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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혈의 맹약15화

철혈의 맹약

철혈의 맹약

15화: 허를 찌르다

삐- 삐- 삐-.

노트북 화면 구석에 띄워둔 감시 센서 창이 붉은 불빛을 깜빡이며 경고음을 냈다. 연소희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녀는 재빨리 화면을 전환해 오피스텔 주차장과 엘리베이터 입구 CCTV 화면을 모니터링했다.

“태형 씨! 놈들이에요! 카니발 세 대가 지하 주차장에 들어왔고, 검은 수트를 입은 사내들이 비상계단과 엘리베이터로 나뉘어 올라오고 있어요. 우리 은신처가 특정됐어요!”

소희의 다급한 외침에 오피스텔 안의 공기가 급격하게 팽팽해졌다.

강태형은 주저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팡이를 짚은 그의 얼굴에는 미세한 미동조차 없었다.

“가방 챙겨라. 노트북과 드라이브만 있으면 된다. 비상계단으로 내려간다.”

창수가 소희의 노트북과 하드 드라이브를 배낭에 쓸어 담았고, 박마동은 신속하게 문가로 가 바깥 기척을 살폈다.

태형은 주방으로 향했다. 싱크대 아래 가스 밸브를 최대로 열고, 주방 상판 위에 굴러다니던 캠핑용 휴대용 가스레인지의 부탄가스 캔 두 개를 밸브 옆에 바짝 붙여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 토스터기의 열선을 타이머 콘센트에 꽂아 놓은 채 가동 스위치를 눌렀다. 감옥에서 마두식에게 들었던 사제 부비트랩 기법이었다. 지연 시간은 대략 3분.

“가자.”

네 사람은 소리 없이 오피스텔 문을 닫고 나와 복도 끝자락에 위치한 비상계단의 철문을 열고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절뚝거리는 태형의 곁을 창수와 마동이 든든하게 받쳤다.


쾅-!

오피스텔 804호의 두꺼운 철제 방화문이 거칠게 부서지며 복도 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

구자명이 안경 너머로 번뜩이는 뱀의 눈을 번뜩이며 가장 먼저 피비린내를 맡은 야수처럼 방 안으로 난입했다. 그의 뒤를 따라 야구배트와 사시미 칼, 그리고 권총을 쥔 열댓 명의 사내들이 좁은 현관을 통해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먼지와 어둠 속에서 방 안을 샅샅이 뒤지던 덩치 큰 사내들이 사방을 살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실장님, 아무도 없습니다! 온기가 남아있는 걸 보니 비상탈출한 지 몇 분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구자명의 미간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3년 만에 마주할 사냥감의 목덜미를 코앞에서 놓쳤다는 사실에 이빨이 바드득 갈렸다.

“쥐새끼 같은 것들, 절대 멀리 못 갔다! 당장 비상계단이랑 지하 주차장 출구를 차단하고 샅샅이 뒤져…… 어? 이 냄새는…….”

구자명은 코끝을 찔러오는 알싸하고 매캐한 액화석유가스(LPG) 특유의 냄새를 뒤늦게 알아챘다.

그와 동시에 주방 싱크대 위, 미리 타이머 콘센트에 연결해 두었던 낡은 토스터기의 내장 열선이 주홍빛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밀폐된 좁은 방 안에 가득 차 흐르던 가스 기류가 달아오른 열선에 닿는 순간, 거대한 도화선이 당겨졌다.

콰아아아앙-!

귀를 찢는 듯한 폭음과 함께 눈이 멀 것 같은 백색의 섬광이 터져 나왔다. 이내 거대한 적색 화염 폭풍이 오피스텔 내부의 거실과 주방을 통째로 삼켜버렸다. 굳게 닫혀 있던 창문 유리 수십 장이 산산조각이 나며 아파트 단지 아래로 날카로운 비처럼 쏟아져 내렸고, 폭발의 물리적인 충격파가 복도를 따라 세차게 덮쳤다.

현관 문가에 서 있던 구자명은 찰나의 순간 본능적으로 복도 바닥으로 몸을 날렸으나, 등 뒤를 강타하는 엄청난 폭풍의 힘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는 쏟아지는 불길과 뜨거운 공기에 휩싸여 콘크리트 벽면에 강하게 부딪친 후 복도 바닥을 볼품없이 뒹굴었다.

“아아아악! 불이야!”

