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혈의 맹약

9화: 출소, 붉은 하늘 아래로
육중한 철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 틈새로 쏟아져 들어오는 바깥세상의 공기는 교도소의 퀴퀴함과는 전혀 달랐다. 차갑고, 습하며, 어딘가 비릿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강태형은 어깨에 낡은 천 가방 하나를 멘 채 천천히 걸어 나왔다. 오른쪽 다리를 절뚝거릴 때마다 낡은 운동화가 흙바닥을 끄는 거친 소리가 났다. 3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3년 전보다 수십 배는 더 깊고 차가워져 있었다.
하늘은 마치 피를 뿌려놓은 듯 붉은 노을로 물들고 있었다.
교도소 정문 앞, 낡은 은색 소나타 한 대가 시동을 건 채 서 있었다. 운전석 문이 열리며 검은 가죽 재킷을 입은 임창수가 급히 뛰어내렸다.
“형님!”
창수가 태형의 앞으로 다가와 허리를 90도로 꺾었다. 그의 얼굴에는 감격과 흥분이 교차하고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형님.”
“오랜만이다, 창수야.”
태형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창수의 어깨를 두드렸다. 두 사람은 차에 올라탔다. 차 안에서는 낡은 시트 냄새와 함께 싸구려 방향제 향이 났다.
창수가 차를 몰아 교도소 진입로를 벗어났다. 백미러 속에서 멀어지는 청송교도소의 붉은 벽돌 장벽을 보며 태형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밤의 전쟁터로 돌아온 것이다.
“형님, 일단 일산 쪽에 조그만 오피스텔 하나 구해 놨습니다. 당분간 놈들의 눈을 피하기엔 거기가 적당할 겁니다. 그리고 옷가지랑 핸드폰, 약간의 현금도 준비해 뒀습니다.”
“고맙다. 애썼어.”
태형이 창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3년 동안 세상은 변한 게 없어 보였지만, 서울의 밤은 이미 최진상과 오만수의 손아귀에 완전히 넘어가 있었다.
“형님, 당장 어디부터 움직이실 겁니까? 금성그룹 하부 조직 놈들부터 하나씩 쳐낼까요?”
창수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 하지만 태형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 주먹부터 휘두르면 최진상이 바로 눈치채고 경찰을 움직이거나 정예 킬러들을 보낼 거다. 가석방 신분인 나로선 법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이는 놈들을 상대로 불리해.”
태형이 가방에서 낡은 노트를 꺼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연소희를 찾는 거다.”
“연소희요? 연 회장의 그 외동딸 말입니까?”
“그래. 그녀의 아버지는 사채업계의 대부였고, 그녀는 아버지를 도와 사설 정보원 네트워크를 관리했어. 서울 밤거리의 모든 정보와 비밀 장부, 정재계 카르텔의 약점들이 그 여자 머릿속에 들어있을 거다. 최진상이 연 회장을 죽였다면, 그녀 역시 복수를 꿈꾸고 있겠지.”
태형은 김 교수에게 들었던 정보를 상기했다. 연소희는 아버지가 죽기 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비밀 정보망의 백업 데이터를 은밀한 곳에 숨겨두었다고 했다. 최진상이 그녀를 죽기 살기로 쫓는 이유도 바로 그 정보망과 데이터를 손에 넣기 위해서였다.
“연소희의 행방에 대해 알아낸 게 있나?”
태형의 질문에 창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안 그래도 형님 출소일에 맞춰 정보원들을 굴렸습니다. 최진상의 추적을 피해 인천 연안부두 근처의 버려진 냉동창고 구역에 숨어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습니다. 하지만 금성파의 추적대도 이미 그 근처를 이 잡듯 뒤지고 있다고 합니다. 서두르지 않으면 놈들에게 먼저 잡힐 겁니다.”
태형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인천으로 가자.”
낡은 은색 소나타가 붉은 노을빛을 받으며 서해안고속도로를 향해 굉음을 내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다리는 부서졌고 가진 것은 없었지만, 강태형의 가슴 속에 깃든 철혈의 불꽃은 이제 배신자들의 거대한 제국을 불태우기 위해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복수의 첫 번째 퍼즐, 연소희를 구하기 위한 사냥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