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혈의 맹약

16화: 판을 뒤엎다
철컥-. 스으으윽-.
연소희의 원격 해킹에 반응하여, 기계실 문으로 위장되어 있던 육중한 두께의 강철 전자 도어가 부드러운 유압 음을 내며 양옆으로 열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뿜어져 나오는 자욱한 시가와 담배 연기, 그리고 귓가를 때리는 몽환적인 재즈 음악이 쏟아져 내렸다. 내부는 외부의 삭막한 콘크리트 복도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번쩍이는 호화로운 네온 불빛과 붉은 벨벳 카펫이 바닥에 깔려 있었고, 중앙에는 바카라와 룰렛 게임 테이블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말끔한 턱시도와 수트를 입은 정재계 인사들과 금성그룹 간부들이 칩과 현금 다발을 굴리며 광기 어린 눈으로 테이블을 주시하고 있었다. 강남 한복판, 법과 도덕의 사각지대에서 은밀하게 굴러가는 거대한 타락의 제국이었다.
갑작스러운 강철 문의 개방에 카지노 안의 시선들이 일시에 입구로 쏠렸다.
가장 먼저 걸어 들어온 것은 지팡이를 짚은 강태형이었다. 그의 좌우로 어깨를 쫙 편 임창수와, 오른손에 가죽 끈으로 튼튼하게 망치를 묶어 쥔 거구의 박마동이 서 있었다.
“뭐, 뭐야? 저 병신들은?”
칩을 만지작거리던 금성그룹 간부 하나가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카지노 구석구석에 매복하고 있던 검은 수트 차림의 가드(경비원) 10여 명이 품에서 가스총과 삼단봉, 사시미 칼을 꺼내 들고 포위망을 좁혀왔다.
“전부 대가리 박아라! 당장 저 새끼들 잡아!”
가드들의 우두머리가 쇠파이프를 높이 쳐들고 악을 쓰며 가장 먼저 달려들었다.
“이 버러지 같은 쓰레기들이 감히 누굴 보고 주둥이를 놀려!”
박마동이 거대한 주먹을 꽉 쥔 채 가드들의 두꺼운 대열을 뚫고 폭풍처럼 돌진했다. 그의 왼손이 우두머리 가드의 멱살을 쇠사슬처럼 낚아채더니, 엄청난 원심력을 이용해 대리석 벽면을 향해 포탄처럼 던져버렸다.
쿵-!
지하 지실의 바닥이 미세하게 진동할 정도의 거대한 충격과 함께 벽면에 기괴한 거미줄 모양의 균열이 가며 우두머리가 피를 토하고 기절해 고꾸라졌다. 마동은 고통으로 뒤틀린 채 가죽 끈에 고정된 오른손의 쇠망치를 공중에서 무자비하게 회전시켰다. 웅웅거리며 가르는 바람 소리와 함께 망치가 옆에서 달려들던 가드의 어깨뼈를 사정없이 내리쳤고, 쇠가 뼈를 깨부수는 끔찍한 파열음이 아수라장의 공간을 찢었다. 괴물의 거침없는 돌격에 잘 훈련되었다던 금성파 가드들의 방어벽은 단번에 지푸라기처럼 갈가리 찢겨 나갔다.
임창수 역시 뱀처럼 민첩하게 움직였다. 품에서 날카로운 잭나이프와 대형 렌치를 양손에 쥔 채 가드들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칼날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가드들의 허벅지와 팔뚝에서 붉은 선혈이 뿜어져 나왔고, 창수의 묵직한 렌치가 턱을 때릴 때마다 가드들이 추풍낙엽처럼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강태형!”
칼을 쥔 두 명의 가드가 다리가 불편한 태형을 노리고 양옆에서 덮쳐왔다.
태형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룰렛 테이블 옆의 견고한 대리석 기둥에 등을 기대어 몸의 중심을 완전히 고정했다. 다리가 불편하다는 약점은 벽을 등진 순간 확실한 방어벽이 되었다.
오른쪽 가드가 칼을 찔러오는 순간, 태형은 지팡이를 회전시키며 지팡이 손잡이의 곡선 부위로 사내의 손목을 걸어 채 옆으로 비틀었다.
