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혈의 맹약

12화: 피맛골의 사냥
밤의 종로 피맛골은 거대한 아가리를 벌린 짐승처럼 음침했다.
쏟아지는 폭우는 낡은 슬레이트 지붕과 함석판을 세차게 때리며 둔탁한 소음을 만들어냈다. 어스름한 가로등 불빛이 깨진 보도블록 사이로 고인 빗물에 반사되어 핏빛처럼 일렁였다. 좁은 골목길은 버려진 쓰레기 봉투와 썩은 음식물 냄새, 그리고 비릿한 하수구 악취가 뒤섞여 숨을 쉴 때마다 코끝을 찔렀다.
태형과 창수는 검은 우산을 깊숙이 눌러쓴 채, 골목 구석의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피맛골 입구 건너편, 낡은 카니발 한 대가 미등을 끈 채 대기하고 있었고, 그 안에는 무전기를 쥔 연소희가 밖을 주시하고 있었다.
지 지직-.
인이어 이어폰을 통해 소희의 긴장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태형 씨, 들려요? 전당포 반경 50미터 내에 배치된 감시 인원은 총 여섯 명이에요. 두 명은 전당포 정문 건너편 낡은 호프집 처마 밑에 있고, 다른 두 명은 골목 뒤쪽 막다른 길목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어요. 나머지 두 명은 전당포 바로 옆 건물 계단실에 숨어 있네요.”
“확인했다.”
태형은 나직하게 답하며 지팡이 손잡이를 단단히 쥐었다. 빗줄기 사이로 보이는 전당포 ‘금성사’는 낡은 철제 셔터가 굳게 내려진 채 침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침묵 아래에는 사냥감을 기다리는 거미들의 살기가 팽팽하게 흐르고 있었다.
“창수야.”
“예, 형님.”
창수가 우산 아래로 이빨을 드러내며 나직하게 답했다.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들썩였다. 싸움을 앞둔 맹수의 흥분이었다.
“후방 골목의 두 놈부터 정리한다. 소리 내지 말고 깔끔하게.”
“걱정 마십시오.”
창수가 우산을 바닥에 던져두고 빗속으로 몸을 날렸다. 그의 거구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소리 없이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태형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오른쪽 다리를 절뚝거릴 때마다 짚는 지팡이 끝이 고인 빗물을 헤집으며 척, 척, 하는 규칙적인 소리를 냈다. 빗소리가 워낙 거셌기에 그 작은 소음은 이내 묻혀버렸다. 태형이 향한 곳은 전당포 옆 건물의 계단실이었다.
계단실 입구의 어둠 속에서 붉은 담뱃불이 깜빡이고 있었다.
“야, 아까부터 뭔 소리 나지 않냐?”
비옷을 입은 조직원이 담배 연기를 뱉으며 짝귀라 불리는 동료에게 물었다.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데 개뿔이……. 어? 누고?”
짝귀가 우산을 쓰고 다가오는 남자의 실루엣을 발견하고 손을 품으로 가져가려 했다.
그 찰나, 태형의 지팡이가 번개처럼 허공을 갈랐다. 지팡이 끝의 단단한 강화 고무 헤드가 짝귀의 목울대를 정확하게 강타했다.
컥-!
짝귀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목을 감싸 쥐며 주저앉았다. 옆에 있던 녀석이 눈을 부릅뜨고 칼을 뽑으려 했으나, 태형은 이미 잃어버린 오른쪽 다리의 중심을 벽에 기대어 지탱한 상태였다. 태형은 왼쪽 다리를 축으로 삼아 몸을 회전시키며, 지팡이의 중간 부분을 양손으로 잡고 사내의 턱끝을 아래에서 위로 강하게 쳐올렸다.
빡-!
턱뼈가 부서지는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사내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태형은 쓰러지는 사내의 머리를 지팡이 손잡이 곡선 부분으로 낚아채어 계단 모서리에 그대로 내리찍었다.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가 축 늘어졌다. 단 두 동작, 3초도 걸리지 않은 완벽한 제압이었다.
골목 뒤쪽에서도 창수가 마무리를 지었는지 나직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창수는 벌써 정문 건너편의 호프집 처마 밑에 있던 두 명마저 바닥에 처박아 둔 상태였다. 그들의 손목과 발목을 꺾어 비명도 지르지 못하게 입을 막아놓은 창수가 태형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정리 끝났습니다, 형님.”
“셔터 열어라.”
창수가 미리 준비해 온 소형 빠루를 셔터 틈새에 밀어 넣고 힘을 주었다. 끼이이익 하는 쇳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뜯겨 나갔다. 태형과 창수는 재빠르게 전당포 내부로 몸을 밀어 넣고 셔터를 다시 내려 닫았다.
전당포 안은 칠흑 같은 어둠과 곰팡내로 가득했다.
