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계 기획실장으로 살아남는 법

63화: 금융 혁명
제국 광장에서 상인들이 발두르 지폐와 중앙은행 통장을 들고 활기차게 거래를 하며 환호하는 광경이 포착되었다.
창밖의 풍경은 그 활기만큼이나 혁명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중세의 고즈넉한 성벽 너머로 거대한 철골 구조물들이 솟아오르고, 유리창으로 뒤덮인 신축 건물들이 햇빛을 반사하며 눈부신 은빛 숲을 이루기 시작했다.
이세계의 화려하고 환상적인 겉모습 뒤에 굳건하게 웅크리고 있는 전근대적 행정의 모순은 강민우라는 '시스템 디자이너'에게는 도려내야 할 구시대의 잔재일 뿐이었다.
그의 잘 훈련된 손가락 사이에서 리드미컬하게 빙글빙글 회전하는 은빛 만년필은 단순한 필기구를 넘어, 구습의 부조리를 도려낼 날카로운 메스와도 같았다.
민우는 창밖으로 분주히 이동하는 마차들을 보며 서울 광화문의 바쁜 출근길을 떠올렸다.
실물 화폐가 숫자로 치환되고, 신용이 실시간으로 데이터화되던 현대 금융의 거대한 파도.
그 파도를 설계하던 기획자로서의 경험은 이 판타지 대륙에서도 소름 돋을 정도로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결국 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거창한 마법이 아니다. 단 1센트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정교한 자본의 알고리즘이다."
민우는 차갑게 식어 가던 마력 홍차를 한 모금 들이켜며, 집무실 조명 마법의 조도를 최적의 상태로 조절했다.
현재 민우가 정면에 맞닥뜨린 가장 거대하고도 시급한 핵심 행정 과제는 화폐 유통량을 투명하게 모니터링하여 인플레이션을 제어하는 거시 경제 시스템을 가동하는 것이었다.
그는 '오피스 워커의 눈(Office Worker's Eye)'을 활성화했다.
[라피아 홀딩스 & 제국 국정 재정 정밀 모니터링 시스템]
- 관리 대상 아크: 금융 시스템의 현대화 및 통화 안정화
- 현재 통합 금융 프로세스 효율성 지표: 61.70%
- 제국 황실 가용 유동 자본금: 761.0백만 골드
- 오피스 워커의 특수 분석: '재무관 토마스의 구태의연한 이권 개입 시도를 시스템적으로 차단할 것. 화폐 주권의 완벽한 중앙 집중화가 필요함.'
이윽고 집무실 문이 열리고 재무관 토마스가 긴장한 표정으로 걸어 들어왔다.
민우는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미리 복사 마법으로 편집해 둔 방대한 분석 보고서를 테이블 위에 던져놓았다.
"바쁘신 와중에 발걸음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무관님. 하지만 올려주신 장부에는 승인 결재를 해드릴 수가 없군요. 세부 내역이 불명확한 청구서들은 현대적 회계 시스템 앞에서는 그저 '에러 로그'일 뿐입니다."
토마스가 가문의 명예와 수백 년의 전통을 운운하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민우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그를 직시했다.
"귀하가 말하는 명예는 장부의 거대한 적자 구멍을 메워주지 못합니다. 돈이 썩지 않고 흐르며 실물 경제를 가동시키는 속도, 그것이 바로 내가 설계하는 금융 혁명의 본질입니다. 합의하지 않으신다면, 오늘부로 귀하와 관련된 모든 국가 재정 유입 경로는 무기한 '동결' 처리될 것입니다."
설계자의 냉혹한 처분이 현실에 투입되자 그 파급력은 대륙 전체의 지형도를 재편하기 시작했다.
민우는 현대 기업 경영의 전술을 활용해 유능한 하급 관리들에게는 인센티브를, 태업을 일삼는 귀족들에게는 가압류라는 경제적 단두대를 들이밀었다.
이제 세상을 움직이는 진정한 동력원은 기사의 검이 아닌, 한 직장인이 밤을 새워 기안한 엑셀식 기획서와 행정 가이드라인이었다.
자본의 적재적소 재배치라는 행정 마법 앞에서 수백 년의 전쟁과 반목은 질서 정연한 톱니바퀴처럼 평화의 구도로 정착되고 있었다.
마지막 결재 업무가 종료되고 기획실장의 전결 인장이 쾅 찍혔다.
창밖으로는 중앙은행이 닦아놓은 신식 마도 도로를 따라 대규모 상단들이 경제의 피를 실어 나르고 있었다.
시스템 인터페이스가 등급 상승을 알리는 완료 메시지를 띄웠다.
유통 화폐의 안정성이 확립되어 제국 전역의 시장 물가가 안정화되고 있었다.
민우는 만년필을 주머니에 꽂으며 식어버린 커피 잔을 만지작거렸다.
"다음은 주식회사의 도입인가. 이사회 보고용 프레젠테이션 작성이 시급하겠군."
세상을 평화롭게 지탱하는 것은 거창한 구호가 아닌, 매일 아침 성실하게 작성되는 서류와 차가운 숫자의 행정이라는 사실을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