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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혈의 맹약11화

철혈의 맹약

철혈의 맹약

11화: 어둠 속의 밀약

부슬부슬 내리는 가을비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인천 연안부두를 빠져나온 낡은 소나타의 와이퍼가 삐걱거리는 금속 마찰음을 내며 유리에 맺힌 빗물을 닦아냈다. 차 안은 지독하리만큼 고요했다. 운전대를 잡은 임창수는 백미러를 통해 뒷좌석의 눈치를 살폈고, 강태형은 창틀에 턱을 괸 채 어둠 속으로 빠르게 사라지는 가로등 불빛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옆자리에는 연소희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젖은 갈색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창밖을 보았다. 옷자락에서 흘러내린 빗물이 가죽 시트 위로 뚝뚝 떨어졌지만, 누구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배기철 일당의 피와 비명으로 얼룩진 창고를 벗어난 지 삼십 분째, 그들은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오직 거친 엔진 소리와 타이어가 젖은 아스팔트를 짓밟는 마찰음만이 차 안의 적막을 채웠다.

차가 자유로를 타고 일산 방향으로 접어들었을 때쯤, 태형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창수야.”

“예, 형님. 거의 다 왔습니다. 장항동 쪽에 얻어둔 오피스텔인데, 준공된 지 오래된 건물이라 드나드는 사람도 적고 감시 카메라 피하기도 좋습니다. 차는 지하 3층 구석에 대겠습니다.”

“그래. 소희 씨 상태는 어때 보이나.”

태형의 질문에 소희가 먼저 쉰 목소리로 답했다.

“멀쩡해요. 그쪽 걱정이나 하 시죠. 아까 다리를 걷어차는 걸 봤는데, 정상적인 몸 상태가 아니잖아요.”

소희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지만, 그 안에는 기이한 경외심이 섞여 있었다. 지팡이를 짚고 다리를 절뚝거리던 사내가 눈앞에서 펼친 살인적인 격투술. 그것은 단순히 힘이나 기술의 영역이 아니었다. 죽음의 문턱을 수없이 넘나든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생존을 위한 극단의 투쟁 본능이었다.

태형은 대답 대신 가만히 오른쪽 무릎을 쓸어내렸다. 뼈마디가 비정상적으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감옥에서 마두식에게 배운 격투술은 다리의 부하를 최소화하는 방식이었지만, 배기철을 제압하느라 무리가 간 것은 사실이었다. 관절 깊은 곳에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으나 태형은 담담히 표정을 굳혔다.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에 차가 멈춰 섰다.

세 사람은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으로 올라갔다. 낡은 복도 끝자락에 위치한 804호. 창수가 디지털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자, 쾌쾌한 먼지 냄새와 함께 텅 빈 방이 나타났다. 가구라고는 구석에 놓인 낡은 가죽 소파 하나와 작은 식탁, 그리고 조립식 행거가 전부였다. 냉혹한 도망자들의 임시 거처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장소였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태형은 지팡이를 벽에 기대어 놓고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그리고 주저 없이 오른쪽 바짓단을 무릎 위까지 걷어 올렸다.

소희의 눈이 커졌다. 태형의 오른쪽 무릎 주변은 3년 전 최진상이 쇠파이프와 골프채로 짓밟았던 흉터들이 뱀처럼 뒤엉켜 있었다. 게다가 붉게 부어오른 관절 부위는 손만 대도 터질 것처럼 팽팽했다.

태형은 주머니에서 작은 플라스틱 통을 꺼냈다. 그 안에는 청송교도소에서 김 교수를 통해 밀반입해 쓰던 굵은 한방 침 몇 개가 들어 있었다. 태형은 소독도 하지 않은 채, 무릎 주변의 혈 자리를 정확하게 찾아 침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윽…….”

이빨 사이로 짧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거무스름한 피가 침을 타고 한 방울씩 흘러내렸다. 태형은 손끝으로 무릎 주변을 강하게 압박하며 고인 피를 짜내기 시작했다. 그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혔고, 턱관절이 부서질 듯 힘이 들어갔다.

소희는 그 끔찍한 자가 치료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고통을 참아내며 제 몸을 무자비하게 다루는 그의 지독함에 전율을 느꼈다. 최진상이라는 거대한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이 정도의 괴물이 필요했다.

창수가 구급상자와 함께 편의점에서 사 온 뜨거운 캔커피를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형님, 일단 지혈부터 하십시오. 소희 씨도 여기 소독약이랑 붕대 있으니까 상처 좀 닦아내고요.”

소희는 말없이 구급상자에서 알코올 솜을 꺼내 뺨과 입가의 핏자국을 닦아냈다. 화끈거리는 통증이 느껴졌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사채업의 거물인 연 회장 밑에서 거친 밤의 세계를 뼈저리게 겪으며 자란 몸이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태형이 다리를 내리고 소희를 똑바로 응시했다. 침을 뽑아낸 무릎의 통증은 한결 가라앉아 있었다.

