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혈의 맹약

13화: 망령의 귀환
일산의 오피스텔 안에는 빗방울이 유리창을 때리는 소리만이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임창수가 노 영감의 시신을 아는 사설 구급대원을 통해 은밀히 장례식장 지하 안치실로 운구하기 위해 나간 사이, 연소희는 젖은 코트를 바닥에 던져둔 채 즉시 식탁 위에 노트북을 펼쳤다. 그녀의 온몸은 차가운 빗물과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지만, 떨리는 손가락은 멈추지 않고 키보드를 두드렸다.
“기다려요, 이제 거의 다 됐어요…….”
소희의 헝클어진 갈색 머리 사이로 모니터의 푸른 빛이 일렁였다. 티타늄 케이스에서 꺼낸 암호화 하드 드라이브가 빨간색과 초록색 발광 다이오드를 번갈아 깜빡이며 작동음을 냈다. 연 회장이 설계해 둔 3중 보안 프로토콜은 악명 높은 군용 암호 수준이었지만, 소희는 아버지가 살아생전 자신에게 가르쳐 준 특수 해독 루틴을 하나씩 실행해 나갔다.
강태형은 젖은 옷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 소파에 앉아 조용히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담배를 물었지만 불은 붙이지 않았다. 그의 깊은 눈동자에는 피맛골에서 흘린 노 영감의 피와, 3년의 세월이 남긴 배신의 상흔이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탁, 탁, 탁, 타닥-.
마지막 엔터 키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눌렸다. 모니터 화면에 붉은색 경고 창이 사라지고, 수많은 폴더와 데이터 시트들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풀렸어요. 전체 데이터의 약 30% 수준이지만, 가장 핵심적인 자금줄 경로가 먼저 복구됐어요.”
소희가 상기된 목소리로 말하며 모니터를 태형 쪽으로 돌렸다.
태형이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와 모니터를 내려다보았다. 복잡한 지주회사와 차명 법인들의 거래 내역서 위로 낯익은 이름 하나가 붉은색 마커로 칠해져 있었다.
‘박형태.’
여당의 3선 의원이자, 다음 달 강남구 보궐선거에 출마해 차기 정권의 실세로 거론되는 거물 정치인이었다.
“박형태 의원이군요.”
태형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맞아요. 최진상이 박형태에게 제공한 뇌물과 불법 정치 자금의 규모가 상상을 초월해요. 박형태는 금성그룹이 추진하는 강남 일대 재개발 사업의 인허가를 몰래 통과시켜 주는 대가로 거액의 돈을 챙겼어요. 그리고 그 지저분한 비자금 세탁의 한가운데에 바로 ‘금성캐피탈’이 있어요.”
소희가 마우스를 움직여 금성그룹의 2금융 계열사인 금성캐피탈의 재무제표를 띄웠다.
“금성캐피탈은 겉으로는 합법적인 캐피탈 회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최진상이 불법 사설 도박장과 마약 밀매로 벌어들인 피 묻은 돈을 세탁해 박형태의 차명 계좌로 밀어 넣는 통로예요. 박형태는 이번 보궐선거를 기점으로 최진상에게 날개를 달아줄 생각이었겠죠. 금성그룹을 완벽한 합법 대기업으로 세탁해 주는 대가로요.”
태형은 모니터에 비친 박형태의 얼굴을 차갑게 쏘아보았다. 최진상이 쌓아 올리려는 합법의 제국, 그 중심 기둥이 바로 박형태와 금성캐피탈이었다.
“첫 번째 표적이 정해졌군.”
태형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최진상의 목을 따기 전에, 놈을 떠받치고 있는 썩은 기둥부터 부러뜨려야 해. 박형태로 향하는 금성캐피탈의 비자금 줄을 끊어놓는다. 자금이 묶이고 비리가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 박형태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최진상을 뱀 보듯 피할 테니까.”
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고운 눈매에 독기가 어렸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들의 숨통을 끊을 첫 단추가 드디어 맞춰진 것이다.
같은 시각, 서울 강남의 금성홀딩스 본사 펜트하우스.