우드득-!
손목뼈가 어긋나며 칼이 떨어졌다. 태형은 쉴 틈 없이 지팡이 하단부의 단단한 강화 철제를 사내의 턱끝을 향해 정확하게 찔러 넣었다.
빡-!
사내가 혀를 깨물며 뇌진탕으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동시에 왼쪽에서 덮쳐오던 놈이 삼단봉을 내려쳤지만, 태형은 몸을 낮추며 지팡이를 가로로 뻗어 녀석의 발목을 낚아챘다. 녀석이 중심을 잃고 엎어지는 찰나, 태형은 지팡이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려 녀석의 목울대를 정면으로 내려찍었다.
컥-!
숨통이 짓눌린 사내가 거품을 물며 바닥을 뒹굴었다. 단 세 번의 간결하고 무자비한 급소 타격. 전설적인 행동대장의 무력은 다리가 부러졌음에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했다.
아수라장이 된 카지노 내부에서 정재계 거물들은 비명을 지르며 테이블 밑으로 기어들어 가거나 출구로 도망치려 발악했다. 사방에 룰렛 칩과 수천만 원권 수표들이 눈송이처럼 흩날리며 바닥에 뒹굴었다.
태형의 차가운 눈동자가 룰렛 카운터 뒤쪽에서 사시나무 떨듯 떨며 비밀번호를 누르려 하던 한 사내에게 고정되었다. 최진상의 직속 자금관리인이자 금성캐피탈의 실세, 민 상무였다.
태형이 절뚝거리며 다가가 민 상무의 덜덜 떠는 멱살을 움켜잡았다.
“이, 이러지 마십시오, 태형 형님! 전 그냥 시켜서…….”
“비밀 금고 열어라.”
태형의 차가운 저음이 민 상무의 이마에 땀방울을 송글송글 맺히게 했다. 뒤에서 마동이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쇠망치를 들고 민 상무의 머리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공포에 질린 민 상무는 침을 삼키며 손가락을 벌벌 떨며 벽면의 이중 강화 액정에 지문과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치이이잉- 철컥.
두꺼운 강철 금고 문이 천천히 열리며 내부가 드러났다.
금고 안에는 5만 원권 현금 다발이 벽면 선반 가득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다음 달 박형태 의원의 선거 자금으로 세탁 대기 중이던 현금 수십 억 원이었다.
“쓸어 담아라.”
태형의 지시에 창수와 마동이 백팩에서 대형 캔버스 백들을 꺼내 현금 뭉치들을 무자비하게 쓸어 담기 시작했다.
태형은 돈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금고 가장 안쪽의 작은 강철 서랍을 지팡이 끝으로 가리켰다.
“그거 열어.”
민 상무가 열쇠로 서랍을 열자, 그 안에서 낡은 검은색 가죽 수첩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첩 표면에는 오래된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최진상과 정재계 거물들이 나눈 불법 로비 자금의 상세한 거래 일시, 계좌 번호, 그리고 세탁 경로가 연 회장의 손글씨로 빽빽하게 적힌 핵심 '차명 비자금 장부 실물'이었다.
태형은 수첩을 꺼내 가만히 움켜쥐었다.
손바닥을 통해 느껴지는 서늘한 가죽의 감촉. 최진상과 그들의 거대한 카르텔의 목숨줄이 마침내 그의 손안에 들어왔다.
“가자.”
태형이 차가운 승리를 선언하며 몸을 돌렸다.
같은 시각, 일산 장항동의 폭발한 오피스텔 건물 앞.
소방차들의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는 가운데, 검게 그슬린 구급차 안에서 구자명이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앉아 있었다. 그의 값비싼 수트는 누더기가 되어 있었고, 얼굴 곳곳에는 화상 연고가 허옇게 발라져 있었다.
그때 그의 부하가 사색이 된 얼굴로 뛰어왔다.
“실장님! 큰일 났습니다! 강남 본사…… 금성캐피탈 지하 카지노가 털렸습니다!”
“뭐라고?”