“이제 이야기해 보지.”

태형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방 안의 공기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최진상이 왜 그렇게 끈질기게 널 쫓는 거지? 배기철의 말로는 아버지가 남긴 백업 데이터 때문이라던데, 그 안에는 구체적으로 무엇이 들어 있나.”

소희는 캔커피를 두 손으로 감싸 쥐며 온기를 느꼈다. 그녀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단순히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사채업자들은 널려 있어요. 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달랐죠. 아버지는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사람들의 가장 어둡고 은밀한 비밀을 담보로 잡았어요. 정계의 거물들, 법조계의 엘리트들, 그리고 금성그룹 같은 대기업의 핵심 인사들까지. 그들이 사적으로 저지른 비리와 비자금 세탁 경로, 심지어 성 접대 정황이 담긴 녹취록과 동영상까지 전부 아버지가 관리하던 사설 정보망을 통해 수집되었죠.”

소희는 씁쓸하게 웃었다.

“최진상은 머리가 좋은 놈이에요. 태형 씨를 배신하고 금성그룹의 실권을 잡은 뒤, 놈이 가장 먼저 갈망한 건 단순한 조폭의 자리가 아니었어요. 금성그룹을 합법적인 대기업으로 포장하고, 자신은 그 뒤에서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킹메이커가 되고 싶어 했죠. 그러기 위해서는 정관계 인사들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우리 아버지의 정보망과 비밀 장부가 반드시 필요했던 거예요.”

태형의 눈이 가늘어졌다. 3년 전, 그토록 형제처럼 지내던 최진상이 자신에게 살인 누명을 씌우고 쓸쓸히 감옥으로 보냈던 기억이 떠올랐다. 최진상은 항상 더 높은 곳을 갈망했다. 피 묻은 주먹 대신 깔끔한 수트를 입고 신분 세탁을 하길 원했던 놈이다.

“그래서 연 회장을 죽이고 정보망을 가로채려 했다?”

“네. 아버지는 최진상의 야욕을 눈치채고 정보망의 모든 데이터를 암호화해서 외부로 빼돌렸어요. 최진상은 아버지를 고문해가며 정보의 행방을 물었지만, 아버지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고 눈을 감으셨죠. 그 직전에 나에게 연락을 취해 데이터를 숨긴 위치를 알려주셨고요. 그 데이터가 담긴 암호화 하드 드라이브가 바로 최진상을 파멸시킬 수 있는 유일한 열쇠예요.”

태형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그 데이터의 물리적 위치는 어디지?”

소희는 잠시 침묵했다. 이 비밀을 털어놓는 순간,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패를 넘겨주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눈앞의 사내를 믿지 않는다면 최진상의 목을 꺾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녀는 깊은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종로 피맛골 구석에 오래된 전당포가 하나 있어요. 간판에는 ‘금성사’라고 적혀 있죠. 아버지가 수십 년 전부터 차명으로 소유하고 있던 곳이고, 그곳을 지키는 노 영감은 아버지가 평생을 신뢰했던 유일한 금고지기예요. 그 전당포 지하 벽면 금고 안에 하드 드라이브가 숨겨져 있어요.”

“그곳의 보안은?”

“최진상도 바보가 아니에요. 아버지의 연고지를 전부 추적했으니, 그 전당포도 이미 감시 리스트에 올라와 있을 거예요. 금성파의 하부 조직 놈들이 전당포 주변에 위장 잠복해 있어요. 내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며 거미줄을 쳐놓은 상태죠. 나 혼자서는 접근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요.”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창수가 침을 뱉으며 끼어들었다.

“형님, 종로라면 금성파의 본진인 강남과도 그리 멀지 않습니다. 놈들이 덫을 쳐 놨다면 우리가 들어가는 순간 벌집이 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형님은 지금 가석방 상태라 경찰의 이목도 피해야 합니다.”

태형은 창수의 말을 들으며 손가락으로 가볍게 무릎을 톡톡 두드렸다. 규칙적인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최진상이 지금 강남 금성홀딩스 본사의 펜트하우스에 있다고 했지.”

태형이 나지막이 물었다.

“예, 배기철 그 새끼가 불기로는 그렇습니다. 다음 달에 있을 보궐선거 정재계 후원회 밤 행사를 준비하느라 매일 거기서 살다시피 한답니다.”

창수가 답했다.

태형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머릿속에서 최진상의 그 잘난 얼굴이 그려졌다. 비단 수트를 입고 와인잔을 든 채, 정계의 거물들 앞에서 비굴하면서도 오만한 미소를 짓고 있을 배신자의 모습.

