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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혈의 맹약18화

철혈의 맹약

철혈의 맹약

18화: 철혈단

인천 만석동의 폐선박 정비창 내부에는 기묘한 살기와 흥분이 가득 차 흐르고 있었다.

스산한 밤바람을 뚫고, 검은 가죽 재킷을 입은 사내들이 하나둘씩 정비창의 좁은 철문으로 모여들었다. 박마동과 임창수가 최진상 일당의 감시와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극비리에 연락을 취해 모은 이들이었다. 총 22명. 모두 과거 강태형이 금성파의 실질적 2인자이자 행동대장으로 군림하던 전성기 시절, 그의 밑에서 함께 피를 흘리며 칼끝을 겨누었던 가장 충직하고 거친 부하들이었다.

태형이 감옥에 가고 최진상이 실권을 잡은 지난 3년 동안, 이들은 조직의 주변부로 밀려나 핍박당하거나 사채 시장의 말단에서 빚독촉이나 하며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거친 손과 흉터투성이 얼굴에는 배신자에 대한 분노와 삶의 비장함이 깊게 서려 있었다.

정비창 한가운데, 낡은 백열등 조명 아래 20여 명의 사내들이 도열하여 서 있었다.

태형은 참나무 탁자를 짚고 지팡이를 굳건히 지탱한 채 그들 앞에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우뚝 섰다. 3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다리가 크게 망가진 그의 안쓰러운 몸 상태를 직접 목격한 몇몇 부하들의 눈빛에 찰나의 우려와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태형이 그들을 향해 천천히, 그리고 깊고 가라앉은 시선을 하나하나 던지는 순간, 정비창 내부에 감돌던 미세한 의구심은 단번에 서릿발처럼 얼어붙어 지워졌다.

청송교도소라는 약육강식의 지옥 밑바닥에서 더욱 날카롭고 잔혹하게 벼려진 강태형의 눈빛은, 그 자체만으로도 좁은 정비창 전체를 숨막히는 침묵 속으로 몰아넣는 절대적인 밤의 지배자 아우라를 내뿜고 있었다.

태형은 턱 끝으로 탁자 위에 놓인 세 자루의 캔버스 가방들을 지시하듯 가리켰다. 창수와 마동이 즉시 다가가 가방 지퍼를 열고, 거래 띠지로 묶인 5만 원권 현금 뭉치 수억 원을 사내들의 눈앞에 쏟아내듯 가득 올려놓았다. 사내들의 눈이 기이하게 번뜩였다.

“지난 3년 동안, 배신자의 가증스러운 발밑에서 썩어가며 겪은 멸시와 수모가 결코 적지 않았을 거다.”

태형의 나직하고도 쇠사슬 같은 저음이 사내들의 심장을 두드렸다.

“여기 있는 돈은 금성캐피탈의 비밀 금고에서 거둬들인 최진상의 피 묻은 돈이다. 너희들의 밀린 수고와 의리에 대한 아주 작은 선금이지. 이 돈으로 너희들의 가족을 챙기고, 연장과 장비를 무장해라.”

태형이 지팡이로 바닥의 철판을 탕, 내리쳤다.

“우리는 단순히 주먹이나 휘두르는 양아치가 아니다. 이제 배신자들과 그들의 왕국을 통째로 불태워버릴 복수의 집행단이다. 이 다리를 부러뜨리고 우리를 사지로 몰았던 최진상과 금성그룹의 심장에 철을 박을 시간이다. 나와 함께 피를 흘리겠느냐.”

사내들의 눈빛이 붉게 상기되며 요동쳤다. 3년 만에 귀환한 그들의 태양이자 대장의 서릿발 같은 선언에, 사그라졌던 밤의 이리들의 투지가 들불처럼 타올랐다.

“태형 형님!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지옥 끝까지 함께 가겠습니다!”

마동과 창수를 시작으로 20여 명의 거친 장정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바닥이 울리도록 충성을 맹세했다. 밤의 거리를 피로 피로 물들일 최강의 철혈 부대, ‘철혈단(鐵血團)’이 마침내 인천의 어두운 포구에서 그 피의 태동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같은 시각, 서울 강남의 금성홀딩스 본사 회장 집무실.