“실장님! 실장님!”

부하들의 비명과 깨진 유리창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구자명은 이빨을 갈며 잿더미가 된 바닥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비싼 수트는 그슬려 찢어졌고, 안경 렌즈는 깨져 얼굴에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이, 이 지독한 새끼가……!”

구자명은 얼굴의 피를 닦아내며 찢어지는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주차장! 지하 주차장 놈들한테 연락해! 절대 놓치지 마라!”


같은 시각, 지하 주차장 입구 근처.

비상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온 태형 일행은 입구 근처에서 서성이던 구자명의 부하 세 명과 맞닥뜨렸다. 놈들은 무전을 들었는지 품에서 칼을 꺼내 들며 태형 일행에게 달려들었다.

“거기 서, 이 개새끼들아! 꼼짝 마!”

선두에 선 덩치 큰 사내가 번뜩이는 사시미 칼을 허공에 휘두르며 기세 좋게 덤벼들었다.

“비켜라, 이 날파리 같은 쓰레기들아!”

박마동이 주먹을 꽉 쥐며 야수처럼 포효하고 앞으로 돌진했다. 그의 집채만 한 거구는 좁은 지하 복도에서 멧돼지처럼 거침없이 밀고 나갔다. 사내가 당황하여 찔러오는 예리한 칼날을 가볍게 상체만 비틀어 피한 마동은, 오른손 세 손가락이 굳어 으스러진 상태였지만 남은 두 손가락과 손바닥의 막강한 악력을 이용해 상대의 손목을 강철 족쇄처럼 낚아챘다.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무지막지한 완력에 사내의 비명이 찢어지게 터져 나왔다. 마동은 그 비명을 무시한 채, 한 손으로 사내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그대로 번쩍 들어 올려 자신의 탄탄한 허벅지 위로 강하게 처박았다.

콰직-!

사내의 척추 뼈가 반대 방향으로 어긋나며 꺾이는 끔찍한 소리가 주차장 벽면에 울려 퍼졌다. 사내는 흰자위를 드러내며 바닥으로 구겨지듯 허물어졌다.

동시에 다른 한 놈이 창수를 향해 쇠파이프를 횡으로 내리쳤다. 창수는 날렵하게 허리를 숙여 파이프의 매서운 궤적을 피해낸 뒤, 품속에서 미리 챙겨 두었던 묵직하고 단단한 공업용 대형 렌치를 꺼내 사내의 관자놀이를 향해 가차 없이 내리찍었다.

빡-!

두개골이 함몰되는 불쾌한 소리와 함께 핏방울이 허공으로 튀었다. 관자놀이를 강타당한 사내는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옆으로 길게 쓰러져 바닥에 피를 쏟아냈다. 남은 마지막 한 놈이 그 참혹한 무력에 겁에 질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뒷걸음질 쳤지만, 짚고 서 있던 강태형의 날카로운 안광이 번뜩였다. 태형이 손목을 가볍게 털자 묵직한 지팡이의 철제 하단부가 사내의 무릎 뒤 오금을 정확하고 묵직하게 후려쳤다.

툭-!

오금이 꺾인 사내가 중심을 잃고 무릎을 꿇자, 창수가 번개처럼 뛰어들어 녀석의 가슴팍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기도가 막힌 녀석은 눈알을 뒤집으며 바닥으로 쓰러져 혼절했다.

“타요! 빨리!”

대기하고 있던 소희의 카니발이 타이어 비명을 지르며 그들 앞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슬라이딩 도어가 열리자마자 태형과 창수, 마동이 차례로 탑승했다. 소희는 가속 페달을 밟아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오피스텔 8층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와 불길이 사이드미러 속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차 안의 공기는 가쁘게 몰아쉬는 숨소리로 가득했다.

태형은 쑤셔오는 오른쪽 무릎을 손으로 강하게 짓눌렀다. 흉터가 뒤엉킨 다리 주변의 근육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태형 씨, 괜찮아요?”

소희가 미러를 통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괜찮다.”

태형은 깊은 숨을 내쉬며 창밖을 응시했다. 차는 일산을 벗어나 자유로를 타고 남하하고 있었다. 멀리 한강 건너편으로 서울의 불빛들이 길게 번져 보였다.

“형님, 일단 다른 안전가옥으로 피해야 합니다. 최진상이 사설 킬러들까지 풀었고 경찰도 우리를 쫓고 있습니다. 서울 시내로 들어가면 포위망에 걸릴 겁니다.”

