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혈의 맹약

46화: 거인의 빈자리
월요일 오후 3시, 서울 강남의 금성그룹 빌딩 60층 이사회 회의실.
오만수 회장의 전격 체포와 주가 폭락 사태로 인해 회의실 내부는 심각한 패닉과 음울한 분위기가 맴돌고 있었다. 테이블 양옆에 앉은 수십 명의 이사진과 계열사 대표들은 연신 식은땀을 닦으며 서로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탁-!
테이블 상석인 회장석 바로 옆자리에 앉은 한 사내가 펜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오만수 회장의 장남이자 금성그룹 부사장, 오성준이었다. 미국 유학파 출신의 세련된 수트를 입은 사내였으나, 그의 날카로운 두 눈에는 탐욕과 초조함이 섞여 있었다.
“다들 진정하십시오. 아버님이 잠시 검찰 수사를 받고 계시지만, 금성그룹의 경영 승계와 핵심 사업은 차질 없이 진행될 겁니다. 오늘부로 제가 회장 직무대행을 맡겠습니다.”
오성준의 선언에 회의실 끝자락에 앉아 있던 한 노신사가 비죽이 냉소를 지었다. 금성그룹의 공동 창업주이자 오만수에게 밀려 실권 없는 부회장 자리로 물러나 있던 권영태였다.
“오 부사장. 오만수 회장의 살인 교사 혐의 음성 파일이 전국에 공개되었소. 우리 금성그룹을 떠받치던 한명은행과 KH 건설마저 검찰 압수수색으로 마비된 마당에, 새파란 부사장이 직무대행을 맡는다고 시장이 납득하겠소? 당장 임시 주주총회를 열어 새로운 이사회를 구성해야 하오.”
권영태의 도발에 오성준의 미간이 좁혀졌다.
“권 부회장님. 아버님이 일궈내신 금성을 틈타 숟가락을 얹으시려는 모양인데, 아직은 제가 살아 있습니다. 법무팀과 정재계 인맥을 동원해 한 검사의 입을 막을 겁니다. 그리고…… 우리를 이렇게 만든 쥐새끼들을 찾아내 가루로 만들 겁니다.”
오성준이 비서에게 눈짓하자, 비밀 경호팀장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오성준은 아버지가 쓰던 폭력의 카드를 자신이 쥐고 흔들 생각이었다.
같은 시각, 서울 성북동의 한 한적한 주택가에 위치한 한옥 가옥.
연소희의 가문이 소유하고 있던 또 다른 보안 가옥 안에서, 태형은 창밖의 푸른 대나무 숲을 바라보며 지팡이를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의 어깨에는 한강현 검사의 총탄에 스쳤던 상처에 흰 붕대가 감겨 있었다.
임창수와 한정훈은 각각 부러진 손목과 찔린 어깨를 치료받은 뒤, 테이블 위에 놓인 금성그룹의 실시간 뉴스를 모니터링하고 있었다.
“형님, 오만수의 아들 오성준이 직무대행으로 나섰습니다. 아버지만큼 잔인하진 않지만, 유학파 출신답게 돈으로 로펌과 권력을 매수하는 데 아주 능한 놈입니다. 벌써 대형 로펌 ‘세양’의 변호사 수십 명을 한강현 검사에게 보내 압박을 가하고 있습니다.”
정훈이 보고하자, 태형이 나직하게 비웃었다.
“오성준은 아버지가 다져놓은 밤의 밑바닥을 모르는 놈이다. 그가 쥔 권력은 사상누각이지. 오성준이 흔들리면, 그동안 오만수에게 짓눌려 있던 내부의 늑대들이 먼저 움직일 거다.”
소희가 모니터 화면을 보며 덧붙였다.
“형님의 예측이 정확해요. 공동 창업주인 권영태 부회장이 벌써부터 반 오성준 파 이사진들을 규합해 주주총회를 소집하려 움직이고 있어요.”
태형은 지팡이로 바닥을 나직하게 두드렸다.
“권영태를 내 편으로 끌어들인다.”
태형의 선언에 창수가 놀란 듯 물었다.
“권영태 부회장 말입니까? 하지만 그 영감도 결국 금성그룹의 뿌리 깊은 썩은 물 중 하나 아닙니까?”
“권영태는 오만수에게 모든 걸 빼앗기고 복수의 칼날을 갈던 자다. 놈에게 오성준을 단숨에 끌어내릴 수 있는 KH 건설의 이중 장부 실물 카드를 쥐여준다면, 기꺼이 내 사냥개가 되어 금성을 안쪽에서부터 무너뜨려 줄 거다.”
태형의 깊은 눈동자 속에 더 치밀하고 정교한 두뇌 싸움의 판이 짜이고 있었다. 오만수라는 거인이 쓰러진 자리, 그 빈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철혈단의 두 번째 도박이 성북동의 어둠 속에서 조용히 싹트고 있었다. 복수의 전장은 이제 화려한 이사회장과 주주총회라는 또 다른 어두운 진흙탕으로 넓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