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혈의 맹약

78화: 방패가 된 장부
금요일 밤 10시, 서울중앙지검 지검장실.
한강현 검사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지검장의 원목 책상 앞에 서 있었다. 책상 위에는 한 검사가 제출한 철혈 코퍼레이션 특별 수사 개시 보고서가 붉은색 결재 반려 도장이 찍힌 채 팽개쳐져 있었다.
“지검장님! 철혈 코퍼레이션의 강태형은 단순한 피해자가 아닙니다! 그자가 금성그룹의 모든 지하 이권을 통째로 삼켰습니다! 당장 수사팀을 가동해야 합니다!”
대리석 불빛 아래 서 있는 지검장이 씁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 검사. 그만두게. 청와대 비서실장까지 날아간 마당에, 법사위와 대검 핵심 수뇌부에서 이번 금성 수사를 오만수 개인의 살인교사와 권영태의 뇌물 수수로 ‘말끔히 정리’하고 종결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네. 특히…… 국회의원들과 대법관들이 강태형의 이름만 나오면 자지러지며 압박을 가하고 있어.”
지검장의 한숨 섞인 폭로에 한강현 검사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그자들이 강태형이 쥔 남은 뇌물 장부를 두려워해 수사를 막고 있는 거로군요.”
“마무리 짓게. 자네의 그 꼿꼿한 정의감이 오히려 대한민국 사법부 전체를 침몰시킬 수 있어.”
지검장의 축객령에 한 검사는 경악과 환멸 서린 눈으로 집무실을 나왔다. 법의 수호자라 자부하던 대검찰청의 최고 권력자들이, 단 한 권의 비밀 장부를 가로쥔 강태형이라는 복수귀 앞에 벌벌 떨며 몸을 사리고 있는 더러운 사법부의 현실이었다.
같은 시각, 강남의 철혈 코퍼레이션 15층 대표이사 집무실.
통유리창 너머로 비치는 화려한 야경의 붉은 네온사인 불빛 아래, 지팡이를 짚은 채 서 있던 강태형은 문이 소리 나게 열리며 들어서는 한강현 검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 검사는 비서실의 만류를 뿌리치고 들어와 태형의 책상 앞에 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강태형.”
한 검사의 목소리에는 깊은 분노와 환멸이 묻어났다.
“당신이 쥔 그 더러운 장부 때문에, 대검찰청 수뇌부가 철혈 코퍼레이션 수사팀 해체를 지시했다. 법의 정의를 수호해야 할 자들이 당신의 장부 한 권에 벌벌 떨며 꼬리를 내린 거야.”
태형은 가만히 찻잔을 내려놓으며, 깊고 가라앉은 눈동자로 한 검사를 응시했다.
“한 검사님. 내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법은 늘 힘을 쥔 자들의 방패였을 뿐이라고. 이제 내가 그 방패를 쥐었으니, 당신들의 법은 나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태형의 나직한 목소리가 집무실 전체를 차갑게 짓눌렀다.
“정의를 외치던 대법관들과 국회의원들이 지금 내 펜 끝 하나에 벌벌 떨고 있습니다. 이게 내가 3년 동안 차가운 교도소 바닥에서 배운 진짜 힘의 규칙입니다.”
한 검사는 이를 악물었다. 그의 두 눈에는 결코 꺾이지 않을 검사 한강현의 단단한 빛이 서려 있었다.
“강태형. 당신이 장부로 권력을 묶어도, 난 멈추지 않아. 난 내 검사 옷을 벗는 한이 있어도 당신을 법정에 세울 거다. 괴물이 괴물을 지배하는 세상을 그냥 두고 보진 않겠어.”
태형은 엷게 미소를 지었다.
“부디 끝까지 멈추지 마십시오. 당신의 그 눈빛이 꺾이는 순간, 서울의 밤은 너무나 시시해질 테니까요.”
한 검사는 몸을 돌려 집무실을 나갔고, 태형은 홀로 남아 창밖의 어둠을 묵묵히 응시했다.
법의 한계를 비웃으며 세상을 움켜쥔 밤의 군주 강태형과, 짓밟힌 법의 정의를 다시 세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고독한 검사 한강현. 3막의 끝자락 회색빛 서울의 밤하늘 위로, 두 사내의 엇갈린 정의의 불꽃이 더욱 푸르고 시리게 타오르고 있었다. 복수의 결말을 향한 4막 ‘피의 결산’이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