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혈의 맹약

49화: 철혈의 깃발을 올리다
목요일 오전 11시,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의 한 신축 빌딩 15층.
엘리베이터 앞 로비 유리문에는 은색 금속 재질로 세련되게 양각된 사명(社名)이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 철혈 코퍼레이션 (CHULHYEOL CORP.) ]
겉보기에는 평범한 경영 컨설팅 및 자산 관리 회사였으나, 실상은 강태형이 이끄는 ‘철혈단’이 서울 한복판에 공식적으로 깃발을 꽂은 새로운 밤의 지배 구도 사령부였다.
넓고 정갈한 대표이사 집무실 안.
태형은 단정하게 재단된 검은색 정장을 입은 채, 대표용 가죽 의자에 앉아 통유리창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강남 빌딩 숲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지팡이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똑똑-.
비서실 역할을 자처한 연소희가 태블릿 PC를 들고 들어와 미소를 지었다.
“금성그룹 권영태 회장이 약속을 이행했어요. 금성파 시절 불법 카지노와 사설 대출업을 관리하던 하부 계열사 ‘금성레저’와, 부두 창고 및 지하 유통망을 쥐고 흔들던 ‘금성로지스’의 지분 100%가 법적으로 우리 ‘철혈 코퍼레이션’으로 전부 승계 완료되었어요. 이제 우리는 매달 수십 억의 합법적인 현금 흐름을 쥐게 된 거예요.”
태형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최진상과 오만수 부자를 차례로 파멸로 몰고 간 대가로, 마침내 강태형은 서울 밤거리의 모든 돈줄과 하부 유통망을 합법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거대한 성벽을 쌓아 올린 것이었다.
집무실 안쪽 소파에는 각각 깁스를 하고 어깨에 붕대를 감은 임창수와 한정훈, 그리고 휠체어에 앉아 어깨와 다리를 붕대로 감은 박마동이 앉아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피로와 부상의 흔적이 역력했으나, 눈빛만큼은 과거 보육원 시절과 금성파 전성기 때보다도 매섭고 단단하게 빛나고 있었다.
태형이 자리에서 일어나 지팡이를 짚으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다들 고생 많았다.”
태형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가 차가운 감옥 바닥과 비바람 치는 빗속에서 흘린 피가, 마침내 이 강남 한복판에 철혈 코퍼레이션이라는 거대한 성벽이 되어 돌아왔다. 권영태는 합법적인 대기업의 껍데기를 쥐고 좋아하겠지만, 실상 금성을 지탱하던 진짜 힘은 이제 우리 손안에 있다.”
태형이 비서실 데스크에 놓여 있던 술병을 들어 네 개의 잔에 맑은 보드카를 따랐다.
“오늘부로 우리는 깡패 조직 금성파가 아니다. 배신의 대가를 피로 치르게 하고 우리의 길을 갈, ‘철혈단’이다.”
네 사내가 잔을 들어 부딪쳤다.
챙-! 하는 맑은 유리 마찰음과 함께 사내들은 단숨에 잔을 비웠다.
“축하드립니다, 형님! 아니, 대표님!”
창수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고, 마동은 휠체어 위에서 묵직한 주먹을 가슴에 대며 머리를 숙였다. 정훈 역시 태형의 든든한 조력자로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2막 ‘철혈의 기반 구축’이 완벽하게 완료되었다. 그들은 이제 사지의 도망자가 아닌, 강남의 화려한 고층 빌딩 뒤에서 세상을 주무르는 밤의 제왕들로 우뚝 섰다.
하지만 태형은 잔을 내려놓으며 창밖의 빌딩 숲 너머 어두운 하늘을 묵묵히 응시했다. 오만수의 잔당들과, 물속으로 사라진 빅토르 최의 생사여부. 그리고 권영태와의 불안한 동맹이 가져올 3막 ‘균열과 전면전’의 폭풍우가, 저 먼 지평선 너머에서 피비린내를 풍기며 조용히 몰려오고 있었다. 복수의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