“최진상은 이번 후원회 행사를 통해 자신의 신분 세탁을 완전히 끝마치려 할 거다. 정계의 거물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금성그룹의 양지화를 선언하며, 자신이 그들의 확실한 파트너임을 증명하겠지. 그날이 최진상의 인생에서 가장 화려하게 빛나는 정점이 될 거다.”

태형이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복수는 놈이 가장 밑바닥에 있을 때 하는 게 아니다. 가장 높이 올라갔을 때, 스스로 세상을 다 가졌다고 믿는 순간에 가장 처참하게 떨어뜨려야 진짜 복수지.”

소희는 태형의 말뜻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그녀의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쳤다.

“그럼…… 그 후원회 행사를 직접 타겟팅하겠다는 건가요?”

“그래. 최진상이 모아둔 정재계 인사들이 전부 지켜보는 그 화려한 무대 위에서, 네 아버지가 남긴 백업 데이터를 터뜨릴 거다. 뇌물과 비리, 온갖 더러운 약점들이 담긴 판도라의 상자를 그들의 눈앞에서 열어젖히는 거지. 그렇게 되면 최진상을 받쳐주던 거대한 정재계 카르텔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최진상을 가장 먼저 짓밟아 버릴 거다. 아군이라 믿었던 동맹들이 놈의 목을 조르는 광경을 보게 되겠지.”

소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것은 자신이 꿈꾸던 것보다 훨씬 더 파괴적이고 완벽한 복수의 시나리오였다. 단순한 칼부림으로 최진상의 숨통을 끊는 것은 너무 쉬운 자비였다. 놈이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야망의 탑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고, 자신이 모시던 정재계의 주인들에게 개처럼 버려지는 비참함. 그것이야말로 최진상에게 내릴 수 있는 최고의 형벌이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먼저 종로의 전당포에서 데이터를 무사히 회수해야 해요. 놈들의 경계를 뚫고 데이터를 가져오는 게 첫 번째 관문이에요.”

소희가 현실적인 문제를 짚었다.

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최진상이 눈치채기 전에 움직여야 한다. 배기철 일당이 연락이 두절되었다는 사실을 최진상이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야. 늦어도 내일 밤 안에는 전당포를 쳐야 해.”

태형은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 쪽으로 걸어갔다. 지팡이를 짚지 않은 그의 걸음은 다소 부자연스러웠지만, 그 기백만큼은 방 안을 압도하고 있었다. 식탁 위에 놓인 종이 지도 위에 태형이 손가락을 얹었다. 종로 피맛골 일대. 골목이 좁고 미로처럼 얽혀 있어 탈출과 잠입이 용이하지만, 동시에 매복에 걸리면 빠져나오기 힘든 외통수가 될 수도 있는 지역이었다.

“소희 씨는 이곳에 남아서 정보망을 복구할 준비를 해. 네 아버지를 따르던 정보원들 중 아직 최진상에게 포섭되지 않은 충성스러운 이들이 있을 거다. 은밀하게 연락망을 가동해서 데이터를 확보하는 즉시 분석할 수 있도록 세팅해 둬.”

“알겠어요. 연락이 닿을 만한 인물들이 몇 명 있어요. 최진상에게 쫓겨 몸을 사리고 있지만, 내가 살아있고 강태형 씨와 함께 움직인다는 걸 알면 힘을 보탤 거예요.”

소희가 단호하게 말했다.

태형은 고개를 돌려 창수를 바라보았다.

“창수야. 우리는 종로로 간다. 전당포 주변의 매복 규모를 파악하고, 최진상의 사냥개들이 덫을 놓아 두었다면 역으로 그 덫을 이용해 놈들의 목덜미를 문다.”

“예, 형님. 연안부두에서 몸이 좀 덜 풀렸는데, 내일 밤 제대로 한 판 벌여보겠습니다.”

창수가 이빨을 드러내며 씩 웃었다. 그의 눈에는 오랜만에 주군을 모시고 현장을 누비는 야수의 흥분이 서려 있었다.

창 밖으로 쏟아지는 빗줄기는 더욱 굵어졌다. 차가운 빗소리가 오피스텔 창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가운데, 어두운 방 안에는 오직 세 사람의 나직한 숨소리와 복수를 향한 서늘한 의지만이 맴돌았다.

배신당한 사냥개 강태형, 아버지를 잃은 정보원의 수장 연소희, 그리고 충직한 해결사 임창수.

서로 다른 상처를 안고 어둠 속에서 마주 잡은 그들의 손은, 이제 거대한 금성파라는 괴물의 심장을 꿰뚫을 철혈의 맹약이 되어 단단히 묶였다.

복수의 톱니바퀴가 마침내 차가운 소리를 내며 굴러가기 시작했다. 첫 번째 전장은 종로 피맛골의 어두운 골목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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