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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혈의 맹약17화

철혈의 맹약

철혈의 맹약

17화: 균열

비는 완전히 그쳤지만, 인천 만석동 괭이부리말의 밤바람은 살을 에는 듯이 스산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짠내와 비린내가 좁은 골목길과 낡은 판잣집들 사이를 휘감았다. 어두운 부두 구석, 쇠락한 폐선박 정비창의 거대한 녹슨 셔터 틈새로 미세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임창수가 일산 오피스텔이 발각될 것에 대비해 은밀하게 마련해 둔 새로운 아지트였다. 사방에는 먼지 쌓인 쇠사슬과 선박 엔진 부품들, 그리고 기름때 묻은 철골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정비창 한가운데에 먼지가 두껍게 내려앉은 커다란 참나무 탁자 위에 둔탁하고 무거운 가죽 마찰음과 함께 세 자루의 커다란 캔버스 가방이 연이어 거칠게 던져졌다.

지익-. 지이익-.

창수가 거친 손길로 가방의 지퍼를 끝까지 열고 내용물을 탁자 위로 힘껏 쏟아내자, 주홍빛 띠지로 묶인 5만 원권 현금 다발 수십 억 원이 거대한 산더미처럼 쌓이며 사방으로 우수수 흘러내렸다. 기름때가 절어 얼룩진 나무 탁자 위를 화려하게 수놓은 거대한 현금 더미는 흔들리는 주홍빛 백열등 불빛을 받아 기묘하게 번쩍였다.

창수와 마동은 눈앞에 펼쳐진 거액의 실물 현금을 보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지옥 같은 인천 연안부두와 일산 오피스텔 폭발을 거치고, 마침내 강남의 심장부를 털어 가로챈 피의 전리품이자 최진상의 거대한 목줄을 죌 확실한 실탄이었다.

태형은 탁자 옆에 지팡이를 기대어 놓고 삐걱거리는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그의 시선은 산더미 같은 현금이 아닌, 연소희가 손에 꼭 쥐고 있는 오래된 검은색 가죽 수첩에 머물러 있었다.

“이 돈은 단순히 물욕을 채우기 위한 푼돈이 아니다.”

태형의 나직한 저음이 정비창의 차가운 공기를 울렸다.

“최진상을 무너뜨리기 위해 밤의 거리에 뿌릴 미끼이자, 놈들의 부하들을 사들일 칼이다. 또한 우리를 쫓는 경찰들의 눈을 돌리고, 정보원들을 포섭해 우리의 사설 군대, ‘철혈단’을 결성할 기반 자금이다. 힘이 있어야 대등한 전쟁을 치를 수 있어.”

창수와 마동은 태형의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동은 으스러진 오른손을 꽉 쥐며 탁자 위의 현금을 바라보았다. 이 돈이 최진상을 파멸로 몰고 갈 철혈의 도화선이 될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소희는 탁자 한편에 자리를 잡고 조심스럽게 가죽 수첩을 펼쳤다. 수첩 위에는 죽은 아버지의 말라붙은 핏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페이지를 넘기며 돋보기를 대고 빽빽하게 적힌 수치들을 읽어 내려갔다.

“이것 좀 봐요.”

소희가 수첩의 한 페이지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다.

“보궐선거 후보인 박형태 의원의 차명 계좌번호와 은행 코드들이에요. 2024년 3월 15일, 8억 원 현금 전달. 5월 20일, 금성캐피탈 가명 대출 형식으로 12억 원 송금. 그리고 그 옆에는 전부 최진상의 친필 사인이 적혀 있어요. 자금 전달책의 이름과 세탁을 담당한 차명 법인의 명세서까지 완벽하게 기록되어 있네요.”

소희의 눈동자가 차갑게 타올랐다.

“법원에 제출해도 꼼짝 못 할 완벽한 물증이에요. 박형태가 아무리 발뺌하려 해도, 이 수첩이 세상에 공개되는 순간 그의 정계 은퇴는 물론이고 즉각적인 구속을 피할 수 없어요. 그리고 박형태가 무너지면 그를 비호하려던 최진상의 금성그룹 세탁 계획도 통째로 쓰레기통에 처박히게 되죠.”

태형은 수첩을 바라보며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썩은 동맹일수록 돈과 생명줄이 묶였을 때 가장 쉽게 찢어지는 법이지.”


같은 시각, 서울 강남의 금성홀딩스 펜트하우스.

사방에 깨진 유리 파편과 흩날린 서류 더미로 난장판이 된 거실 한가운데에서 최진상은 전화기를 귀에 댄 채 사시나무 떨듯 사지를 떨고 있었다. 그의 이마에서는 차가운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고, 얼굴은 완전히 핏기가 가신 흙빛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맹수처럼 거칠게 몰아치는 박형태 의원의 폭언이 거실의 정적을 찢었다.

최진상은 손바닥에 흐르는 차가운 식은땀을 바지에 문지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의, 의원님, 잠시만 노여움을 거두시고 제 말을 들어보십시오. 3년 전에 누명을 씌워 교도소로 보냈던 강태형 그 절름발이 새끼가 살아 돌아와 덫을 쳤습니다. 의도적인 기습이었습니다…….”

박형태의 고함과 협박에 최진상은 목구멍이 꽉 막힌 듯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뚝-.

