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혈의 맹약

10화: 사냥의 시작
인천 연안부두의 밤은 어둡고 습했다.
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가운데, 버려진 냉동창고 구역의 낡은 가로등 불빛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깨진 유리창 틈새로 비명이 새어 나왔다.
“말해, 이 계집애야! 아버지가 남긴 백업 데이터 어디다 숨겼어?”
창고 내부, 먼지가 자욱한 바닥에 한 여자가 주저앉아 있었다. 짙은 갈색 단발머리에 생채기가 가득한 얼굴. 하지만 그녀의 눈빛만큼은 독기를 품은 채 살아 있었다. 사채업계의 대부 연 회장의 딸이자 정보 조직의 수장인 연소희였다.
그녀를 둘러싼 다섯 명의 사내들 중 우두머리는 덩치가 크고 목에 뱀 문신을 새긴 배기철이었다. 3년 전, 금성타워 서재에서 강태형의 다리를 붙잡아 짓눌렀던 바로 그 행동대원이었다. 지금은 최진상의 신임을 얻어 인천 구역의 행동대장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웃기지 마. 그걸 넘겨주는 순간 내가 살려둘 것 같아?”
소희가 핏물을 퉤 뱉으며 쏘아붙였다. 배기철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이게 아직 정신을 못 차렸네. 진상 형님이 널 살려오라고 하셨지만, 사지 멀쩡하게 데려오라곤 안 하셨거든. 손가락 몇 개 분질러 줘?”
배기철이 주머니에서 접이식 칼을 꺼내 들며 소희의 손을 짓밟으려 했다.
그때, 철컥거리는 쇠사슬 소리와 함께 창고의 거대한 셔터 문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끼이이익-
모두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어둠을 뚫고 빗속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걸어 들어왔다. 한 남자는 가죽 재킷을 입은 험악한 인상의 사내였고, 그 앞을 걷는 남자는 오른쪽 다리를 절뚝거리며 낡은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지팡이가 시멘트 바닥을 두드릴 때마다 탁, 탁, 하는 둔탁한 소리가 창고 안에 울려 퍼졌다.
배기철이 눈을 가늘게 뜨고 침입자를 바라보았다. 이내 그의 얼굴에 비열한 비웃음이 걸렸다.
“어라? 이게 누구야? 태형 형님 아니십니까? 감옥에서 썩다 나오셨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벌써 이렇게 싸돌아다니시면 안 되죠. 다리 병신이 되셨으면 조용히 밥이나 빌어먹고 계시지.”
배기철의 부하들이 킥킥거리며 비웃었다.
태형은 말없이 지팡이를 임창수에게 건넸다. 그리고 가죽 장갑의 끈을 단단히 조였다. 그의 차가운 눈동자가 배기철을 꿰뚫었다.
“기철아. 3년 전 서재에서 내 다리를 잡았던 놈이 너였지?”
“아하, 기억력 좋으시네. 예, 제가 잡았습니다. 실장님이 골프채로 치시기 편하게 아주 꽉 잡고 있었죠. 왜요? 복수라도 하시게요? 그 다리로?”
배기철이 칼을 돌리며 자신만만하게 다가왔다.
“죽여라.”
배기철의 명령에 좌우에 있던 부하 두 명이 각목과 쇠파이프를 들고 일제히 태형에게 달려들었다.
“형님!”
창수가 움직이려 했으나 태형이 손을 들어 말렸다.
태형은 달려드는 첫 번째 놈의 쇠파이프 궤적을 잃어버린 오른쪽 다리를 쓰지 않는 기묘한 각도로 피했다. 몸을 낮추며 쓰러지는 듯한 관성을 이용해 왼쪽 다리로 바닥을 강하게 쓸었다.
스윽- 팍!
태형의 외다리 회전 태클에 사내의 발목이 걸려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태형은 찰나의 순간 상체의 탄력을 이용해 스프링처럼 튀어 올라, 쓰러진 사내의 가슴팍을 향해 팔꿈치를 체중을 실어 내리찍었다.
콰직!
갈비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사내가 피를 토하며 기절했다.
