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계 기획실장으로 살아남는 법

64화: 시기하는 남부 귀족들
남부 대귀족 에르윈 공작의 음침한 밀실에 가신들이 모여 중앙은행의 근간을 뒤흔들 음모를 소리 죽여 수군거렸다.
창밖의 황성은 그들의 음모와는 대조적으로 눈부신 근대화의 열기로 가득했다.
중세적 성채 사이로 거대한 유리 빌딩들이 우후죽순 솟아오르고, 공장들의 굴뚝에서는 제국의 산업화를 알리는 고동 소리가 쉼 없이 울려 퍼졌다.
이세계의 화려하고 환상적인 겉모습 뒤에 굳건하게 웅크리고 있는 전근대적 행정의 모순은 강민우라는 '시스템 디자이너'에게는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 치명적인 악성 코드였다.
민우의 손끝에서 날카롭게 빛나는 은빛 만년필은 단순한 필기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구습의 방만 경영을 도려내고 새로운 사회의 아키텍처를 설계하는 설계자의 메스였다.
그는 창밖으로 분주히 마차를 몰며 이동하는 사람들을 무심히 내려다보며, 서울 테헤란로의 빌딩 숲에서 겪었던 냉혹한 사내 정치와 경영 위기의 순간들을 떠올렸다.
차원이 바뀌고 마법이 상식이 된 이질적인 세계에서도, 권력과 자본의 역학 관계는 놀라울 정도로 동일했다.
"결국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거창한 정의가 아니다. 자본의 흐름을 통제하고 시스템을 장악하는 자가 진정한 설계자다."
민우는 차갑게 식어 가던 마력 홍차를 한 모금 들이켜며, 집무실의 마법 램프 조도를 최적의 상태로 조절했다.
현재 민우가 정면에 맞닥뜨린 가장 위협적인 핵심 행정 과제는 귀족들이 조직적으로 예치금을 일시에 인출하여 '뱅크런' 사태를 조장하려는 음모를 분쇄하는 것이었다.
그는 '오피스 워커의 눈(Office Worker's Eye)'을 활성화하여 시스템 스크린을 노려보았다.
[라피아 홀딩스 & 제국 국정 재정 정밀 모니터링 시스템]
- 프로젝트: 금융 인프라 수호 - 이상 인출 징후 포착 및 대응
- 현재 통합 금융 프로세스 효율성 지표: 62.60%
- 제국 황실 가용 유동 자본금: 773.0백만 골드
- 오피스 워커의 분석 의견: '에르윈 공작 측의 조직적 뱅크런 시도 포착. 자산 가압류 및 유동성 강제 공급 등 원천 차단책 실행 요망.'
이윽고 집무실 문이 열리고 에르윈 공작이 거만한 태도로 걸어 들어왔다.
민우는 차분한 표정으로 미리 준비해 둔 정밀 실사 보고서를 테이블 중앙에 내던졌다.
"바쁘신 와중에 발걸음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님. 하지만 올려주신 예산 청구서와 자금 인출 요청서는 도저히 승인해 드릴 수가 없군요. 내역이 불명확한 자금의 흐름은 시스템의 안정성을 해치는 '치명적 오류'입니다."
에르윈 공작이 가문의 신성한 규칙과 귀족의 긍지를 운운하며 책상을 내리쳤지만, 민우는 서늘한 눈빛으로 그를 압도했다.
"공작님이 말씀하시는 긍지는 중앙은행의 지급준비율을 고려하지 않은 무책임한 도발일 뿐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자금을 한꺼번에 인출하겠다는 협박은 통하지 않습니다. 오늘부로 공작님과 연관된 모든 중앙은행 예금 계좌는 법률적 권한 하에 즉시 '무기한 동결' 처리됩니다. 저는 시스템의 파괴를 묵과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설계자의 단호한 처분은 제국 전체의 금융 지형도를 재편했다.
민우는 현대 기업 경영의 전술을 활용해 뒤에서 반란을 모의하던 세력들에게는 자산 가압류라는 경제적 교수형을, 개혁에 협조하는 관리들에게는 승진이라는 보상을 내렸다.
고대의 역사서들은 영웅의 칼솜씨만을 기록했지만, 이제 세상을 움직이는 진정한 힘은 밤을 새워 기안한 엑셀식 기획서와 행정 규칙 가이드라인에서 나오고 있었다.
자본의 흐름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행정 마법 앞에서, 수백 년간 이어져 온 귀족들의 위세는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고 있었다.
분기 결산 보고서 상단에 기획실장의 전결 인장이 붉게 안착했다.
창밖으로는 중앙은행이 닦아놓은 신식 도로를 따라 대규모 상단들의 유통 마차가 활기차게 내달리고 있었다.
시스템 인터페이스가 기분 좋은 알림음을 울리며 보안 안정화 단계에 진입했음을 알렸다.
민우는 은빛 만년필을 소중히 꽂으며 식어버린 커피 잔을 만지작거렸다.
"다음 사업은 철도 IPO인가. 주주총회 보고용 데이터 정리가 시급하겠군."
세상을 지탱하는 것은 거창한 구호가 아닌, 차가운 숫자로 증명되는 설계자의 의지라는 사실을 그는 다시 한번 확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