최진상은 거대한 가죽 소파 위에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땀이 등덜미를 타고 축축하게 흘러내렸다. 그가 마주하고 있는 책상 너머에는 금성그룹의 절대 권력자이자 회장인 오만수가 차가운 눈으로 시가를 태우고 있었다.

오만수의 주름진 얼굴에는 깊은 심연과도 같은 잔혹함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는 이미 자신의 독자적인 비선 정보망을 통해 금성캐피탈 비밀 카지노가 털렸고, 박형태 의원과의 거래 내역이 담긴 연 회장의 비밀 장부가 통째로 사라졌다는 비보를 모두 파악한 상태였다.

오만수가 후 불어낸 시가 연기가 최진상의 얼굴을 덮쳤다. 최진상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진상아.”

오만수의 목소리는 노령임에도 칼날처럼 예리하고 묵직했다.

“예, 회장님…….”

“진상아. 내가 너를 왜 저 거친 행동대원들을 다 제치고 기획실장이라는 금성그룹의 핵심 요직 자리에 앉혀두었는지 그새 잊었느냐. 나는 시끄럽게 짖기만 하는 무식한 개보다, 주인의 명령에 따라 조용히 생각하고 목덜미를 무는 사리분별 빠른 사냥개들이 필요해서 너를 키웠다. 그런데 3년 전에 확실하게 매장했다던 강태형 그 절름발이 새끼 하나 완벽하게 처리하지 못해서 내 금성캐피탈 비밀 카지노가 털리고, 박형태 의원의 약점이 고스란히 담긴 장부를 빼앗겼단 말이냐?”

오만수가 손가락으로 쥐고 있던 고급 쿠바산 시가를 거대한 크리스탈 재떨이에 대고 비틀어 짓눌러 껐다. 치익 하는 불똥 짓이겨지는 소리가 지독한 담배 연기와 함께 최진상의 고막을 매섭게 찔렀다.

“진상아. 네 놈이 혹시 내가 쥔 이 거대한 그룹을 집어삼키고 내 등에 칼을 꽂으려고, 그 중요한 장부를 의도적으로 태형에게 넘겨준 건 아니겠지?”

“아, 아닙니다 회장님! 결단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제 목숨을 걸고 장부를 즉시 찾아오겠습니다!”

최진상은 무릎을 꿇으며 다급하게 외쳤다. 오만수의 눈에 비친 자신은 언제든 버릴 수 있는 소모품에 불과했다. 오만수는 차갑게 일어서며 창밖의 강남 야경을 바라보았다.

“명심해라. 금성그룹이라는 이름에 단 한 줄의 기스라도 나는 순간, 네 무덤은 이 강남 바닥 어디에도 없을 거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지. 만약 실패한다면…… 네 다리가 부러지는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거다.”

오만수의 냉혹한 최후통첩에 최진상은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은 살기를 느끼며 집무실을 기어 나왔다.


이튿날 아침, 괭이부리말 정비창 내부.

연소희는 노트북 키보드를 빠르게 두드리며 차명 비자금 장부의 데이터를 스캔하여 정리한 파일을 완성했다.

“준비 끝났어요. 대한일보 사회부의 김진우 기자 개인 전자메일로 최진상의 자필 서명이 들어간 비자금 전달 영수증과 차명 계좌 송금 내역 스캔본 1차분을 송신할게요. 발신지는 프록시 서버 수십 개를 거치게 해 뒀으니 추적은 불가능해요.”

태형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아쇠를 당겨라.”

소희가 엔터 키를 눌렀다.

몇 시간 뒤, 조용하던 대한민국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대한일보 1면 헤드라인에 대대적인 특종 기사가 보도되었다.

