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계 기획실장으로 살아남는 법

72화: 귀족 영지의 파산
남부 귀족 은행들의 지배인들이 중앙은행의 대환 자금 만기 청구서를 들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벌벌 떨고 있었다.
집무실 밖은 여전히 구시대의 특권을 고수하려는 귀족 세력과의 '장부상의 냉전(Cold War of Ledgers)'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숫자의 전선에서 벌어지는 이 소리 없는 전쟁은 제국의 권력이 기사의 칼날에서 설계자의 장부로 이동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세계의 화려하고 환상적인 겉모습 뒤에 굳건하게 웅크리고 있는 전근대적 금융의 부실은 강민우라는 '시스템 디자이너'에게는 시급히 M&A(인수합병)를 통해 도려내야 할 썩은 부위일 뿐이었다.
민우의 잘 훈련된 손가락 사이에서 리드미컬하게 회전하는 은빛 만년필은 단순한 필기구를 넘어, 구습의 부조리를 도려내고 새로운 금융 아키텍처를 설계하는 설계자의 메스와도 같았다.
그는 창밖으로 분주히 마차를 몰며 이동하는 사람들을 무심히 내려다보며, 서울 테헤란로의 빌딩 숲에서 부실 기업의 구조조정과 채무 재조정을 진두지휘하던 냉혹한 기획자의 지혜를 떠올렸다.
자산의 가치는 금고 속의 금화가 아니라, 시장에서 유통되는 신용의 질에 의해 결정된다.
"은행은 돈을 쌓아두는 창고가 아니다. 자본의 흐름을 최적화하여 사회의 가치를 창출하는 엔진이다."
민우는 차갑게 식어 가던 마력 홍차를 한 모금 마시며, 집무실의 조명 마법 조도를 최적의 상태로 조절했다.
현재 민우가 정면에 맞닥뜨린 가장 거대하고도 시급한 핵심 행정 과제는 금화를 금고에 묵혀두어 유동성이 바닥난 귀족 사설 은행들의 파산 및 법정 관리 절차를 밟는 것이었다.
그는 '오피스 워커의 눈(Office Worker's Eye)'을 활성화했다.
[라피아 홀딩스 & 제국 국정 재정 정밀 모니터링 시스템]
- 프로젝트: 부실 금융 기관 구조조정 및 강제 인수합병(M&A)
- 현재 통합 행정 및 금융 프로세스 효율성 지표: 69.80%
- 제국 황실 가용 유동 자본금: 869.0백만 골드
- 오피스 워커의 특수 분석 의견: '귀족 은행 지배인들의 장부 조작 징후 포착. 즉각적인 실사 및 자산 동결을 통한 뱅크런 방지 대책 실행 요망.'
이윽고 집무실 문이 열리고 귀족 은행 지배인이 긴 숨을 내쉬며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민우는 아주 자연스럽고 예의 바른 태도로 그를 맞이하며, 미리 준비해 둔 정밀 실사 보고서를 테이블 중앙에 내밀었다.
"바쁘신 와중에 발걸음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배인님. 하지만 올려주신 상환 연기 신청서는 승인 결재를 해드릴 수가 없군요. 유동성이 마른 장부는 제 시스템 안에서는 그저 '치명적 오류'일 뿐입니다."
지배인이 가문의 신성한 규칙과 수백 년의 긍지를 운운하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민우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상대를 제압했다.
"지배인님이 말씀하시는 긍지는 장부의 거대한 적자 구멍을 메워주지 못합니다. 금고에 잠든 금은 자산이 아닙니다. 유동성이 마른 당신들의 가문은 오늘부로 '파산'입니다. 합의하지 않으신다면, 오늘부로 귀하와 관련된 모든 중앙은행 예금 계좌는 법률적 권한 하에 즉시 '무기한 동결' 처리될 것입니다."
설계자의 냉혹한 구조조정 플랜이 현실로 투입되자 제국 전체의 금융 지형도가 재편되기 시작했다.
민우는 현대 기업 경영의 전술을 고도로 활용해 유능한 관리들에게는 승진의 기회를, 태업을 일삼던 세력들에게는 법원 영장이라는 경제적 단두대를 들이밀었다.
이제 세상을 움직이는 진정한 동력원은 기사의 검이 아닌, 한 직장인이 밤을 새워 기안한 엑셀식 기획서와 구조조정 가이드라인이었다.
자본의 적재적소 재배치와 투명한 시장 유통 제어라는 행정 마법 앞에서, 수백 년간 이어져 온 귀족들의 금융 독점은 질서 정연한 톱니바퀴처럼 평화의 구도로 정착되고 있었다.
분기 결산 보고서 상단에 기획실장의 전결 인장이 붉게 안착했다.
창밖으로는 중앙은행이 닦아놓은 신식 도로를 따라 합병된 은행들의 자금이 투명하게 흐르고 있었다.
시스템 인터페이스가 등급 상승을 알리는 완료 메시지를 띄웠다.
남부 귀족 3대 가문의 소유 은행들이 중앙은행으로 강제 흡수 합병 처리되었다는 메시지가 민우의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띄웠다.
"다음은 파산한 영지들의 경매 기획인가. 설계자의 야근은 차원을 넘어도 변치 않는군."
세상을 평화롭게 지탱하는 것은 거창한 구호가 아닌, 매일 아침 성실하게 작성되는 서류와 차가운 숫자의 행정이라는 사실을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