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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혈의 맹약87화

철혈의 맹약

철혈의 맹약

87화: 무덤가의 비망록

토요일 오후, 비가 가늘게 흩날리는 경기 외곽의 공동묘지.

자욱한 안개와 소나무 숲길을 따라 절뚝거리며 지팡이 소리가 희미하게 울리고 있었다. 연소희는 흰색 국화 꽃다발을 쥔 채, 자신의 아버지가 묻힌 돌무덤 앞에 우두커니 서서 빗방울을 맞고 있었다.

“……아버지.”

소희의 목소리가 빗물 소리에 묻혀 나직하게 흔들렸다.

“아버지를 차가운 빗길 속 교통사고로 위장해 죽였던 금성그룹의 오만수 전 회장은 구치소에서 자살했고, 살인을 직접 집행하고 모의했던 최진상도 평생을 휠체어에 의지한 채 감옥 벽만 바라보는 무기수가 되었습니다. 아버님을 지키지 못했던 정재계 비리 실세들도 전부 쇠고랑을 찼어요.”

소희는 무덤 앞 돌제단 위에 조심스럽게 흰 국화 꽃다발을 내려놓았다. 눈물이 빗물과 뒤섞여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제 우리의 약속은 완벽하게 실현되었어요. 아버님도 그곳에서는 더 이상 더러운 비자금 장부나 도청 장치 없이 편히 쉬시길 빌게요.”

바스락-.

어둠을 뚫고 한 사내가 절뚝거리는 다리로 지팡이를 짚으며 소희의 곁으로 다가와 멈춰 섰다. 강태형이었다. 그의 검은색 오버코트 깃은 빗물에 잔뜩 젖어 있었다.

태형은 무덤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연 회장님은 과거 나에게 의리와 칼을 주는 대신, 자신의 외동딸만큼은 이 어두운 밑바닥에 발을 들이지 않게 지켜달라고 당부하셨다.”

소희가 슬며시 고개를 돌려 태형을 보았다.

“소희야. 복수는 끝났다. 이제 넌 정보원이나 킬러의 뒤를 밟는 해킹 장비를 내려놓고, 대명천지 밝은 양지로 나아가라. 내가 새로 양도한 데이터 보안 분석 회사 ‘철혈 세이프넷’의 합법적인 주인으로서 네 가문을 다시 세우고 네 삶을 살아라.”

태형의 눈동자에는 지독한 냉혹함 뒤에 숨겨진, 소희의 아버지를 향한 맹약과 소희를 향한 서늘하면서도 묵직한 인간적 배려가 서려 있었다.

소희는 차갑게 젖은 손으로 태형의 코트 자락을 가만히 움켜쥐었다.

“……감사합니다, 형님. 아버님의 유지를 지켜주시고, 저를 어둠 속에서 건져내 주셔서요.”

태형은 말없이 지팡이를 짚으며 무덤가 언덕길을 걸어 내려갔고, 소희는 그 뒤를 조용히 뒤따랐다.

피비린내 나는 폭풍우가 몰아치던 복수의 터널을 지나, 마침내 하나의 영혼이 위로받고 핏빛 그늘을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철혈단의 결산은 이제 자신들의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는 완벽한 방패막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복수의 결말이 바로 눈앞에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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