다른 한 놈이 겁에 질려 각목을 횡으로 휘둘렀다. 태형은 피하지 않고 왼팔로 각목을 받아내며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어깨로 상대의 품을 파고드는 동시에, 오른손 장저(palm strike)로 사내의 턱끝을 강하게 쳐 올렸다.
빡-!
뇌진탕을 일으킨 사내가 흰자위를 보이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단 몇 초 만에 두 명이 쓰러졌다. 마두식에게 배운, 약점을 무기로 승화시킨 지옥의 격투술이었다.
“이, 이 괴물 같은 새끼가……!”
배기철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남은 두 명의 부하들도 겁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창수야, 청소해라.”
태형의 지시에 임창수가 신이 난 듯 이빨을 드러내며 남은 부하들에게 달려들었다. 창수의 거친 주먹질에 남은 두 명도 순식간에 피떡이 되어 쓰러졌다.
창고 안에는 이제 강태형과 배기철, 그리고 바닥의 연소희만이 남았다.
태형이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배기철에게 다가갔다. 배기철은 칼을 쥐고 있었지만, 태형이 뿜어내는 압도적인 살기에 눌려 사지를 덜덜 떨었다.
“오, 오지 마! 오면 이 계집년 목을 딴다!”
배기철이 뒤로 물러서며 연소희의 목에 칼을 대려 했다.
그 순간 태형의 몸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지팡이 없이도 한쪽 다리로 지면을 박차고 도약한 그는, 공중에서 몸을 비틀며 배기철의 칼을 쥔 손목을 걷어찼다.
툭-!
칼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태형은 착지와 동시에 배기철의 멱살을 잡고 바닥으로 메쳤다.
쿵!
“끄학!”
태형은 배기철의 가슴 위에 올라타 그의 오른쪽 무릎을 양손으로 단단히 고정했다. 배기철의 눈에 극도의 공포가 서렸다. 3년 전 자신이 강태형에게 했던 짓이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었다.
“기철아. 아프냐?”
태형의 목소리는 너무나 고요해서 소름이 돋았다.
“사, 살려주십시오, 형님! 제가 시켜서 한 게 아닙니다! 최진상 실장이……!”
“진상이 지금 어디 있냐.”
“서, 서울 강남의 금성홀딩스 본사…… 펜트하우스에 있습니다! 다음 달에 있을 보궐선거 정재계 후원회 밤 행사를 준비하느라 매일 거기서 지냅니다! 진짜 아는 건 그게 전부입니다!”
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보 고맙다.”
그리고 태형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죄는 지은 대로 받아야지.”
우드득! 콰직!
태형은 자신의 체중을 모두 실어 배기철의 오른쪽 무릎 관절을 반대 방향으로 꺾어버렸다.
“아아아아악! 내 다리! 내 다리이이익!”
창고 안에 끔찍한 비명이 메아리쳤다. 배기철은 고통에 몸부림치다 이내 기절해 버렸다.
태형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옷에는 배기철의 피가 튀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 자신을 올려다보는 연소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연소희는 태형의 손을 보았다. 거칠고 굳은살이 박힌, 붉은 피가 묻은 손. 하지만 그의 깊은 눈동자 속에는 자신과 똑같은, 아니 자신보다 훨씬 더 뜨겁고 거대한 복수의 불꽃이 불타고 있었다.
그녀는 직감했다. 이 사내만이 아버지를 죽인 최진상과 금성그룹을 파멸로 이끌 유일한 칼이라는 것을.
소희는 태형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강태형 씨 맞죠? 소문은 들었어요.”
“연소희 씨. 나와 손을 잡읍시다. 당신의 정보와 내 힘이 합쳐지면, 최진상의 목을 딸 수 있습니다.”
태형의 제안에 소희의 입가에 붉은 핏빛 미소가 번졌다.
“좋아요. 놈들의 왕국을 잿더미로 만들어 보죠.”
두 사람의 손이 마주 잡혔다. 밤의 거리를 피로 물들일 철혈의 맹약이 마침내 지상에서 맺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