창수가 뒤를 경계하며 말했다. 마동 역시 묵묵히 으스러진 손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태형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얼음보다 더 차가운 광채가 빛나고 있었다.

“아니. 서울로 간다. 강남 테헤란로로 방향을 돌려라.”

“예? 강남 말입니까? 거기는 금성파의 심장부입니다!”

창수가 놀라 반문했다.

태형은 나직하게 비웃었다.

“최진상이 사냥개들을 모두 일산으로 보냈다면, 지금 강남 금성캐피탈 본사의 경계는 가장 허술할 거다. 놈들은 우리가 도망쳐 숨을 곳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겠지. 우리가 지금 당장 그들의 심장을 찌르러 올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할 거다.”

태형의 말에 차 안에는 일시적인 침묵이 흘렀다.

허를 찌르는 역발상. 적이 자신들을 사냥하기 위해 그물을 넓게 펼친 찰나, 경계가 비어버린 둥지를 직접 타격하겠다는 냉혹한 결단이었다.

운전대를 잡은 소희의 입가에 붉은 미소가 번졌다.

“재미있네요. 놈들이 멍청하게 일산 탄천을 뒤지고 있을 때, 우리는 그들의 돈줄을 쓸어 담는군요. 방향 바꿀게요.”

카니발은 즉시 올림픽대로 방향으로 차선을 변경하며 강남을 향해 굉음을 내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새벽 2시, 서울 강남 테헤란로.

비는 그쳤지만 밤안개가 빌딩 숲 사이를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었다. 번쩍이는 초고층 빌딩들 사이로, 금성캐피탈의 15층짜리 현대식 빌딩이 보였다. 빌딩 주변은 고요했고, 몇 안 되는 보안 요원들만이 로비에서 졸고 있었다.

소희의 카니발은 빌딩 뒤편의 지하 주차장 입구 그늘진 곳에 조용히 차를 댔다.

소희는 노트북을 무릎 위에 올리고 조작을 시작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빠르게 미끄러졌다.

“빌딩 메인 보안 서버에 접속했어요. 3, 2, 1…… 지금부터 10분간 지하 주차장과 지하 2층으로 향하는 CCTV 화면을 이전 루프 영상으로 고정할게요. 경보 장치도 일시적으로 차단했어요. 서둘러야 해요.”

“창수야, 연장 챙겨라.”

태형의 지시에 창수와 마동이 묵직한 백팩을 짊어졌다. 백팩 안에는 쇠지게와 쇠망치, 그리고 현금을 담을 대형 캔버스 백들이 들어 있었다.

세 사람은 카니발에서 내려 소희가 노트북으로 열어준 지하 주차장의 방범 셔터 틈새로 신속하게 잠입했다.

콘크리트 바닥을 디디는 태형의 지팡이 소리가 지하 주차장의 적막을 깨웠다. 그들은 주차장 구석에 위치한 화물용 엘리베이터 옆, ‘관계자외 출입금지’ 팻말이 붙은 두꺼운 강철 문 앞으로 향했다.

도면상으로는 단순한 기계실 및 보일러실로 표시된 곳. 하지만 소희의 정보대로라면 이 문 너머가 바로 정재계 거물들의 불법 비자금이 세탁되는 사설 카지노의 은밀한 입구였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성인 주먹만 한 특수 디지털 도어록과 이중 잠금장치가 채워져 있었다.

태형은 문 앞에 멈춰 서서 지팡이를 고쳐 잡았다. 그의 옆으로 거구의 박마동이 다가섰다. 마동은 백팩에서 두꺼운 가죽 끈이 촘촘하게 감긴 묵직한 쇠망치를 꺼내 들었다. 으스러진 오른손으로 망치를 쥔 그의 눈빛에는 오직 파괴의 열망만이 가득했다.

창수 역시 쇠지게를 들고 태형의 뒤를 경계하며 서서 침을 꿀꺽 삼켰다.

침묵 속에서 세 사내의 팽팽한 숨소리가 지하실의 차가운 공기를 가득 채웠다.

태형이 마동을 향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부숴라.”

배신자 최진상의 목줄을 죄어갈, 금성그룹의 거대한 자금 성벽을 무너뜨릴 철혈의 습격이 마침내 강남의 심장부에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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