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혈의 맹약

47화: 안개 속의 거래
화요일 저녁 9시, 강남의 한 회원제 고급 스파 스팀룸.
자욱한 백색 온천 증기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어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몽환적인 공간이었다. 금성그룹 부회장 권영태는 실크 목욕 가운을 걸친 채, 홀로 대리석 의자에 기대어 앉아 눈을 감고 피로를 풀고 있었다. 주주총회를 소집하기 위한 밑작업으로 온갖 스트레스를 받던 터였다.
스르륵-.
스팀룸의 무거운 유리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들어섰다.
권영태는 수행원 외에는 출입이 통제된 이 방에 들어온 낯선 인기척에 눈을 떴다. 자욱한 증기 속에서 절뚝거리며 다가오는 사내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지팡이 대신 대리석 벽을 짚으며 조용히 다가와 권영태의 맞은편 의자에 앉는 사내.
강태형이었다.
“……누구냐.”
권영태가 미간을 찌푸리며 경계했다. 증기가 조금 걷히며 태형의 서늘하고 깊은 눈동자가 권영태의 눈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권 부회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강태형입니다.”
권영태의 동공이 급격하게 확장되었다. 그가 황급히 소리치려 입을 열던 찰나, 태형이 가운 주머니에서 방수 팩에 밀봉된 두꺼운 서류 뭉치를 테이블 위에 툭 던져놓았다.
“사람을 부르기 전에, 이걸 먼저 보시는 게 신상에 좋을 겁니다.”
권영태는 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서류를 꺼내 들었다. 증기 속에서 서류의 내용을 확인해 가던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KH 건설의 비밀 금고에서 나온, 오만수 회장과 아들 오성준이 정재계 주요 인사들에게 건넨 비밀 뇌물 상납 리스트의 원본 복사본이자, 오성준이 직접 자금을 집행하고 서명한 차명 영수증들이었다. 오성준을 횡령 및 배임 혐의로 단숨에 구속시키고 이사회에서 영구 제명할 수 있는 치명적인 내과용 비수였다.
권영태는 서류를 다시 방수 팩에 넣고 태형을 노려보았다.
“강태형…… 오만수를 지옥으로 보낸 쥐새끼가 바로 너였군. 그래, 내게 이걸 보여주는 이유가 뭐냐. 날 협박하려는 건가?”
태형은 엷게 미소를 지었다.
“협박이 아니라 제안입니다. 이 서류를 이용해 내일 오전 임시 이사회에서 오성준을 끌어내리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꿈에 그리던 금성그룹의 회장 자리를 차지하십시오.”
권영태의 호흡이 무거워졌다. 평생 오만수의 그늘에 가려 핍박받던 그에게, 마침내 왕좌를 차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눈앞에 다가온 것이었다.
“……그 대가로 네가 원하는 건 뭐냐.”
“금성그룹의 지하 왕국입니다.”
태형의 목소리가 온천 증기보다도 차갑게 가라앉았다.
“당신이 회장이 되면, 금성그룹 산하의 모든 사설 카지노, 대부업체, 그리고 하부 물류 유통망의 지분을 전부 내가 새로 설립할 페이퍼 컴퍼니로 법적 승계해 주십시오. 겉으로는 금성과의 관계를 끊되, 실제 수익과 통제권은 내 철혈단이 갖는 겁니다. 겉은 합법적인 대기업 회장으로 남고, 밤의 밑바닥은 나에게 넘기십시오.”
권영태는 한참 동안 지독한 갈등에 휩싸였다. 태형의 제안은 금성그룹의 일부를 떼어주는 것이었지만, 자신은 평생 원했던 왕좌와 합법적인 대기업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완벽한 면죄부를 얻는 셈이었다.
결국 권영태가 비스듬히 실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좋다. 오성준을 치고 나면, 약속한 지분은 전부 넘겨주지. 하지만 강태형…… 네가 그 지옥 같은 밑바닥을 지배하다가 꼬리가 밟혀도, 나와 금성그룹은 아무 상관이 없는 거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태형이 일어서며 권영태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자욱한 백색 증기 속에서, 금성그룹의 새로운 주인 권영태와 밤의 지배자 강태형의 추악하고도 피비린내 나는 동맹이 조용히 체결되었다. 오성준을 처단하고 금성을 통째로 집어삼키기 위한 철혈단의 핏빛 덫이 이사회를 향해 거침없이 덮쳐오고 있었다. 복수의 결말이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