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혈의 맹약

14화: 아킬레스건을 겨누다
김포 폐차장의 안개는 밤이 깊어갈수록 더욱 짙어졌다. 가로등조차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찌그러진 자동차들의 실루엣은 마치 기괴한 무덤처럼 서 있었다.
박마동은 진흙바닥에 주저앉아 굵은 눈물을 훔쳤다. 거구의 몸이 흐느낄 때마다 좁은 어깨가 잘게 들썩였다. 그는 천천히 자신의 오른손 장갑을 벗어 던졌다. 가로등 희미한 불빛 아래 드러난 그의 오른손은 참혹했다. 검지와 중지, 약지 세 손가락이 기괴하게 휘어져 굳어 있었고, 손등에는 무수한 수술 흉터가 얽혀 있었다.
“형님…… 저 이제 예전의 박마동이 아닙니다. 진상이 그 악마 같은 새끼가 제 손가락 신경을 다 죽여 놨습니다. 칼도 못 쥐고, 연장도 제대로 못 잡는 병신입니다. 폐차장에서 쇠망치나 휘두르는 고철덩어리일 뿐입니다. 저 같은 놈은 형님께 짐만 될 뿐입니다.”
마동은 으스러진 오른손을 들어 보이며 절망 섞인 목소리로 토해냈다.
“형님 다리도 그렇게 만든 놈들입니다. 그만하십시오. 최진상은 이제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조폭이 아닙니다. 법과 권력을 쥔 거물입니다. 형님마저 잘못되시면 저는 진짜 살 이유가 없습니다.”
태형은 묵묵히 마동의 으스러진 손을 바라보았다. 분노가 그의 척추를 타고 차갑게 솟구쳤으나, 그의 눈빛은 도리어 깊은 호수처럼 잔잔해졌다.
태형은 들고 있던 지팡이를 들어 바닥에 뒹굴고 있던 트럭의 녹슨 철판떼기를 강하게 내리쳤다.
탕-!
고요한 폐차장에 날카로운 파열음이 메아리쳤다. 깜짝 놀란 마동이 고개를 들어 태형을 바라보았다.
“마동아.”
태형의 목소리에는 낮지만 거역할 수 없는 지독한 쇳소리가 실려 있었다.
“내 다리가 부러졌을 때, 다들 내 시대는 끝났다고 했다. 감옥에서 3년을 썩는 동안 최진상은 강남 펜트하우스에서 왕 노릇을 하며 떵떵거렸지. 하지만 난 단 한 순간도 그놈을 잊은 적이 없다. 몸뚱이가 꺾였다고 해서 내 피까지 식은 줄 아느냐.”
태형이 지팡이를 굳게 짚고 마동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손가락 몇 개 굳은 게 대수냐. 우리 가슴속에 흐르는 뜨거운 피와 그날 맺었던 맹약은 아직 그대로다. 넌 여전히 내 동생이고, 내가 가장 신뢰하는 방패다. 이 다리로도 지옥에서 기어 나와 놈들의 무릎을 꺾었다. 내 곁에 서라, 마동아. 배신자들의 대가리를 으깰 해머를 다시 쥐어주마.”
태형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위로보다 강렬한 철혈의 신념이 담겨 있었다. 마동의 심장 속 깊은 곳에서 사그라들었던 불꽃이 다시 맹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주저앉았던 마동은 떨리는 오른손을 꽉 쥐며 진흙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형님…… 짐만 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 목숨, 형님을 위해 던지겠습니다.”
태형은 마동의 어깨를 꽉 쥐어 일으켰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창수의 눈시울도 붉어져 있었다. 흩어졌던 사냥개들이 마침내 하나의 구심점으로 뭉치는 순간이었다.
일산의 오피스텔 은신처로 복귀한 세 사람을 연소희가 굳은 얼굴로 맞이했다. 은신처 안은 여전히 빗물 냄새와 냉기가 가득했다.
소희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190센티미터가 넘는 거구의 박마동을 보고 본능적으로 주춤했으나, 그의 으스러진 오른손과 눈에 서린 서릿발 같은 살기, 그리고 강태형을 대하는 충직한 태도를 보고 단번에 태형이 말했던 옛 행동대임을 알아챘다. 소희는 가볍게 묵례를 건넨 뒤, 곧바로 식탁 위의 노트북 모니터를 띄우며 브리핑을 시작했다. 세 사내의 시선이 일시에 빛나는 모니터 화면으로 쏠렸다.
