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혈의 맹약

37화: 충성의 유통기한
일산 외곽의 어두운 폐공장.
천장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아침햇살이 먼지 섞인 공기 속에서 뿌옇게 흩어지고 있었다. 김도윤 비서실장은 의자에 밧줄로 꽁꽁 묶인 채, 입에 물린 재갈이 풀리자마자 차분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얼굴은 밤새 감금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흐트러짐 없이 단정했다.
“강태형 형님. 날 이렇게 잡아 가둬 봐야 얻을 건 없을 겁니다.”
김도윤이 갈라진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난 오 회장님의 그림자입니다. 내가 입을 여는 순간, 내 가족들은 물론이고 내 주변의 모든 것이 오만수 회장과 정재계 카르텔에 의해 소리 소문 없이 지워질 겁니다. 날 죽이셔도 상관없습니다.”
태형은 지팡이를 짚은 채 그 앞에 서서 묵묵히 김도윤을 응시했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 위로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도윤아. 넌 10년 동안 오만수를 위해 개처럼 일했지.”
태형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네가 오 회장에게 바친 충성의 대가가 무엇인지, 너도 이미 짐작하고 있지 않나?”
태형이 눈짓하자, 옆에 서 있던 연소희가 인쇄된 두꺼운 서류 뭉치 하나를 김도윤의 무릎 위에 던져놓았다.
“이게 뭔지 잘 읽어봐라.”
김도윤은 묶인 손으로 어렵게 서류의 첫 페이지를 들여다보았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늘 얼음장처럼 차갑고 평온하던 그의 눈동자가 겉잡을 수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KH 건설의 용산 재개발 입찰 실패와 관련해 금성그룹 법무팀이 대검찰청 제출용으로 작성해 둔 비밀 자수서 및 면책 합의서였다. 자수서의 명의자는 다름 아닌 ‘김도윤’이었다. 모든 불법 대출, 뇌물 공여, 회사 자금 횡령의 최종 책임자가 비서실장 김도윤 개인의 단독 범행이라는 내용이 아주 상세하게 적혀 있었고, 맨 뒷장에는 오만수 회장의 친필 서명과 결재 직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오만수는 이미 꼬리가 밟힐 것을 대비해, 10년간 자신을 보좌한 김도윤을 희생양으로 삼아 꼬리를 자를 완벽한 시나리오를 짜둔 상태였다.
“……이럴 리가 없다.”
김도윤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잘게 떨렸다.
“오 회장님은 나에게 약속하셨다. 이번 일이 정리되면 금성 계열사의 사장 자리를 주고 해외로 안전하게 이주시켜 주겠다고 하셨어…….”
소희가 냉소 섞인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토사구팽(兔死狗烹). 우리 아버님도 오만수를 위해 평생 정보를 모았지만, 결국 쓸모가 없어지자 최진상을 시켜 교통사고로 위장해 죽였어요. 당신의 충성의 유통기한은 딱 오늘 아침까지였던 거예요.”
태형이 지팡이로 바닥을 나직하게 두드렸다.
“도윤아. 오만수는 널 구치소로 보낸 뒤, 입을 막기 위해 교도소 안에서 최진상처럼 널 불구로 만들거나 자살로 위장해 지워버릴 거다. 그게 놈이 세상을 지배해 온 방식이지.”
김도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의 주먹 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10년간 바친 헌신과 충성이 한순간에 참혹한 배신으로 돌아온 분노가 그의 이성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었다.
마침내 김도윤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두 눈에는 오만수를 향한 지독한 살기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오만수를 완전히 무너뜨리려면, 뇌물 장부 따위로는 부족합니다.”
김도윤의 목소리가 뱀처럼 차가워졌다.
“그 노인네는 정재계의 인맥이 너무 두터워 웬만한 뇌물 혐의로는 구속조차 되지 않을 겁니다. 오만수를 단숨에 집어삼킬 수 있는 진짜 살인 혐의가 필요합니다.”
태형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살인 혐의라니?”
“오만수의 강남 펜트하우스 내부 비밀 서재에 실물 금고가 있습니다. 그 안에 ‘붉은 다이어리’와 녹음 파일이 들어있습니다. 3년 전 연 회장을 암살하라고 지시하는 오만수의 실제 목소리가 담긴 녹취 파일과, 최진상이 살인을 집행하고 보고한 실물 보고서입니다. 그것이 세상에 공개되면 오만수는 절대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김도윤이 마침내 최후의 열쇠를 넘겨주었다.
태형은 지팡이를 짚고 돌아섰다. 그의 입가에 피비린내 나는 서늘한 조소가 그려졌다. 거인 오만수의 심장을 관통할 가장 완벽하고 날카로운 비수가, 마침내 철혈단의 손에 쥐어지고 있었다. 복수의 결말이 머지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