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혈의 맹약

97화: 한옥의 황혼
토요일 저녁 6시, 성북동의 정갈한 한옥 안전가옥 안뜰.
가늘게 지는 노을이 기와지붕 아래 한옥 마당의 잔디와 소나무 분재 위로 은은한 주황빛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방 안에는 따뜻하게 우려낸 우롱차 연기가 나직하게 흐르는 가운데, 강태형과 연소희가 마주 앉아 찻잔을 나누고 있었다.
소희는 단정한 정장 차림을 고쳐 앉으며 차 한 모금을 마셨다. 그녀는 이제 정보원이나 킬러의 뒤를 감시하는 암흑의 요원이 아닌, 철혈 코퍼레이션 산하의 합법 보안 정보 기업인 ‘철혈 세이프넷’의 어엿한 여사장으로서의 당당한 기품을 보이고 있었다.
“형님, 보안 기업 연간 컨설팅 계약이 명동과 강남 지점 금융 빌딩들과 성공적으로 다 체결되었어요. 이제 우리는 사설 해킹망 대신 합법적인 보안 시스템으로 대한민국 최고 금융망들을 지탱하게 되었어요.”
태형은 가만히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직하게 답했다.
“수고 많았다, 소희야. 연 회장님이 하늘에서도 네 늠름한 모습을 보며 자랑스러워하실 거다.”
소희는 잔을 쥔 손가락 끝을 쓸어내리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아버님이 생전에 말씀하셨어요. 강태형이라는 사내는 비록 주먹을 쥔 깡패 조직의 2인자이지만, 그 심장에 담긴 의리와 칼은 금성 전체에서 가장 단단하고 시린 사내라고요. 자신이 세상을 떠나도 강태형만은 끝까지 믿을 수 있을 거라고 하셨는데, 아버님의 사람 보는 눈이 정말 정확하셨던 것 같아요.”
태형의 깊고 푸른 눈동자 속에 희미한 감상과 안도가 스쳤다. 과거 연 회장은 태형이 말단 행동대원 시절, 오만수 회장의 표독스러운 덫에 걸려 목숨을 잃을 뻔했을 때 그를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자 진정한 멘토였다. 소희의 복수를 돕고 그녀를 양지로 건져내 준 것은, 태형이 은인에게 바칠 수 있었던 일평생의 맹약의 결산이었던 셈이다.
“형님, 이제 정말 복수가 다 완결되었는데…… 앞으로는 무얼 하실 생각이세요?”
소희의 진지한 질문에 태형은 옆에 세워둔 지팡이 머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난 해바라기 복지 재단의 보육원 아이들 교육과 복지 시설 확충에만 집중할 생각이다. 내 손에 피를 묻히며 거리를 지배하던 어둠의 시간은 끝났어. 내 형제들이 볕이 드는 곳에 서게 만드는 방패막이가 되는 것이, 이제 내가 할 일이다.”
태형의 목소리는 은은한 차 향처럼 깊고 평온했다.
노을빛이 마당의 정갈한 기와 위로 사라져 가며 어둠이 내리는 한옥 방안, 두 사람은 말없이 차를 마시며 평화로운 밤하늘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3년 전의 핏빛 배신과 공포는 저 멀리 사라지고, 사내들의 맹약 위에 마침내 흔들리지 않을 평화의 성벽이 우뚝 솟아 빛나고 있었다. 복수의 결말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