“금성캐피탈의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을 찾았어요. 이곳만 제대로 타격하면 최진상의 자금줄은 모래성처럼 무너집니다.”
소희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마우스를 움직여 강남 대로변에 위치한 15층짜리 현대식 유리 빌딩의 입체 도면을 가리켰다. 금성파의 자금 세탁 본부나 다름없는 금성캐피탈 본사 건물이었다.
“건물 지하 2층에는 공식적으로 ‘폐쇄된 보일러실 및 기계실’로 표기되어 있어요. 내부 도면에는 소방 시설 미비로 출입 통제 구역이라 적혀 있죠. 하지만 실제로는 최진상이 극비리에 운영하는 상류층 전용 사설 카지노이자, 정재계 거물들의 비자금을 보관하는 비밀 금고예요.”
“사설 카지노와 비밀 금고라…….”
태형의 눈이 빛났다.
“네. 매주 목요일 밤, 바로 내일 밤이에요. 여당의 대선 후보 경선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박형태 의원 측 VIP들과 기업인들이 모여 판을 벌여요. 겉으로는 도박이지만, 실제로는 기업인들이 도박 칩을 구매하는 방식으로 현금을 건네고, 금성캐피탈은 이를 합법적인 대출 원리금 회수나 투자금으로 돈 세탁을 거쳐 박형태의 차명 계좌로 밀어 넣어주죠. 내일 밤 그곳 지하 금고에는 세탁 대기 중인 현금만 최소 수십 억 원이 쌓일 예정이에요.”
소희는 단호한 눈빛으로 태형을 바라보았다.
“내일 밤 그 도박판을 깨부수고 현금을 확보해야 해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그 지하 금고 안에는 박형태와 최진상이 수년간 주고받은 비자금 세탁 내역이 적힌 실물 차명 장부가 보관되어 있어요. 데이터 드라이브의 암호가 다 풀리기 전에, 그 실물 장부만 확보하면 박형태의 목줄을 바로 쥘 수 있어요.”
태형은 지도 위를 응시하며 머릿속으로 작전을 그렸다. 강남 한복판, 금성파의 본진이나 다름없는 구역이다. 경비가 삼엄할 터였지만, 놈들이 가장 방심하는 은밀한 지하 세계야말로 가장 취약한 틈새였다.
“마동아.”
태형이 나직하게 부르자, 마동이 거대한 몸을 꼿꼿이 세우며 태형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예, 형님. 말씀만 하십시오.”
“오른손에 망치를 쥘 수 있겠나.”
마동은 으스러진 오른손을 천천히 쥐었다 폈다. 뚝, 뚝, 하는 관절 마찰음이 무겁게 들렸다. 그는 식탁 위에 놓인 대리석 재떨이를 으스러진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검지와 중지가 굳어 제대로 힘이 실리지 않았지만, 엄지와 새끼손가락, 그리고 타고난 손바닥의 무시무시한 악력만으로 두꺼운 대리석 재떨이가 삐걱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손가락 세 개는 굳었지만, 나머지 손아귀 힘은 아직 쓸 만합니다. 망치 손잡이에 두꺼운 가죽 끈만 튼튼하게 감아주시면, 놈들의 골통이든 철문이든 전부 으깨버릴 수 있습니다. 형님의 앞길을 가로막는 건 뭐든지 부수겠습니다.”
“좋다. 넌 내일 밤 전면전 돌격을 맡는다. 지하 카지노의 출입구를 강제로 개방하고 경비들의 대열을 붕괴시키는 선봉이다. 창수 너는 소희 씨와 함께 차량 안에서 후방 지원 및 통신 교란, 전력 차단을 담당해라. 좁은 지하에서 벌어지는 싸움인 만큼 우리가 퇴로를 확보하고 신속하게 빠져나오는 타이밍이 가장 중요하다.”
“알겠습니다, 형님. 오랜만에 제대로 된 큰 판이 벌어지는군요.”
창수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나는 마동이와 함께 직접 지하 2층 금고로 들어간다.”
태형의 지팡이가 지도의 지하 2층 표시를 콕 짚었다. 배신자 최진상의 숨통을 쥐기 위한 거대한 사냥의 덫이 강남 한복판에 설치되는 순간이었다.
한편, 깊은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김포의 대성 폐차장.
