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혈의 맹약

31화: 보이지 않는 칼날
비밀 가옥의 지하 제어실. 수십 대의 모니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광선이 연소희의 진지한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소희의 손가락은 키보드 위를 쉴 새 없이 날아다녔고, 그녀의 옆에는 백운각에서 가로챈 오정필 이사의 서류 가방에서 꺼낸 보안 USB와 하드웨어 OTP 키가 연결되어 있었다.
“접속 성공했어요.”
소희가 나직하게 외치자, 메인 모니터에 복잡한 금융 보안 프로그램 창이 열리며 한명은행의 차명 신탁 계좌 관리 화면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일반인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액의 숫자, 무려 1,200억 원에 달하는 비자금 잔고가 찍혀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임창수가 침을 꿀꺽 삼켰다.
“우와…… 이게 다 오만수 그 늙은이 돈이라고요? 당장 우리 계좌로 이체해 버리면 안 됩니까?”
태형은 지팡이 머리를 짚은 채 모니터를 묵묵히 응시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된다. 이 정도 거액이 한꺼번에 움직이면 한명은행 내부 전산실뿐만 아니라 금융감독원과 검찰의 추적 시스템이 즉시 작동한다. 돈을 빼내는 순간, 우리는 꼬리가 밟혀 파멸할 거다.”
“그럼 이 돈을 그냥 두고만 봅니까?”
창수가 아쉬운 듯 뺨의 반창고를 만지며 묻자, 태형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녀석을 스쳤다.
“돈을 빼내는 게 아니라, 오만수가 이 돈을 쓰지 못하게 묶어버리는 거다. 그리고 놈이 이 돈을 반드시 써야만 하는 그 뼈아픈 순간에 숨통을 조인다.”
소희가 태형의 말을 받아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 말씀이 맞아요. 오만수 회장이 요즘 가장 공을 들이고 있는 사업이 있어요. 바로 강남 노른자위 땅의 ‘용산 지구 재개발 사업’ 입찰이에요. 금성그룹의 핵심 건설사 역할을 하는 ‘KH 건설’이 이 사업을 따내기 위해 내일 오전까지 1,000억 원의 입찰 보증금을 한명은행 계좌를 통해 발급받아 법원에 제출해야 해요.”
“용산 재개발이라…….”
태형이 나직하게 되뇌었다. 오만수가 합법적인 대기업 회장으로 완전히 신분 세탁을 하기 위해 사활을 건 필생의 프로젝트였다. 만약 KH 건설이 약속된 시간 내에 입찰 보증금을 증명하지 못하면, 입찰은 자동 취소되고 금성그룹은 수천억 원의 신용도 추락과 함께 계약금 마저 날리게 된다.
“소희야. 오정필의 OTP 보안 코드를 이용해, KH 건설이 입찰 보증금으로 출금하려는 1,000억 원의 계좌를 ‘이상 거래 계좌’로 일시 묶어버려라. 금융보안원의 락(Lock)을 걸어두는 거다.”
“그건 어렵지 않아요. 한명은행 전산실에 오정필의 전결 권한으로 금융 사고 의심 계좌 등록을 신청하면, 보안 규정상 최소 48시간 동안은 계좌가 완전히 동결돼요. 오만수 영감은 내일 아침 법원 입찰 마감 시간까지 돈을 한 푼도 출금하지 못하게 되는 거죠.”
소희의 눈동자가 해킹 작업의 성공을 알리는 녹색 불빛으로 물들었다.
“동결 완료했어요. 이제 KH 건설은 돈줄이 막힌 채 내일 아침을 맞이하게 될 거예요.”
태형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오만수의 다리를 하나 꺾었으니, 놈도 가만히 있지 않겠지. 김도윤과 빅토르 최가 움직일 거다.”
태형이 돌아서며 박마동과 임창수를 보았다.
“마동아, 창수야. 놈들이 계좌 동결의 원인을 파악하고 전산실을 압박하려 들 거다. 한명은행 본점 주변의 동태를 살펴라. 특히 빅토르 최의 움직임을 예리하게 주시해야 한다.”
“예, 형님!”
두 사내가 비장하게 대답했다.
보이지 않는 칼날이 오만수의 숨통을 향해 서서히 파고들고 있었다. 자금이 묶인 거대 제국의 심장부는 내일 아침, 상상치 못한 혼란과 피바람을 맞이하게 될 터였다. 철혈단의 치밀한 올가미가 마침내 오만수의 목을 죄기 시작했다.