창수가 플래시를 비췄다. 오래된 철제 창살이 처진 카운터와 먼지 쌓인 진열장들이 보였다. 벽면 한쪽에는 찢어진 금성사 간판의 시안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두 사람은 주저 없이 카운터 안쪽의 문을 열고 지하 계단으로 향했다. 가파르고 축축한 지하 계단을 내려가자, 쇠문 하나가 나타났다. 문은 이미 뜯겨 있었고, 안쪽에서 희미한 피비린내가 풍겨 나왔다.
태형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 플래시 불빛 속에 끔찍한 광경이 드러났다. 의자에 묶인 채 머리를 늘어뜨리고 있는 노인. 연 회장의 오랜 심복이자 이 전당포의 주인인 노 영감이었다. 그의 옷은 피로 흥건히 젖어 있었고,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으스러져 있었다. 이미 숨이 끊어진 지 몇 시간은 되어 보였다.
“노 영감님…….”
창수가 잇새로 나직한 탄식을 뱉었다. 최진상의 부하들이 데이터를 찾아내기 위해 노인을 모질게 고문한 흔적이었다. 하지만 노인의 굳게 다문 입가에는 굳은 의지가 남아 있었다. 그는 끝내 입을 열지 않고 비밀을 지켜낸 것이다.
태형은 노인의 감기지 못한 눈을 손으로 쓸어내려 감겨주었다.
“편히 쉬십시오. 빚은 곧 갚아주겠습니다.”
태형은 곧바로 벽면으로 다가갔다. 소희가 알려준 위치는 벽에 걸린 낡은 괘종시계 뒤쪽이었다. 태형이 시계를 옆으로 치우자 콘크리트 벽면을 깎아 만든 이중 금고의 다이얼이 드러났다.
태형은 소희가 일러준 비밀번호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연 회장의 생일과 소희의 생일을 조합한 숫자들.
다이얼을 왼쪽으로 세 번, 오른쪽으로 두 번 돌리자 둔탁한 쇳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렸다. 금고 내부에는 현금 뭉치와 몇 개의 장부가 있었지만, 태형의 손이 향한 곳은 안쪽 깊숙한 홈에 끼워져 있던 검은색 소형 암호화 하드 드라이브였다. 티타늄 케이스로 감싸인, 최진상을 파멸시킬 판도라의 상자였다.
태형은 하드 드라이브를 코트 안주머니에 깊숙이 집어넣었다.
“창수야, 챙겼다. 나가자.”
그때였다.
위층에서 쿵, 하는 묵직한 발소리와 함께 서늘한 기운이 지하 계단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빗소리를 뚫고 들려오는 느리고 일정한 구두 굽 소리. 그리고 쇠사슬이 바닥을 끄는 듯한 소름 끼치는 금속음이 들려왔다.
“태형 형님. 오랜만입니다.”
계단 위 어둠 속에서 낮고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태형의 눈이 가늘어졌다.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사내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훤칠한 키에 회색 롱코트를 입은 사내. 그의 오른손에는 길쭉한 검은 가죽 케이스가 들려 있었다.
송진욱.
최진상이 거느린 해결사들 중에서도 가장 잔혹하고 실력이 뛰어나기로 악명 높은 킬러였다. 3년 전 태형이 건재할 때도 조직 내에서 유일하게 태형의 무력을 시기하며 칼날을 갈던 자였다.
송진욱이 가죽 케이스를 열자, 빗빛처럼 차가운 안광을 뿜어내는 예리한 사시미 칼 두 자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진상 형님이 말씀하시더군요. 태형 형님이 출소하셨으니 분명 이쪽으로 올 거라고. 다리 병신이 된 형님이 직접 쥐새끼처럼 굴러 들어오시니 제 손으로 치우기 참 편합니다.”
송진욱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걸렸다.
지 지직-.
인이어를 통해 소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 “태형 씨! 당장 나와야 해요! 골목 입구에 카니발 세 대가 추가로 도착했어요! 금성파 행동대원들이 전당포를 완전히 포위하고 있어요!”
“창수야, 넌 노 영감 시신을 업고 뒤로 빠져라.”
태형이 지팡이를 고쳐 잡으며 나직하게 지시했다.
“형님! 저 새끼는 제가……!”
“아니, 넌 시신을 챙겨. 저놈은 내가 상대한다. 3년 전에 끝냈어야 할 악연이다.”
태형의 단호한 태도에 창수는 이를 갈며 노인의 시신을 들쳐멨다.
송진욱이 사시미 칼을 역수로 쥐며 비웃었다.
“다리 절뚝거리는 늙은 사냥개가 제 분수를 모르는군. 죽여주마, 강태형!”
스윽-!
송진욱의 몸이 뱀처럼 유연하게 앞으로 미끄러졌다. 그의 손에 쥔 칼날이 좁은 지하실의 공기를 가르며 태형의 목덜미를 향해 호선을 그렸다. 극도로 빠르고 치명적인 궤적이었다.