쾅-!
철제 펜스가 굉음을 내며 쓰러졌다. 안개를 뚫고 들어온 세 대의 검은색 카니발에서 수십 명의 사내들이 내렸다. 그들은 모두 검은 가죽 재킷을 입고 야구배트와 쇠파이프를 들고 있었다.
그들의 중심에서 한 사내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훤칠한 키에 날카로운 무테안경을 쓴 남자. 그의 눈은 뱀처럼 가늘고 길었으며, 입가에는 비열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최진상의 직속 사냥개이자 금성그룹의 또 다른 무자비한 해결사, 구자명이었다.
구자명은 주머니에서 시가를 꺼내 불을 붙였다. 붉은 불빛이 그의 냉혹한 얼굴을 잠시 비추었다.
“박마동이 이 새끼 어디 갔어?”
구자명이 시가 연기를 뱉으며 읊조렸다.
그의 부하들이 폐차장 구석의 낡은 컨테이너 사무실 문을 부수고 기어들어 가, 안에서 밤샘 경비를 서고 있던 늙은 관리인을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고 나왔다. 노숙자 출신으로 마동이 간간이 밥값을 챙겨주던 늙은 관리인은 공포에 질려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사, 살려주세요! 마동이는 아까 저녁에 어떤 손님들이랑 차 타고 나갔어요!”
구자명은 구두 굽으로 바닥의 진흙을 비벼 끄며 관리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쥐고 있던 시가 불똥을 노인의 뺨에 그대로 비벼 껐다.
“치이익-!”
“아아아악!”
지독한 살 타는 냄새와 함께 관리인이 비명을 지르며 나자빠졌다. 구자명은 안경을 치켜올리며 노인의 머리채를 다시 움켜잡았다.
“어떤 손님들인지 아주 자세하게 말해봐. 차 번호, 인상착의. 하나라도 틀리면 다음엔 네 눈깔에 이걸 비벼 끌 테니까.”
관리인은 고통과 공포에 질려 눈물을 흘리며 횡설수설 말을 뱉어냈다.
“다, 다리를 절었어요! 지팡이를 짚고 있었고, 덩치가 큰 가죽 재킷 입은 남자랑 같이…… 마동이가 그 다리 조는 사람을 형님이라고 부르면서 울었습니다! 진짜예요! 장항동 쪽 오피스텔 얘기를 하는 걸 들었어요!”
지팡이를 짚고 다리를 저는 사내.
구자명의 눈이 뱀처럼 번뜩였다. 최진상 실장이 그토록 두려워하며 찾아 죽이라던 바로 그 망령, 강태형이었다.
구자명은 더러운 것을 만졌다는 듯 고문당한 관리인을 진흙바닥에 팽개쳤다. 그리고 품에서 휴대폰을 꺼내 빠르게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두어 번 울린 후, 최진상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찾았어?”
“예, 실장님. 구자명입니다. 예상대로 강태형이 움직였습니다. 과거 자기 똘마니였던 박마동을 데려갔더군요. 관리인 늙은이를 털어보니 일산 장항동 일대 오피스텔에 은신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수화기 건너편에서 최진상의 가쁜 숨소리와 함께 살기가 담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 “당장 애들 풀어. 확실하게 처리해라, 자명아. 경찰 놈들도 일산으로 다 모으고 있으니까 한 놈도 살려두지 마.”
“걱정 마십시오, 실장님. 제가 직접 숨통을 끊어 놓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구자명은 손수건으로 손가락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냈다. 그리고 비열한 안경 너머로 부하들을 쏘아보았다.
“장항동 쪽에 최근 가명으로 단기 임대된 오피스텔 리스트 싹 다 긁어모아. 차는 세 대 다 일산으로 쏜다. 이동해.”
구자명은 입가에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남은 시가를 진흙바닥에 떨어뜨려 구두 굽으로 짓밟았다.
“태형 형님, 출소하셨으면 조용히 찌그러져 계시지 왜 기어 나와서 제 칼날을 자청하시는지 모르겠네. 내 손으로 직접 그 잘난 머리통을 잘라 실장님 책상 위에 올려드리지.”
검은색 카니발 차량들이 안개 가득한 김포 폐차장을 빠져나가 자유로를 타고 일산 방향으로 굉음을 내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뱀 같은 구자명의 이빨이 강태형의 턱밑까지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