 다정한 껍데기에 속지 마라.’

하지만 은수는 남자의 태도에서도 이상한 괴리감을 느꼈다.
만약 진우가 정말 잔인한 연쇄살인마라면 왜 이 남자는 경찰에 그를 신고하지 않고 자신에게 와서 이런 경고를 하는 걸까?
‘큰 빚을 졌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이 남자 역시 진우만큼이나 위험하고 어두운 세계의 사람임이 분명했다.


어느덧 창밖의 어둠이 짙어지고 있었다.
은수는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버스에 올랐다.
가방 속에 든 진우의 옛 사진이 마치 뜨거운 활자처럼 가방 가죽을 뚫고 은수의 옆구리를 태우는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아침보다 한층 더 어둡고 험했다.
안개는 국도 전체를 삼켜버렸고, 붉은 벽돌집의 희미한 전등빛만이 어둠 속에서 등대처럼 깜빡이고 있었다.

은수가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서자, 현관문이 즉시 열렸다.
진우가 서 있었다.
우산을 들고 마당까지 마중을 나온 그의 얼굴은 안도감과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은수 씨! 걱정했습니다. 버스 시간이 늦어져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어요.”

진우는 은수의 젖은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집 안으로 인도했다.
그의 따뜻한 손길이 닿는 순간, 은수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크게 움츠리며 그의 손을 살짝 뿌리쳤다.

진우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주방의 주황빛 조명 아래, 두 사람 사이에 싸늘한 침묵이 강물처럼 흘렀다.
진우는 뿌리쳐진 자신의 손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은수를 응시했다.

“은수 씨…… 손이 왜 이렇게 차갑습니까? 그리고 온몸을 떨고 계시네요.”

진우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상냥했지만, 그 밑바닥에는 은수의 미세한 변화를 포착하려는 무서운 집착이 도사리고 있었다.

“밖에서…… 누구를 만나기라도 하신 겁니까?”

진우의 질문이 은수의 귓가를 때렸다.
그의 눈빛은 은수의 영혼 가장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집요하고 날카로웠다.
은수는 떨리는 손으로 가방끈을 꽉 움켜잡았다.
가방 속 사진이 진우의 시선에 닿을까 두려워, 은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

안개 낀 붉은 벽돌집 안, 두 사람의 숨 막히는 심리전은 이제 피할 수 없는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은수는 자신의 집이, 그리고 눈앞의 다정한 남자가 거대한 심연의 아가리를 벌리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창밖에는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은수의 어두운 세계를 영원히 가둬버릴 것만 같은, 그런 무거운 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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