사방이 통유리로 되어 강남의 화려한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초호화 거실에는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통창 밖으로 내리는 폭우가 야경을 흐릿하게 지우고 있었다.
거실 한가운데, 휠체어에 앉은 사내가 온몸을 덜덜 떨며 신음하고 있었다. 회색 코트가 피와 진흙으로 엉망이 된 송진욱이었다. 그의 오른쪽 무릎은 비정상적인 각도로 꺾여 부서진 채 기포가 섞인 핏물이 바지를 적시고 있었다. 정형외과 의사가 응급 처치를 하려 무릎을 건드릴 때마다 송진욱은 이빨을 드러내며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최진상은 소파에 앉아 그 광경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고급 크리스탈 위스키 잔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최진상의 단정하던 포마드 헤어는 헝클어져 있었고, 실크 셔츠 단추는 두어 개 풀려 있었다.
“송진욱.”
최진상의 목소리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낮고 갈라져 있었다.
“예, 실, 실장님…….”
“네가 강태형의 다리를 부러뜨렸던 게 3년 전이지. 그렇지?”
“예, 예…… 윽, 아악!”
“그런데 왜 네 다리가 저 모양이 돼서 돌아왔지?”
최진상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동자에는 극도의 공포와 분노가 뒤섞인 광기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송진욱의 으스러진 무릎 관절은 3년 전 자신이 골프채로 내려쳤던 강태형의 오른쪽 무릎과 소름 끼치도록 똑같은 형태로 파괴되어 있었다.
이것은 메시지였다. 강태형이 지옥에서 걸어 나와 자신에게 보내는 명백한 경고장이었다.
“강태형…… 그 병신 새끼가 살아 돌아왔단 말이지.”
최진상은 위스키 잔을 대리석 바닥에 사정없이 내던졌다.
쨍그랑-!
날카로운 파편과 위스키가 거실 바닥으로 사방에 튀었다. 배기철에 이어 조직 내 최고의 칼잡이였던 송진욱마저 처참하게 박살이 났다. 자신이 완성해 가던 제국이 밑바닥에서부터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3년 동안 가두어 두었던 지옥의 사냥개가 쇠사슬을 끊고 제 목덜미를 노리고 있다는 공포가 그의 목을 죄어왔다.
“실장님, 태형 형님의 무력은 예전 그대로, 아니 예전보다 더 기괴해졌습니다. 다리를 쓰지 않는 기묘한 기술로…….”
송진욱이 고통 속에서 간신히 말을 이었지만, 최진상은 그의 따귀를 매섭게 후려쳤다.
찰싹-!
“입 닥쳐! 어디서 그 병신 이름을 입에 올려!”
최진상은 씩씩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얼굴은 핏기가 사라진 채 하얗게 질려 있었다. 배신자가 갖는 본능적인 열등감과 공포가 그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비서실장!”
최진상의 고함에 검은 수트를 입은 비서가 급히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서초서 서장한테 연락해. 수배령이든 뭐든 법조계 인맥 다 동원해서 강태형 그 새끼를 가석방 위반으로 즉시 체포하라고 압박해! 그리고 사설 킬러들, 차이나타운 놈들이든 해외 청부업자든 상관없으니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까 당장 움직이라고 해!”
최진상은 창밖의 어두운 빗줄기를 바라보며 주먹을 피가 나도록 꽉 쥐었다.
“내 눈앞에 강태형 그 새끼 머리통을 가져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엔 아무도 못 쉬어. 당장 움직여!”
배신자의 광기 어린 울부짖음이 펜트하우스의 천장을 울렸다.
다음 날 밤, 비는 그쳤지만 검은 안개가 김포 변두리의 공장 지대를 무겁게 뒤덮고 있었다.
오래된 디젤 엔진 소리를 내며 낡은 은색 소나타가 자갈길을 덜컹거리며 달렸다. 운전대를 잡은 창수가 미등만 켠 채 길을 재촉했고, 조수석의 태형은 창밖의 쓸쓸한 풍경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최진상이 경찰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서초서 놈들이 일산 일대 CCTV를 뒤지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놈들이 사설 킬러들까지 풀었다니, 우리 셋만으로는 곧 전력이 달릴 겁니다.”