[금성그룹 기획실장 최진상, 여당 유력 정치인에게 수십 억 원대 불법 정치 자금 차명 상납 확인]

대한일보에 실린 보도 자료에는 최진상의 고유 친필 서명이 선명하게 인쇄된 비자금 전표와 불법 차명 가명 대출 내역의 원본 스캔본이 적나라하게 첨부되어 있었다. 이를 접한 언론과 시민 단체의 비난 여론은 들불처럼 급격하게 타올랐고, 대검찰청 특별수사본부가 즉시 수사에 착수해 금성홀딩스 본사를 압수수색하겠다는 대대적인 긴급 발표가 뒤를 이었다.

그와 동시에 여당의 차기 대선 후보 경선을 사흘 앞두고 정치 생명이 통째로 끊어질 사면초가에 몰린 박형태 의원이 즉각 국회 정론관에서 긴급 현안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나섰다.

수백 명의 취재진이 모여 카메라 플래시를 쉴 새 없이 터트리는 단상 위에 선 박형태는 억울함을 호소하며 손수건으로 눈물까지 훔치는 추잡하고도 비장한 연출을 감행했다. 그는 마이크에 대고 사자후를 토하듯 악을 썼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이번에 보도된 불법 비자금 상납 의혹은, 금성그룹 기획실장 최진상이 저의 정치적 행보를 방해하고 저를 협박하기 위해 주도한 악의적인 음모이자 정치 공작입니다! 저 박형태는 금성그룹의 더러운 돈을 단 한 푼도 받은 적이 없으며, 검찰은 즉시 최진상을 구속 수사하여 이 악랄한 로비와 갈취의 음모를 명명백백히 밝혀내 줄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는 바입니다!”

파렴치하지만 완벽한 꼬리 자르기였다. 박형태는 태형과의 맹약(경고)대로 살기 위해 최진상을 단두대 위로 밀어 올리는 선택을 한 것이었다.

이 보도로 인해 최진상은 하루아침에 대기업의 브레인에서 정치 로비와 뇌물 갈취를 주도한 파렴치한 범죄자이자 즉각적인 수사 대상자로 전락했다. 그의 뒤를 받쳐주던 정계의 거대한 방패막이가 순식간에 칼날이 되어 자신의 목을 베려 다가오고 있었다.


강남 금성홀딩스 펜트하우스 내부.

“박형태 이 파렴치한 정치가 새끼가 감히 나를!”

최진상은 텔레비전 화면 속 박형태의 기자회견 모습을 보며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그의 눈은 붉게 핏발이 선 채 눈물이 고여 있었고, 입가에는 거품이 일었다.

검찰의 체포 영장이 발부되기 직전의 고립무원 상황. 박형태도, 경찰도, 심지어 오만수 회장마저 자신을 향해 칼을 겨누고 있었다. 죽음의 문턱에 내몰린 배신자는 극도의 광기와 발악에 휩싸였다.

최진상은 거실 구석에 서 있던 구자명의 멱살을 잡고 미친 듯이 소리쳤다.

“구자명! 들었어? 박형태 그 새끼가 날 검찰에 넘기겠대! 오만수 회장님도 날 죽이려 하고 있다고! 이 모든 게 다 강태형 그 절름발이 새끼 때문이야! 그 새끼가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거라고!”

최진상은 구자명의 어깨를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꽉 움켜쥐었다.

“강태형하고 연소희가 어디 숨어 있든 상관없어! 차이나타운 놈들이든 살인청부업자든 전부 소집해서 오늘 밤 안으로 찾아내! 죽지 않으려면 그 병신 머리통을 내 앞에 가져오란 말이야! 내 손으로 그 새끼 목을 뜯어 발겨 버릴 테니까! 당장 움직여, 구자명!”

“예, 예! 실장님! 즉시 소집하겠습니다!”

구자명은 공포에 질린 채 펜트하우스를 빠져나갔다. 최진상은 바닥에 주저앉아 헐떡거리며 거친 안광을 뿜어냈다. 3년 전 완벽하다고 믿었던 자신의 배신이, 이제 스스로의 목을 조르는 가장 잔인한 올가미가 되어 그를 심연으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인천 포구의 스산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강태형은 멀리 서울의 붉게 물든 하늘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배신자들의 성벽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제 그들을 파멸의 제단 위에 올릴 최종 단계만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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