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혈의 맹약

76화: 회색빛의 정의
목요일 오후 2시,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 검사실.
금성그룹의 거물들을 연달아 기소하며 언론으로부터 ‘국민 검사’라 칭송받는 한강현 검사는, 자신의 책상 위에 펼쳐진 새로운 기밀 수사 보고서를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보고서 표지에는 붉은 글씨로 사명이 적혀 있었다.
[ 철혈 코퍼레이션 금융 거래 및 자산 취득 분석 보고서 ]
한 검사가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며 피곤한 듯 뺨을 쓸어내렸다. 그의 곁에서 실무관이 보고를 이어갔다.
“검사님. 오만수와 오성준, 권영태가 구속된 지 불과 이틀 만에 금성그룹의 알짜배기 자산인 물류와 카지노 계열사가 ‘철혈 코퍼레이션’이라는 신생 업체로 전부 넘어갔습니다. 대표이사는 3년 전 살인 누명을 쓰고 출소한 강태형입니다. 우리가 금성그룹을 털어주는 동안, 강태형이 그 틈을 타 오만수의 지하 왕국을 합법적으로 통째로 집어삼킨 셈입니다.”
한 검사는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냈다.
“우리가 강태형 그 녀석의 사냥개 노릇을 해준 꼴이군. 늙은 괴물이 가니까, 강남 한복판에 더 젊고 냉혹한 회색 괴물이 둥지를 튼 거야. 난 강남 밤거리에 새로운 오만수가 탄생하는 걸 묵과할 수 없어. 철혈 코퍼레이션의 모든 통신 및 금융 계좌 임시 감시 시작해라.”
금요일 저녁 8시, 종로의 한 한적한 한옥 찻집.
비가 나직하게 처마를 적시는 가운데, 방 안에는 따뜻한 보이차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한강현 검사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창가 상석에 검은 양복 차림의 강태형이 지팡이를 옆에 둔 채 조용히 앉아 있었다.
한 검사는 묵묵히 그의 맞은편에 앉아 찻잔을 받았다.
“강태형 대표. 금성을 무너뜨리는 데 당신이 넘겨준 장부가 큰 도움이 됐어. 하지만 난 사적인 거래를 하는 검사가 아니야. 당신이 금성의 더러운 지권을 인수해 강남의 새로운 범죄 군주로 군림하려 든다면, 다음 체포 영장의 명의자는 당신이 될 거다.”
한 검사의 목소리는 물러섬이 없이 꼿꼿했다.
태형은 찻잔을 가만히 내려놓으며, 깊고 가라앉은 눈동자로 한 검사를 응시했다.
“한 검사님. 3년 전 내가 무고하게 살인 누명을 쓰고 감옥으로 끌려갈 때, 사법부와 법의 정의는 나를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법은 늘 권력과 돈을 쥔 오만수 같은 자들의 방패였을 뿐이죠.”
태형의 나직한 음성이 고요한 찻집 안을 울렸다.
“난 법의 정의를 믿지 않습니다. 오직 으스러진 내 두 다리와 부하들의 피로 증명한 철혈의 규칙만을 믿지.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난 죄 없는 이들을 건드리지 않습니다. 당신이 내 선을 넘지 않는 한, 우린 엇갈릴 일이 없을 겁니다.”
태형이 지팡이를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검사님. 부디 끝까지 깨끗한 검사로 남아주십시오. 그래야 내가 나중에 당신의 법을 비웃어줄 맛이 나지 않겠습니까.”
태형은 절뚝거리며 찻집 문을 나섰고, 한강현 검사는 찻잔을 쥔 채 홀로 남아 굳은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서로 다른 정의의 궤적을 걷는 두 사내의 팽팽한 이념의 대립. 법의 완장을 찬 검사 한강현과, 밤의 규칙을 쥔 복수귀 강태형의 소리 없는 전쟁의 전초전이, 3막의 끝자락 회색빛 서울의 밤하늘 위로 피비린내 없이 조용하게 시작되고 있었다. 결판의 임계점은 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