전화가 끊어지자, 최진상은 거칠게 숨을 들이켜며 휴대폰을 바닥에 내던졌다.

“으아아아악!”

최진상은 거친 숨을 내쉬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의 눈에는 극도의 두려움과 공포가 가득했다. 만약 이 사실이 금성그룹의 절대 권력자인 오만수 회장의 귀에 들어가는 날에는, 자신이 먼저 사냥개들에게 던져져 토사구팽당할 것이 뻔했다.

그때 거실 문이 열리며 구자명이 붕대를 동여맨 처참한 모습으로 들어왔다.

“실장님…….”

최진상은 번개처럼 달려가 구자명의 멱살을 움켜쥐고 흔들었다. 그의 눈은 핏발이 서 미친 사람처럼 희번덕거리고 있었다.

“자명아, 구자명!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강태형 그 절름발이 새끼를 찾아내! 오만수 회장님이 눈치채기 전에, 박형태가 미쳐 날뛰기 전에 그 새끼 목을 따고 장부를 가져오란 말이야! 내일 아침까지 장부가 안 돌아오면 우린 다 죽어! 싹 다 시체가 된다고!”

구자명은 최진상의 멱살을 잡힌 채, 마른침을 삼키며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실장님. 서초서 형사들과 사설 킬러들을 전부 인천과 강남 경계에 배치했습니다. 쥐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샅샅이 뒤지겠습니다.”


다시 인천 만석동의 폐선박 정비창.

태형은 탁자 위에 놓인 대포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 다이얼에 박형태 의원의 극비 개인 회선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조용한 정비창 안에 몇 번 울리더니, 수화기 건너편에서 날이 선 박형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형은 괭이부리말 아지트의 쇠창살 문밖으로 부는 스산한 바람을 느끼며 차갑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박형태 의원님. 안녕하십니까. 밤잠을 설쳐 목소리가 많이 거칠어지셨군요.”

“경찰을 부르셔도 소용없을 텐데요. 2024년 3월 15일, 금성파의 배기철을 통해 종로 피맛골 일식집에서 직접 007 가방으로 전달된 5만 원권 신권 현금 8억 원. 5월 20일, 금성캐피탈의 허위 주택 담보 대출 방식을 거쳐 동남아 가상화폐 거래소 가명 차명 계좌로 세탁된 12억 원. 그리고 지난달 강남 텐프로 룸살롱에서 최진상이 직접 전달한 추가 현금 5억 원의 뇌물 명세서.”

태형은 감정 없는 기계처럼 수첩의 내용을 담담하게 읊조렸다.

수화기 건너편에서 일시적으로 숨소리마저 뚝 끊겼다. 거대한 침묵이 흐른 뒤, 박형태의 파르르 떨리는 쉰 소리가 흘러나왔다.

태형은 지팡이를 만지작거리며 차갑게 미소를 지었다.

“원하는 건 돈이 아닙니다. 이미 그쪽 비자금 세탁 처소에서 수십 억 원을 거두었으니까요. 그리고 저는 최진상이 보낸 사냥개가 아닙니다.”

태형의 목소리가 한 층 더 낮고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제 이름은 강태형입니다. 3년 전, 최진상에게 배신당해 다리가 부러지고 누명을 쓴 채 감옥에 갇혔던 전 금성파 행동대장이지요.”

“의원님. 저는 오직 최진상과 금성그룹의 목을 노릴 뿐입니다. 당신 같은 거물 정치인의 생명줄에는 관심이 없지요. 하지만 만약 당신이 내일 아침에도 최진상을 돕기 위해 서초서 형사들을 부리고 사설 킬러들의 뒤를 비호해 준다면, 이 핏자국 묻은 검은 가죽 장부는 즉시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부와 공중파 언론사 데스크로 배달될 겁니다.”

박형태는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마른침을 뱉었다.

“살아남고 싶다면 얌전히 방관하십시오. 최진상이 사방에 손을 뻗어 나를 쫓아도, 당신은 그저 먼 산 보듯 모른 체하면 됩니다. 최진상의 비호를 걷어내십시오. 당신이 최진상을 돕지 않고 고립시키는 순간, 이 장부는 영원히 내 주머니 속에서 먼지가 될 겁니다. 하지만 내일 아침이라도 경찰이 움직여 내 턱밑을 겨눈다면, 그 즉시 당신의 정치 생명은 끝입니다.”

태형의 냉혹한 경고에 박형태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굳이 파멸의 리스크를 짊어지며 최진상이라는 썩어가는 조폭 새끼를 도울 필요가 없었다. 최진상은 자신에게 돈을 대주는 사냥개일 뿐, 자신의 안위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는 순간 가차 없이 버려야 할 소모품에 불과했다.

“약속은 서로가 맹약을 지킬 때만 유효한 법입니다.”

태형은 전화를 끊고 대포폰 배터리를 분리해 바닥에 던져두었다.

정비창 밖으로 스산한 바닷바람이 철판 셔터를 요란하게 때렸다. 하지만 정비창 내부의 세 사내와 한 여자의 얼굴에는 차가운 승리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최진상과 박형태.

대한민국의 밤과 낮을 이어주던 견고해 보였던 권력의 카르텔에, 강태형이 던진 차가운 비수가 정확히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이제 배신자는 든든하던 정치적 방패를 잃고, 차가운 바람이 부는 광야에 고립된 채 사냥개들의 이빨을 마주해야 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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