구자명이 붕대를 감은 머리를 움켜쥐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강태형 일당이 지하 2층 금고를 습격해 수십 억의 현금과…… 연 회장의 검은 수첩을 가져갔다고 합니다! 가드들은 전부 병원에 실려 갔고, 민 상무는 기절한 채 발견되었습니다!”
구자명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과 함께 온몸에 서늘한 소름이 돋았다.
“일산으로 우리를 유인한 게…… 전부 강태형의 미끼였단 말인가?”
구자명은 자신들이 망령의 완벽한 덫에 걸렸음을 깨닫고 얼어붙었다.
강남 금성홀딩스 본사의 최상층 펜트하우스.
“장부를 빼앗겼다고? 연 회장의 그 검은 장부를 말이야?”
최진상은 비서의 사색이 된 보고를 듣는 순간, 귀에 대고 있던 전화기를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툭, 하는 플라스틱 마찰음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의 하얗게 질린 안색에는 평소 대외적으로 보여주던 신사다운 오만함과 치밀한 냉정함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핏기가 사라진 입술은 바르르 떨렸고,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사시나무 떨듯 사방으로 흔들렸다. 박형태 의원에게 건넨 로비 자금 내역, 그리고 자신이 협박하여 포섭한 정재계 거물들의 목줄이 담긴 그 오래된 검은 가죽 수첩은 최진상이 양지로 올라서기 위한 단 하나의 목숨줄이었다. 그것이 강태형의 손에 쥐어졌다는 것은, 자신이 보육원 시절부터 태형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피눈물을 흘리며 쌓아 올린 철옹성이 모래성처럼 단 한 번에 공중분해될 수 있음을 의미했다.
태형은 언제나 그랬다. 자신이 아무리 영리하게 머리를 굴려 판을 짜놓아도, 그 짐승 같은 폭력과 거침없는 행동력으로 판 전체를 짓밟아 뭉개버리곤 했다. 3년 전 살인 누명을 씌워 교도소에 처박았을 때 확실히 숨통을 끊어 놓았어야 했다는 지독한 후회와 공포가 그의 숨통을 조여왔다.
“으아아아아악! 강태형!”
최진상은 짐승 같은 광기 어린 비명을 지르며 거실 대리석 테이블 위에 장식되어 있던 수억 원을 호가하는 수입 도자기와 프랑스산 명품 양주병들을 양손으로 쓸어내려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 콰직!
“강태형! 이 개새끼! 다리 병신이 된 놈이 감히 내 장부를 가져가? 죽여버릴 거야! 어떻게든 찾아서 찢어 죽여버릴 거라고!”
최진상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펜트하우스 거실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3년 동안 배신자로 군림하며 누렸던 권력의 달콤함이 순식간에 차가운 칼날이 되어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다는 공포에, 그는 완전히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뛰고 있었다.
강남 대로에는 소방차와 경찰차의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혼란을 뚫고, 검은색 카니발 한 대가 테헤란로의 화려한 네온사인 불빛 사이를 지나 유유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차갑고 묵직했다.
뒷좌석 바닥에는 수십 억의 5만 원권 현금이 가득 담긴 세 자루의 캔버스 백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박마동은 피 묻은 쇠망치를 수건으로 정성스럽게 닦아내고 있었고, 창수는 백팩의 지퍼를 잠그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수석의 연소희는 노트북 옆에 놓인 오래된 검은색 가죽 수첩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피와 눈물이 서린 수첩이었다. 그녀의 뺨 위로 뜨거운 눈물 한 줄기가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태형은 품에서 수첩을 꺼내 가만히 쓸어내렸다. 그의 깊은 눈동자에는 배신자들의 비명이 이미 어른거리고 있었다.
“이제 시작이다.”
태형의 나직한 음성이 어두운 차 안을 울렸다.
“최진상의 돈줄을 끊었고, 약점을 쥐었다. 다음은 놈이 그토록 갈망하던 왕좌의 자리에서 스스로 떨어지게 만드는 일뿐이다.”
카니발은 강남의 화려한 밤거리 너머,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몸을 감추며 유유히 질주했다. 맹약으로 묶인 복수귀들의 차가운 복수극은 이제 그들의 심장부로 칼날을 완전히 들이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