창수의 목소리에는 깊은 우려가 담겨 있었다.
태형은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진상은 쥐새끼 같아서 코너에 몰리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덤벼들 놈이었다. 합법의 탈을 쓴 권력과 밤의 무력이 결합한 거대한 적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려면, 자신들을 받쳐줄 든든한 등뒤가 필요했다.
“그래서 마동이를 찾아가는 거다.”
태형이 지팡이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박마동…… 그 녀석, 형님이 감옥 가신 뒤로 최진상 놈들에게 가장 모질게 당했습니다. 진상이가 그 녀석 오른손 손가락 세 개를 프레스로 눌러 으깨버렸죠. 다시는 연장을 못 쥐게 하려고요. 그 후로 여기 김포 폐차장에 처박혀 쓰레기 더미 속에 파묻혀 산 지 2년이 넘었습니다. 제정신으로 살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창수의 말투에 쓸쓸함과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박마동은 과거 강태형의 직속 행동대이자 오른팔 창수와 함께 조직의 쌍포로 불리던 거구의 장사였다. 태형을 향한 의리 하나로 목숨을 걸던 충직한 동생이었다.
차가 멈춰 선 곳은 김포 간척지 구석에 위치한 ‘대성 폐차장’이었다.
입구에는 녹슬고 찌그러진 폐차들이 성벽처럼 높게 쌓여 있어 기괴한 분위기를 풍겼다. 안개 속에서 낡은 서치라이트 하나가 흐릿하게 마당을 비추고 있었다.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폐차장 마당으로 걸어 들어갔다. 태형의 지팡이가 바닥의 자갈과 철판 조각들을 디딜 때마다 둔탁한 소리가 고요한 폐차장에 울려 퍼졌다.
쾅! 쾅! 쾅!
폐차장 안쪽에서 무거운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따라가자, 거대한 폐차 프레스 기계 옆에서 한 사내가 커다란 해머를 휘두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키가 190센티미터는 족히 넘어 보이는 거구. 땀과 기름때로 찌든 허름한 청바지에 소매를 걷어붙인 사내의 팔뚝은 웬만한 성인 남성의 허벅지만큼 굵었다. 그의 수염은 덥수룩하게 자라 있었고, 해머를 쥔 오른손은 장갑을 끼고 있었지만 굳어버린 세 개의 손가락이 부자연스럽게 뒤틀려 있는 것이 멀리서도 보였다.
박마동이었다.
그는 안개 속에서 쏟아지는 땀을 훔치며, 폐차된 트럭의 엔진 블록을 향해 해머를 사정없이 내리치고 있었다. 쇠와 쇠가 부딪칠 때마다 불꽃이 튀었고, 사내의 거친 숨소리가 짐승의 울부짖음처럼 공기 중에 퍼졌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분노와 스스로의 무력함에 대한 절규처럼 느껴졌다.
태형은 발걸음을 멈추고 묵묵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창수가 입술을 짓씹으며 나직하게 불렀다.
“마동아.”
거구의 사내가 해머를 치켜든 채 동작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땀과 기름때가 범벅이 된 그의 얼굴 위로, 흐릿한 서치라이트 불빛이 비쳤다. 마동의 탁한 눈동자가 창수를 거쳐, 그 뒤에 서 있는 남자에게 닿았다.
오른쪽 다리를 약간 절며, 낡은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사내. 3년 전 자신들의 태양이자 모든 것이었던 행동대장 강태형이었다.
마동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의 오른손에 들려 있던 묵직한 해머가 진흙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쿵-.
“형…… 님……?”
기름때 묻은 사내의 목소리가 젖은 안개 속에서 잘게 떨렸다. 그의 붉게 충혈된 눈시울에 순식간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태형은 지팡이를 짚은 채 마동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3년 전과 다름없는, 차갑지만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랜만이다, 마동아. 기름때 씻고 가자. 사냥하러 가야지.”
그 한마디에 거구의 사내는 무릎을 꿇듯 바닥 주저앉으며 굵은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지옥에서 돌아온 그들의 대장이, 드디어 흩어진 사냥개들을 다시 불러 모으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