태형은 피하지 않았다. 오른쪽 다리를 쓸 수 없기에 회피 기동은 불가능했다. 대신 그는 지팡이를 양손으로 잡고 칼날의 궤적을 쳐냈다.
깡-!
날카로운 불꽃이 어둠 속에서 튀었다. 송진욱은 튕겨 나간 반동을 이용해 즉시 왼손의 칼로 태형의 옆구리를 찔러 들어왔다. 태형은 지팡이 끝을 바닥에 강하게 딛으며 몸의 중심을 뒤로 무너뜨렸다. 칼날이 그의 가죽 코트 자락을 찢고 스쳐 지나갔다.
“하하! 다리가 굳으니 반응도 굼뜨군!”
송진욱이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리며 몰아붙였다. 지하실 벽과 기둥을 등진 채 태형은 연이어 쏟아지는 칼날을 지팡이 하나로 겨우 막아내고 있었다. 쇳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려 퍼졌고, 태형의 코트 곳곳에 붉은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태형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고요했다. 그는 철저히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좁은 지하 공간, 벽면의 기둥들, 그리고 송진욱의 오만한 움직임까지 전부 그의 계산 속에 들어있었다.
송진욱이 태형을 확실히 끝내기 위해 오른손 칼을 길게 찔러왔다. 태형의 가슴을 꿰뚫을 일격이었다.
그 순간, 태형은 피하는 대신 왼손으로 자신의 지팡이 윗부분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지팡이 손잡이의 휜 부분을 송진욱의 칼날을 쥔 손목에 걸어 채며 옆으로 비틀었다.
우드득-!
“끄악!”
강력한 지렛대의 원리에 송진욱의 손목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났다. 칼 한 자루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송진욱이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려 했으나, 태형은 이미 벽을 등지고 몸을 지탱한 채 왼쪽 다리로 지면을 강하게 박차고 도약한 상태였다.
태형은 공중에서 몸을 비틀며, 온 체중을 실은 지팡이의 철제 하단부로 송진욱의 무릎 관절을 정면으로 찍어 내렸다.
콰직-!
“아아아아악!”
송진욱의 무릎이 뒤쪽으로 꺾이며 비명이 지하실을 찢었다. 3년 전 태형이 당했던 고통, 그리고 방금 배기철에게 내렸던 심판이 송진욱에게도 고스란히 재현되었다. 송진욱이 바닥에 쓰러져 뒹굴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태형은 비틀거리며 착지했다. 오른쪽 무릎에서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몰려왔지만, 그는 지팡이를 짚고 꼿꼿이 섰다. 바닥에 떨어진 송진욱의 칼을 발로 차서 멀리 치워버린 태형이 쓰러진 킬러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최진상에게 전해라. 사냥개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고.”
태형은 주저 없이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지상으로 올라오자 전당포 정문 셔터 너머로 수십 명의 조직원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포위망이 좁혀들고 있었다.
“형님! 이쪽입니다!”
뒤쪽 창고의 환기창을 뜯어낸 창수가 태형을 향해 손짓했다. 창수의 어깨에는 노 영감의 시신이 얹혀 있었다.
태형과 창수는 좁은 환기창을 통해 피맛골의 외곽 골목으로 기어 나갔다. 빗줄기는 여전히 거세게 쏟아지고 있었다.
“잡아라! 저기다!”
뒤쪽에서 플래시 불빛들이 골목을 비추며 금성파 조직원들이 고함을 질렀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사냥개들이 무리를 지어 쫓아오고 있었다. 태형은 다리를 절며 창수와 함께 어두운 미로 같은 골목을 질주했다. 골목 모퉁이를 돌 때마다 추격대원들이 앞을 가로막았으나, 창수의 무자비한 태클과 태형의 날카로운 지팡이 타격에 핏물을 뿜으며 쓰러졌다.
골목 끝자락, 대로변과 연결되는 출구에 카니발 한 대가 굉음을 내며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슬라이딩 도어가 열리며 소희가 소리쳤다.
“빨리 타요!”
창수가 먼저 노 영감의 시신을 차 안으로 밀어 넣었고, 이어 태형이 몸을 던지듯 탑승했다. 마지막으로 창수가 올라타자마자 소희는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았다.
끼이이익-!
카니발의 타이어가 빗길에서 비명을 지르며 서울의 어두운 밤거리로 튕겨 나갔다. 뒤늦게 골목을 빠져나온 금성파 조직원들이 빗속에서 허탈하게 소리를 질렀지만, 차는 이미 밤의 어둠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차 안의 무거운 정적 속에서, 태형은 코트 주안주머니에서 차가운 티타늄 재질의 하드 드라이브를 꺼내 들었다.
최진상의 목을 죌 사슬, 그리고 그들의 맹약을 실현할 피 묻은 열쇠가 마침내 강태형의 손에 쥐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